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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특집/나의 시, 나의 생활/이은규/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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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나의 시, 나의 생활
이은규
실감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김윤식, 『내가 읽고 만난 일본』, 그린비, 2012, 307~355면 참조.) 그는 말한다. 방법은 단 하나 정면 돌파뿐이라고. 그것의 실체는 곧 일상적 삶의 실감이 아닐 수 없다고 말이다. 무엇을 위한 방법인가. 바로 삶 그 자체. 그가 소개하고 있는 일본의 두 근대 문학 연구자인 고바야시 히데오와 에토 준은 대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고받는다. 히데오의 논점은 역사란 일정한 방법에 따라 쓰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과거가 현현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모든 능력을 최대한 사용하게 되는데, 그 일을 가르쳐주는 것이 일상의 경험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사생활은 리얼리티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덧붙인다. 이에 동의하며 에토 준 역시 사생활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데, 사생활 속에서야말로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처럼 두 학자는 사생활이라는 영역이 문학적 세계 구축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논의는 계속된다. 그는 두 연구자의 지적 탐구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서술하며, 사생활과 공적 생활의 균형 감각이야말로 긴장력의 원천이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사생활이라는 영역은 실감이되 가장 확실한 실감이기 때문이라는 것. 공적인 것에 대응되는 사적인 것. 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무게란, 어김없이 평형을 이루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국면마다 찾아오는 무력함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터,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특히 에토 준이 무력함을 이기는 방법으로 실천했던 것은 오직 하나. 바로 글쓰기, 필사적 글쓰기만이 방법이 된다. 쌀값시세만큼 분명한 글쓰기만이 무력함과의 대면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때의 글쓰기란 그 무엇도 아닌, 인간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인간만큼 약한 존재가 없고,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문학만큼 강한 것도 또 약한 것도 없다. 그러므로 쓰는 자의 운명은 에토 준의 경우와 같이 괴물이나 신이 되고자 하다가도 인간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는 위의 대담과 관련된 글이 전하고자하는 핵심은,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자리에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질문이 도착한다. 문학(인간) 그것이 정답이라 하면 안 될까. 그것은 끝없이 평범한 인간의 약함으로 요약되는 것. 이는 신, 천재, 괴물이 아닌 인간의 약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모두 천재도 신도 아니기에. 가까스로 괴물이기를 거부하는, 여기 나약한 인간의 기록이 있다. 무엇보다 생활에
미숙한 인간.
금방 울 것 같은 우리처럼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처럼
오래된 탐구생활
겨울 방학이면 하루 한 장씩
탐구를 해야 하던 시절
우리는 볼 빨간 소년이었을까, 소녀였을까
오늘의 주제는
눈을 관찰하고 내용을 기록해보자
구름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얼음의 결정
기억의 결정 누군가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원리를 탐구하면 할수록
눈의 내재율에 귀 기울이게 되는 이유는 뭘까
몇 권의 기록 따위는
중요하지 않거나 기억되지 않을 뿐
그럼에도 우리의 생활은 계속 된다
두 손 위에 도착한 눈송이들
호흡과 호흡 사이
사라지는 결정의 비밀에 대해 묻지 않기로 한다
비밀 없음을 숨기기 위해 꾸며낸 비밀처럼
내재율로 말하는 눈의 목소리처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당부하던 시인은 검은 구름 속으로 떠났고
매일 거르지 않고 탐구하고 있지만
왜 이토록 생활에 미숙한 걸까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처럼
울 것 같은 우리처럼
―이은규, 「생활의 탐구」, 문학들, 2013, 겨울호.
이처럼 영원한 당면과제인 생활의 탐구는 계속된다. 삶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그렇기 때문에 그가 들려주는 문학자의 눈에 대한 발언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우리에게 가닿는다. 그는 “엄밀한 현실조건을 점검하면서 다른 한편 자기 자신의 내면 및 외면에 무한한 광야를 이루고 그 끝의 박명 속에 사라져 가는 현실의 단념과 그로 인해 떨어져 내리는 소재에 대한 애처로움을 끝내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문학자의 눈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이에 대한 “감각이 자기의 내면에 대한 엄격한 윤리의식을 배양하고 이를 에너지로 하여 밀고 나가려는 충동을 두고 표현이라 부르는 것. 문학적이란 이런 현상을 가리킴인 것. 이 섬세한 윤리감각이 바로 에너지의 근원이라는 것. 이것처럼 보통 인간의 약함이 따로 있겠는가.”라고 가만히 그러나 또렷하게 질문한다. 그는 끝으로 그 약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나비 한 마리도 감당 못하는 거미줄이라고나 할까.”(앞의 책, 398면 참조.) 먼지 한 알에 우주가 담겨있는 이치와 같이, 모든 삶은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이에 대해 오래 생각한 시인의 이름을 우리는 떠올린다.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장난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나의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한도와
사물의 우매와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 전집』1, 민음사, 2008.)
잘 알려져 있듯, 김수영은 우리 근대 문학에서 근대적 생활의 의미를 탐구했던 선구적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란의 복구와 도시화, 자본주의의 심화를 동시에 겪어나가야만 했던 1950년대의 생활과 문학의 사이에서 두 항을 모두 끌어안고 나아가려는 생생한 근대적 주체를 보여준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시는 생활과의 부단한 저항이고 극복이었으며, 시와 생활 사이의 갈등 속에서 시와 생활의 길항을 고민하는 시적 주체의 구현했다.
이 작품의 제목, 왜 ‘공자의 생활난’일까. 공자와 생활난은 어울리지 않는 결합일지도 모른다. 이 제목에서 김수영 시인이 의도했던 것은, 공자로 표상되는 정신적 가치와 생활난으로 표상되는 해방 후 현실의 어려움의 대립일 수 있다. 당대 현실의 혼란속에서 김수영은 사물의 모든 속성을 바로보고자 한다. 생활난에 처하여 사물을 바로보고자하는 의지는 세계를 올바로 파악하겠다는 의지와도 관련된다. 이 시에서 김수영이 표명하고 있는 의지는 바로보기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세는 당시의 다른 시편에서 소재에 대한 거리두기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생활의 소재들을 채택하고 있지만, 사물이나 대상에 정서적 동일시의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거나, 부정과 비판의 정신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다시 떠올리게 된다. 생활에 관해 우리는 “나비 한 마리도 감당 못하는 거미줄이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오고 있을 시간이여, 실감이여, 생의 활기로 오라.
**약력: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다정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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