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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집중조명/정미소/흔들그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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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87회 작성일 16-12-3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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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정미소





흔들그네



   그와 나란히 흔들그네를 타고 있지요 흔들그네는 죽은 듯 수평선

에 정박한 배를 보고 있어요 오후의 파도가 바위벽을 오르려고 안간

힘을 써요 미끄러지며 무너지는 파열음이 바다 쪽으로 사라질 때 그

의 침묵이 또박거려요 그는 서운한 게 많아요 그의 새 여자에게 줄

진주반지는 이미 헌 여자가 된 제가 꿀꺽 삼켰지요 우울증은 고르

지 못한 일기가 준 선물이에요 그는 집채만 한 판돈을 싹쓸이 할 거

랬어요 미끼로 쓸 함선을 보내 달래요 그의 절박한 울음을 귓등으로

흘린 건 제 탓이지요 그는 갑자기 그네를 버리고 백사장을 마구 달

려요 분풀이 할 물때를 만났나 봐요 그를 보내며 나는 수평선에 정

박한 배를 보아요 죽은 듯이.







전화



어머니, 오늘 퇴근 늦어요 저녁밥 혼자 드세요 명이나물 초절임이

랑 민어구이 따뜻하게 데워 드세요 청국장에 밥 말아 드세요



흥! 밥은 먹어서 뭐 하냐!



뚝 끊긴 스마트폰 화면에 살얼음 보료가 깔린다 보료 아랫목에 손

을 넣는다 산더미로 쌓인 서류더미를 들추다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끓는

속이 재빠르게 번호를 누른다



어머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어머니가 실어나르는 카카오

톡의 좋은 말, 답장 꾸물댄다고 토라지시고, 해외출장 말씀만 드리

면 말허리 뚝 자르시고, 선물로 사드린 햅번모자는 깃털장식 흠잡으

시고 그깟 돈, 그깟 돈 어머니가 주실래요?



묵묵부답인 보료의 안색을 살핀다 후끈 달아오른 화면이 통화버

튼을 눌러달라고 깜빡인다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에미야, 내

가 생각이 짧았구나 일 해라



스마트폰 화면의 살얼음 보료가 사르르 녹는다.







맨드라미 혈서




유배살이 하던 초가에 들어선다



마당 가득
붉은 맨드라미가 꽃대를 흔든다



어긋나게 달리는 잎새 뒤



막 붓을 놓은 먹물이
붉은 획순마다
우국충정이다



혈서로 적어올린 상소문이 대역죄 되었다
파도에 갇힌 초가의 붉은 한낮



곡기 끊긴 마당에 엎드려 올리는
맨드라미의 혈서를 읽는다.






열 살



아버지의 살찐 악어몸피 지갑이 호시탐탐 저를 유혹해요



빨간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비단뱀도 살 수 있어요 볏이 붉은 암탉

도 살 수 있어요 줄이 긴 목걸이도 살 수있어요 모이통도 살 수 있어

요 후크선장이 거느리는 해적선도 탈 수 있어요



아버지의 지갑을 열었어요 백가지의 욕망이 잘 차려진 만물상에

서 신이 났지요 무지개맛 알사탕과 구름빵, 암탉의 먹이와 해적선

티켓을 샀지요 낮잠 속에, 악어 몸피만큼 부른 배를  뉘였어요



천둥 같은 암탉의 울음소리에 눈을 떴어요 만물상아주머니와 악

어 이빨을 허옇게 드러낸 아버지가 나를 보고 있었어요 배보다 배꼽

이 더 큰 거스름돈, 흘려서 들통 난 열 살이에요.






노송도
―소치 허련의 8곡 병풍




거북이의 등에서 피가 난다
구부정한 몸통에
당당하게 뒤틀린 가지



부드러운 곡선이 용솟음치며
다시 살아서 내달리는 쥐라기
육식공룡 한 마리가
이끼 낀 먹물을 턴다



일필휘지, 내달리는 원경의 끝



비늘마다 꽃가루 공기주머니가 눈 부릅뜨고
여의주로 번지는
붉은 낙관



노송도 8곡병풍 속에 거북과 공룡이 살고 있다.







<시론>

대왕메기와 시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토인비의 「청어이야기」는 무더위로 축 축 늘어지는 나에게 자극제가 된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고민은 갓 잡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런던까지 도착시키는 일이다. 대부분의 어부들은 죽은 청어를 싣고와서 노력한 만큼의 수입을 올리지 못하였지만, 유독 한 어부만은 살아있는 청어를 싣고 와서 부르는 게 값이었다. 어부가 청어를 살려서 런던까지 오는 비법은 섬뜩했다. 청어를 잡은 통에 메기를 한 마리씩 넣었다고 한다. 청어는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시달리며 편히 쉴 틈이 없었다고 한다. 시인으로 사는 나에게 시가 그렇다. 느슨하게 풀어진 폭염의 정수리를 베개 삼아 두리뭉술 넘어가는 휴식이어도 좋겠지만 시가 볶는다. 편안함에 대한 안주의 위험성을 시가 말해준다.


  다문화가족인 이웃집 췌티엥마의 고민은 엄마이면서 한국말을 모르는 것이다. 한글학교에 업혀 다니던 젖먹이 아가의 옹알이가 봇물터지듯 말이 되는 신비의 끝에 시가 걸린다. 옷 수선을 맡기러 간 세탁소의 아주머니가 눈 흐린 바늘귀에 어긋나는 실을 꿰며 혼잣말을 하신다. 늙은 어미는 일하고, 유학시킨 아들은 논다고. 낙타로 바늘구멍 뚫어야 하는 취업문의 끝에 시가 걸린다. 한 달을 굶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빵 한 조각이 생겼다. 경제논리로 셈하면 똑같이 반으로 갈라 먹어야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큰 쪽을 아들에게 준다. 용돈에 불만인 열네 살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뉴스 자막에 시가 걸린다.

  세계12대 강대국, 국가브렌드 36위. 국민소득 2만5천 달러의 시대에 살고있다. 풍요 속에 빈곤한 정서적 소통이 물음표를 달 때 느슨한 몸을 추스른다. 시는 하늘과 별과 꽃들에게 있지만 일상생활 속에도 있어서, 일상의 싱싱함을 산 채로 낚고 싶다. 






**약력:2011년 《문학과창작》으로 등단. 막비시동인. 시집 『구상나무 광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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