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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특집/김중일/‘진흙탕 속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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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408회 작성일 17-01-0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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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김중일





진흙탕 속의 꽃
―도종환 시집 『사월 바다』




    시가 굳이 왜, 어떻게 존재해야하는가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정말 시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십수년전 습작시절 선배들에게 시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잠깐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배들에 따르면, 친일은 한 어떤 시인의 아름다운 시나 엄혹했던 독재 시절 한가롭게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 따위가 가짜라는 것이다. 그렇겠구나, 나는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시인이 되었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고민할 겨를이 없이 밥벌이에 휘둘리며 끊어질 듯 말 듯 겨우겨우 시를 썼다. 어쩌면 내심 나는 순전한 언어의 문제에 진짜와 가짜 따위가 어디 있겠는가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게 주어진 자투리 시간을, 바닥에 흘린 쌀알 쓸어 담듯 긁어모아가며 내 내면에 꼭 들어맞는 언어 개발에만 매진해 왔다. 가급적 너저분한 치부는 가리고, 내보이기 좋은 부분만 잘 드러나게 재단 된 언어.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만, 그런 것이 결코 시를 진짜로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연 시에도 진짜가 있고, 안타깝게도 가짜도 있었다.



“사람들은 제게 왜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느냐고 묻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현실 아닐까요.
아비규환의 현실, 고통과 절규와 슬픔과 궁핍과 몸부림의 현실.”



도종환 시인의 신작 시집 자서의 일부다. 나라가 온통 진흙탕이다. 매주 피어나는 백만 촛불들로 새삼 우리는 지금껏 다 같은 시간을 나누며 견디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백만 촛불들은, 현실의 진흙탕 깊숙이 ‘존재의 바탕’을 두고 각자의 운명을 내맡겨 왔음으로 한날한시에 수련처럼 피어날 수 있었던 촛불들이다.



“아름답게 살고 싶었으나 불행하였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으나
꿈은 잠시 품에 안겼다 새처럼 날아갔다
정의가 승리하여 거리로 달려나가 깃발을 흔들고
그 깃발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승리한 자가 정의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오래 살았다
…중략…
아름답게 살고 싶었으나 힘겨웠다
그래도 아름답게 사는 꿈을 버릴 수 없어서
오늘도 노을 지는 쪽을 바라보며 오래 걸었다
노을은 붉은 제 몸을 풀어 강을 물들이며 멀리까지 갔는데
나는 그 뒤를 어두워질 때까지 말없이 따라갔다”



                                                                                                           ―「아름다운 세상」부분

    굳이 시기를 말하자면 2014년 사월일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까지 현실의 고통과 절규와 슬픔과 궁핍,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몸부림치는 현실 깊숙이 언어를 침투시키는 걸 의도적으로 저어했다. 가급적 진흙을 묻히지 않고 매끄럽게 윤나고 반짝이도록 언어를 잘 손질하려 애썼다. 사실 내가 자발적으로 처음 읽은 시집 속에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노동하며 일상을 사는 사람들, 민중들의 신산한 일상이 가감 없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것에 공감했지만 동시에 떠나고도 싶었다. 시집 속에 등장하는 그 시절의 궁색한 사람들의 현실은 실제로 내가 유년을 보낸 골목의 현실과 정확히 일치했고, 그 군불 같은 온기로 나의 첫 언어는 알을 깨고 부화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골목 밖으로 벗어나자마자, 나는 늘 몸부림쳐야 하는 현실 보다는 먼지 한 톨 없이 멋지게 포장된 고독이 좋아졌다. 쇼윈도 조명 아래 빛나는 슬픔은 값비싼 수제구두처럼 반짝였다. 아마도 그렇게 나는 가난이 싫어 집을 뛰쳐나와 번화가를 헤매는 빈털터리 어린 소년처럼, 등단하고 한 시절을 눈 휘둥그레 뜨고 걸어온 듯하다. 그 무렵 내가 만난 시들이 다 가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들 중에 가짜도 있었음이 결국 밝혀졌다. 최근에는 SNS로부터 발화된 문단 내 성폭력 문제로, 멀끔하게 포장된 껍데기 속에 감춰졌던 가짜 시들이 발견됐다. 이 모든 참혹함이 지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은 참담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여기는 진흙탕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끓다가 비등점을 뚫고 급기야 폭발하듯 치솟아 올라, 기어이 현실이 피투성이가 되어 눈앞에 고꾸라져야 겨우 우리 모두가 돌아본 것이다. 반성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 현실의 실제 폭력, 실제 고통, 실제 슬픔, 실제 궁핍, 그 모든 실제 몸부림 한가운데 핀 ‘수련’ 같은 촛불의 온기에 차갑게 식은 내 언어를 데워야 할 계절이 다시금 돌아왔음을 느낀다. 그런 갈증 속에서 나는 때마침 출간된 도종환 시인의 시집을 단숨에 읽는다.



그 무렵 나는 내가 불편했다
나도 나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나를 문밖으로 데리고 다니는 일이 어색했다
가까운 이들은 난감해했고
사랑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중략…
다방을 나가던 옆집의 작은 레즈비언 여자와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던 남동생은 지금 어디 있을까
그들이 살던 단칸방의 눅진함과 침침한 빛
한밤중에 아내를 패곤 하던 주인집 남자와 비명 소리는
어디까지 나를 따라오다 사그라들었을까
움츠린 그림자를 벽에 누인 채
흐느끼곤 하던 나를
길 끝에서 기다려준 이는 누구였을까
서툴고 미숙하고 기우뚱한 내 분노에 차이면서도
그 발길 옆에 피어 있던 새끼손톱만 한
풀꽃 한송이는 누구의 온기였을까”



                                                                                                               ―「골목」부분



   등단 삼십년을 훌쩍 넘긴 시인은 여전히 자신의 먼 과거를 계속해서 소환한다. 십수년 시를 쓴 나조차 이미 더 이상 불러내지 않는 그 ‘서툴고 미숙하고’ 불안했던 시절. 시인은 스무살 무렵의 자신과 주변인들의 신산한 일상을 여전히 시를 통해 선명히 기억한다. 아마도 지난날 자신의 ‘분노’에 짓밟히고 차였으면서도 수십년간 자신의 발길을 붙잡고 놓지 않는 풀꽃 같은 ‘온기’를 못 잊는 것이다. 시인은 그 ‘온기’로 아직도 시집을 데우고 밝힌다. 오래 기억할 능력이 있는 시인이라는 것을 말로써가 아니라 시로써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사월 바다’에 대한 시인의 기억은 또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실제 현실은 뜨겁다. 현실은 차갑다. 현실을 뾰족하다. 현실을 날카롭다. 심지어 현실은 낡았다. 세세연년 반복되는 이 모든 참혹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현실은 더럽다. 새하얀 꽃잎에 묻히고 싶지 않다. 현실은 똥이다. 더러워서 피하고 싶다. 현실은 적나라하다. 힘들여 묘사를 해도 영 모양새가 안 난다. 가짜 시들은, 시적 포즈로 교묘하게 눈속임하고, 딴청을 부리며 행간에 숨거나, 더 영악하게는 현실에서 너무 멀지도 결코 가깝지도 않은 그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물론 시가 눈앞의 부산스런 현실을 싹 다 끌어 담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현실의 가장 뜨겁고, 차갑고, 뾰족하고, 날카롭고, 낡고, 더러운 것은 끌어 담아야 하지 않겠나. 제가 가장 자신 있게 포장할 수 있는 것만 선별하여 내보여서야 되겠나. 이것은 자아비판이니 오해 말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잘 못하던 일들을 주로 비망록처럼 시에 담아보기로 결심했다.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 대한 애도를 누군가의 슬픔과 고독에 대해 쓰려고 노력했다. 그런 점에서 도종환 시인의 시들은 소박하지만 정확한 이정표다. 초심을 오래전부터 여태까지 딴청 없이 지켜온 시인의 시를 마침 읽을 수 있어 다행이다.



언제쯤 나는 나를 다 지나갈 수 있을까
어디까지 가야 나는 끝나는 것일까
하루가 한세기처럼 지나갔으면 하고 바라는 저녁이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풍경의 배경음악은
대체로 무거웠으므로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버거운 시간들로
너무 진지한 의상을 차려입어야 하는 날이 많았으므로
슬픔도 그중의 하나였으므로
내가 있는 장면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밤이 많았다
네가 떠난 뒤에는 더 그랬다
언제쯤 나는 나를 다 지나갈 수 있을까
장마를 끌고 온 구름의 거대한 행렬이
천천히 너 없는 공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저녁 구름」전문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물음이 여전히 시종 담겨 있는 시가 좋다. 알다시피 일상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타진하고 묻는 시는 그다지 전위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나 역시 한때 그런 물음을, 반복되는 잔소리처럼 여기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그 물음을 끝내 끌어안아 곳곳에 결코 가공되지 않는 모서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온 시가 시간이 가도 진짜라는 생각. 내가 잘 못 쓰는 그런 시가 진짜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에 시간을 덧발라 지우려하지 않고, 상처의 주인이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고 나서도, 그 상처를 ‘화인火印’처럼 대신 새기고 사람보다 오래 살아가는 시가 좋다. 올해는 온통 진흙탕이었다. 벌써 추운 겨울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온기 있는 시집을 만나게 되어 진짜 다행이다.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화인(火印)」부분







**약력: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내가 살아갈 사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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