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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소시집/신병은/조짐이 보여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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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신병은
조짐이 보여
몸살이 올 조짐이었어요
조짐은 다가올 나의 표정이죠
겨울 속 봄을 떠올린다든지
거미가 줄을 치면 맑다든지
새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든지
아침 무지개가 흐릴 징조라면
아침 안개는 중대가리 깬다고 하죠
늘 그렇듯 조짐은
다가올 것에 대한 아릿한 예언 같은 것이죠
티 없는 지혜의 발언이죠
나무 안에 잎이 흐르고 꽃이 흐르고 바람이 흐르듯
단어와 단어 말과 말의 사이에 조짐들이 있지요
바람이 절뚝거리며 올라서는 늦은 귀가길 골목에
햇살 꼿꼿한 내일 아침이 보이죠
세상은 조짐으로 해가 뜨고 진다는 것을 몰랐죠,
날마다 같은 산책이라고만 믿었죠.
그렇다니까요,
보이는 것들을 모른 채 한 죄로
이렇게 단단히 병이 나잖아요
그리우면 그립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하세요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의 꿈
하필이면 영하 37도의 추위를 견딘 후 부화하는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의 둥지는 겨울햇살이다
해찰대는 겨울바람 속
여린 햇살의 둥지에서 첫 발길로 걸어 나와
수억 광년 비행의 기억을 삼보일배 오체투지로 폈다 접는다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가 펴고 말았다가 펴고
날마다 허공에 봇짐을 푸는 꿈을 꾸는
저 애벌레,
점박이 검은 몸에서 하얀 모시빛이 나올까 싶었는데
사각사각 기린초에 꿈을 풀어놓을 때
그때 노란 봄꽃이 피었던 게지, 그때서야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는
한 점 붉은 꽃잎이었음을 기억하는 게지
영혼이 맑은 영하의 화법으로
추위를 견딘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한 호흡의 우화였음을 아는 게지
고추잠자리 발묵법
햇살 좋은 가을 아침 고추잠자리 한 쌍 발레리나 사랑을 나눈다.
곡선 고요히 스며듬을 바라보면 함께 더불어란 말의 고요함이 묻어나, 고요한 떨림이 건너는 길을 바라보는 것이다. 말하지 마라 몇 번 망설이다 닿는 순간 주체도 객체도 슬몃 서로를 받아들여 침묵의 화법을 꽃피우는 것이다. 날개옷을 함께 펼쳐 꽃받침이 되고 꽃잎이 되어 햇살 속에 천천히 그리고 순식간에 한 호흡법으로 꽃이 되는 것이다.
저 꽃, 어떤 대화의 발묵일까.
나도 네 끝 까지 닿아 피는 데는 그리 오래지 않을 것 같아.
아침의 귀가
물방울 하나 나뭇잎에 앉아 있습니다
햇살 비치면 또 참새처럼 포르르 날아오르죠
또 하루 동안
꽃과 바람의 들숨이 되었다가
날숨이 되었다가
아침이면 갓 내민 잎새의 머리맡에 포르르 내려앉죠
누군가의 눈빛이 되고
누군가의 젖은 가슴이 되죠
잠시 누군가의 가장자리에 앉아서야 깨닫습니다
햇볕이었다가
바람이었다가
돌아와 그대에게 정착하는 이 순간이
맑은 아침의 귀가인 것을
생의 뜨거운 귀화인 것을
햇살의 체형
햇살의 방이 있어요.
담장 아래 옹기종기 모여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겨울나기 체형과 아지랑이 너울대며 들녘을 키우던 새초롬한 몸매의 봄맞이 체형과 피 뜨겁게 그을리던 여름도 나뭇잎 연서로 보내온 가을의 체형과 이마를 맞대고 소곤대는 체형, 푸른 유년의 체형들이 널부러져 있어요
지금은 멸종된 체형들이 문득 문득 계절처럼 생각나는 이 방에 혼자 올 수 없어 한껏 부풀어 오른 비발디의 햇살도 나뭇잎 환한 웃음으로 함께 왔어요
방의 윗목에 능선으로 누운 햇살이 꽃의 씨앗이어서 그런지 햇살들 체형이, 꽃만큼 향기로워요
나도 한때 햇살이었죠
나도 한때는 나비처럼 팔랑댔죠
시작메모
사람에 대한 예절과 배려, 사랑과 존중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나의 시창작은 지식과 정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닌, 대상과 현상에 담긴, 거기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작업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가치있는 일을 창조하는 일은 늘 나를 긴장하게 한다. 상상력이 창의력, 융합력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털어내고 가능성을 열어 인지능력을 확장해 가는 과정이라면 ‘Why, Why not’의 생각하는 법thinking method에 관한 인문학의 공부법이 바로 시창작이라 믿는다.
인문학의 매력은 관점의 자유로운 이동에 있다. 해설을 끄집어내는 안목은 제각기라는 점에서 하나의 대상과 현상에 담긴 수많은 삶의 메시지를 긁어내는 묘미는 시창작의 즐거움일 것이다. 그건 해석의 몫이라기보다는 감성의 영역일 것 같다.
나는 평소에 마음에 향기를 품고 살면 사람도 꽃이 된다고 믿는다.
어긋나는 일 많은 세상에서 간명하고 올곧은 깨우침을 주는 것이 자연의 참모습이라면 자연의 참 모습으로 우리 삶을 다독이는 시 한 편 만나면 참 좋겠다. 죽을 때까지 내 삶의 행복한 거처가 되어줄 단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약력:1989년 《시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바람과 함께 풀잎이』, 『식물성 아침을 맞는다』, 『강 건너 풀의 잠』, 『바람 굽는 법』, 『잠깐 조는 사이』, 『休휴』. 전남시문학상, 전남문학상,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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