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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소시집/정승열/나비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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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정승열
나비
무대 뒤에서
어둡고 지친 시간들을 깡통에 담아
마구 휘저으면서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오르는 색깔들을
먼저 몸에 두른다.
정교한 스탭 뒤로 남는 춤의 그림자에
어제 물가에서 터뜨린 폭죽의 색을 입히고
동대문 길가 패션쑈에서 흘겨 보았던 춤사위에
젖은 무지개를 바른다.
무대 뒤에서
간혹 기다림의 긴 시간을 조금씩 잘라서
햇빛이 내려앉은 잎사귀를 잘근잘근 씹는 연습을 한다.
해서 뽑아낸 색실로 노란 날개깃을 만들고
그도 모자라면 목욕탕에 갇혀 있던 아이의 신음에서
퍼런 색실을 자아내어 연약하고 애처러운 춤사위 하나 만든다
설혹 막이 열리고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 위로
찬란한 내 춤이 펼쳐진다면
너울너울 내 춤사위만 보지 말고
날갯짓 사이로 흐르는 어리고 여린 색깔들의
숨죽인 노래를 들어 보아라
선물가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젊은 부부의 간절한 눈망울
인형을 찬찬히 훑고
자동차와 로봇 사이를 꼼꼼히 살피며
찾아 헤매는,
꼭 만나고 싶은
산타크루스
크리스마스이브 오늘
흔적
지난 밤 살갗을 뚫고 뼈대를 가르는
냉기로 감각이 아리다.
서까래 대들보에 있던 맨살점들은
오래 전 다 떨어져 나가고
부데끼면 삐그덕대는 뼈대로만 버틴 세월
추운 밤 앓는 소리를 이를 악물고 참으며
고개를 돌려 골목을 내려다 본다.
동생들이 서 있었던 자리
지금은 무너지고 헐려서 새 상가가 들어서는 길.
참고 버티라고 그렇게 타일렀건만
그 조그만 시련도 이겨내지 못하다니, 못난 것들.
광복이 되면서 거리에서 돌팔매를 맞고
욕설과 괄시를 받아온 우리의 역정歷程
여기저기 찢기고 상처난 몸체를 보듬고
오늘도 추운 밤을 지샌다.
아침 햇살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한 사람이 확성기로 나를 향한다.
*이 건물은 제물포 개항 초기에 지어진 목조건물로 당시 전형적인 일본상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드름
기억의 처마밑에 주르륵 매달려
되집어 세상을 들여다 본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쓰다버린 사랑을
켜켜이 모아둔
추억의 도서관
산 위에 오르며
한 손에 바람을 휘감고
반질반질한 바위에 발끝을 밀착시킨다.
아래는 까마득한 저 인간의 세상
우리가 떠나온 세상
처음으로 저 세상을 떠나
구름처럼 산을 안고 싶었다.
퇴직하고 며칠을 뒹굴다
배낭을 메고
그 속에다 지난 골 아픈 일상을 담아
구름처럼 산에 오르며
휘이휘이
허공에 흩뜨리고 싶었다
그렇게 지난 세월을 흩뜨리고 나면
돌아올 때는 분명 바람이 되리라
사람들은 알까
허공에 매달려 있는
저들이
저만큼 앞서 산을 오르며
뒤에 오를 사람들을 위해
발을 디딜 스탠스를 깎고
손가락을 비집어 넣을 홀드를 파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종내는
산 위에 올라 세상을 반추하며
바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시작메모
나는 오랫동안 우리나라 서정시가 뻗어나갈 길을 찾고자 고심했다. 시 하나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거창하게 우리나라 서정시 운운 하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고 내심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은 시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 같은 시인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내로라 하는 시인들까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고민이 아닐까. 말은 우리나라 서정시 운운 했지만 실상 껍질을 벗기고 들어가면 시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써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까. 그리고 그 시들이 오래도록 독자의 사랑을 받을 방법은 없을까. 그 길은 어디에 있을까. 결국 내 시가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된 물음들이다.
그런데도 내가 우리나라 서정시를 물고 들어간 것에는 나름대로 현재 발표되는 시들의 방향이 제대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시가 독자와 어느 정도 멀어져도 되는가를 실험이라도 하듯이 쓰는 사람조차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거의 무의식 상태의 돌출언어를 나열해 가는 시들이나, 온갖 수식어를 다 나열해 하나의 형상을 빚어가는 과잉 표현주의 시들이 과연 독자들이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영혼의 양식으로 삼아갈 시로 여길까.
하긴 요즘 새로운 시인들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일부 시들이 잘 지어진 유행가 가사보다도 못한 것을 시라고 마구 발표되기도 하니 일반 독자들로서는 정말 식상하고 시 자체에 대해 회의를 품게끔 만들기도 한다. 그런 시들에 비해 표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 들어가는 태도에 대해서는 그래도 안심이 되긴 한다. 그러나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독자가 무진장 연구를 해야 하고 해당시를 해부해서 의미를 연결시켜주는 평론가의 도움이 있어야 겨우 알동말동한 시라면, 이건 독자라는 정의를 극히 일부 사람으로 제한하거나 아니면 독자는 외면한 채 같은 부류의 시인들끼리 근친상간하는 시 밖에 될 수가 없다. 그게 바람직한 시의 방향일까. 감동은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이 또한 독자들이 시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하는 요소는 아닐까.
혹자는 먼 미래 독자들은 이런 시를 쉬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런 시기가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할 엄연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이와 같은 실험적인 시가 이미 1930년대 태동해서 다다이즘이니 모더니즘이니 초현실주의 시 등으로 세상을 요동치게 만든 적이 있으며 그 당시 우리나라 시인 이상도 이 부류에 합류하여 시를 발표했고 그 뒤에도 많은 시인들이 이런 경향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의 방향으로 올바르게 인정받지는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실험적인 방향성은 확보했지만 더 이상 시의 주류로 굳어지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독자들은 이미 상당수가 시를 외면하는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제 시의 독자는 시를 쓰는 사람들과 발표된 시를 해석해 주는 평론가들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시가 독자를 향해 손을 내밀고 독자들을 다시 끌어 모으는 길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그리 하려면 서정시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감동이 있는 시, 독자와 같은 언어로 호흡하고, 같은 감정으로 울림을 주면서도 식상하지 않은 표현을 찾아가자.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시를 쓰는 진정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약력:1979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새가 날개를 퍼덕여도 숲은 공간을 주지 않았다』, 『단풍』, 『단풍2』, 『연기』. 인천시문화상 수상. 인천문인협회 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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