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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소시집/허문태/소문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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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태
소문
―건강원 CCTV^ 1
보름달이 뜨면
푸른 동굴 속에서 나와 등을 굽히고
흰 꼬리를 다듬는다지.
꼬리가 있다는 소문은 있는데 본 사람은 없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문이 소문을 물고 의심이 의심을 물고 사람
이 개를 물고 개가 달을 물고 하현달이 꼬리를 물고
꼬리 다듬는 모습을 본 사람은 간과 쓸개가 뽑힌다지.
저자거리에 상록수가 된다지.
역시,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고수의 솜씨야
흰 터럭 한 올 남기지 않고
무슨 상처를 꿰매거나, 꿰맸던 실밥 같은 것만
수북이 남겨놓고 사라지다니
불길
―건강원 CCTV^2
이두박근이나 삼두박근이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하나 따서 광주리에 담는다면 사과의 세상은 바뀐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부드러운 손길이 사과의 곡선마저 허물어 세상을 향한 중력을 모두 없애고 누군가의 자양분 되었다면 사과의 세상은 확실히 바뀐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불길
뜨거운 것은 뜨거운 것으로 끝나는 적이 없다.
불에 길이 있다.
중년
―건강원 CCTV^3
비만, 아집, 나태, 거드름, 철면피, 불륜, 고정관념, 독선, 비열, 군림, 정력제, 궁상, 꼴값, 잔인, 폭력, 주접, 변태, 인색, 허세, 노여움, 무사안일, 집착.
당신이 가져온 재료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삼일주야를 달였어요. 무엇이 추출되었냐구요? 노랗고 번들번들한 중년이 추출되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따끈하게 데워서 정성껏 드셔 보세요. 세상이 온통 먹을 것으로 보이고, 음담쾌락의 수치가 빠르게 높아질 것입니다. 당신은 순도 100% 중년입니다.
청춘을 원하셨다구요? 그러시다면 당신의 재료 중에 우선 반에 반만이라도 바꿔 보시지요. 무엇을 바꿔야 하냐 구요? 글쎄요. 저녁노을에 물어 보시든지, 가을 들녘에 물어보시든지, 눈 내리는 겨울강에 물어봐도 괜찮겠지요. 준비 되면 가져 오세요. 삼일주야를 정성껏 달여드리겠습니다. 설레는 중년도 있어요.
자라목
―건강원 CCTV^4
자라피를 원한다. 자라목을 내려치면 울컥 피가 솟구치는 것이어서 칼을 치켜 올린다. 거무튀튀한 목으로 꽃 대궐 세상을 꿈꾸며 머리를 밀어올릴 때 목을 내려쳐야 한다. 꽃 대궐 세상을 꿈꾸는 순간이 가장 무방비 상태잖아? 눈치도 못 채게 내려쳐야 하잖아? 목을 내놔. 목을 내놔. 네 피가 필요해. 목을 내놔. 목을 내놔. 칼바람에 섬뜩 놀란 자라가 목을 쏙 집어넣는다. 칼끝에 자라 콧등만 잘려 나간다. 놀란 자라가 목을 숨긴다. 아무리 기다려도 목이 나오지 않는다. 칼을 번쩍 들고 목이 나올 때만을 기다린다. 뒤집어도 보고, 거꾸로 들어도 보고, 툭툭 쳐보기도 하고, 왜 안 나올까? 왜 안 나올까? 꽃 대궐 세상이 보고 싶지 않느냐? 나와라, 나와라, 안 나오면 꽃 대궐 세상을 어떻게 보겠니? 코 잘린 자라야. 코도 없는 자라야. 무엇이 그토록 수치스럽더냐? 자라야, 자라야 어서 목을 내놔라.
헛소리
―건강원 CCTV^5
물 탔지요?
네? 물을 타요?
와우, 그 발상 정말 참신하네요.
그분께서 우리들 살아갈 세상을 만드실 때 참으로 힘드셨겠지요. 나비와 장미와 물푸레나무와 별 같은 것을 만들 때 각각에 맞는 신비를 넣느라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겠어요. 사람을 만드실 때는 각자에 맞는 교만과 아집을 넣고 그 만큼의 좌절과 꿈을 넣느라 얼마나 고뇌했겠어요. 나중에 보잘 것 없는 것들은 그냥 대충 물 타서 만드셨다는 생각 아니십니까? 참 대단한 발상이십니다. 나는 미천한 것이나 존귀한 것이나 오직 당신의 지극한 사랑으로 만드셨다는 고정관점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인데.
헛소리는헛소리고헛소리가아니라고헛소리해도헛소리고헛소리를
헛소리라해도헛소리고헛소리헛소리
시작메모
다 별이다
제천 깊은 산중 민박집 옥상에 누워 별을 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별이었다. 오랫동안 헤어졌다 만난 친구처럼 반갑고 기뻤다. 밤이 새도록 보고 있어도 그저 좋기만 했다. 가끔씩 밤하늘을 가르고 유성이 떨어졌다. 싸늘하게 식었던 동심이 뜨거워졌다. 장대로 감을 따듯 별을 땄다. 말랑말랑 붉게 익은 별을 땄다. 몇 개는 놓쳐 땅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떨어뜨린 별은 셔츠 앞자락으로 깨끗이 닦아 놓았다.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별이다. 반갑고, 기쁘고, 밤새도록 보고 있어도 그저 좋기만 한 별이다. 다 별이다.”
내가 요즘 나도 모르게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말이다. 뉴스를 보고 나면 더 심해진다.
이 밤 먼 하늘을 보며 돈 맥클린의 빈센트를 듣는다. starry, starry night~
**약력: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계간 아라문학 부주간. 막비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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