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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신작시/장순금/벌레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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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장순금
벌레
영혼이 지워지는 마술이 혈관 속으로 스미자
그 여자는 서서히 죽어가는 벌레가 되어
비로소 달밤이 다리 사이로 봉분처럼 떠올랐다
그 여자는
구석이나 벽을 타고 다니며 높은 구름을 사랑했다
무거운 구름의 성급한 사랑이
붉은 소나기로 쏟아져 몸 속 다녀간 발자국이 유실됐다
피붙이가 피를 거절해
흔적 없이 깨끗해진 흰 구름처럼
저 문을 나서면 벌레도 감쪽같이 잊고 싶은
다만 통속적인 눈물과 상투적인 기도에 장미꽃을 얹어
수액 똑 똑 떨어지는,
흐릿한 퍼즐들이 돌아와 제자리 찾아가는 동안
벌레는 서서히 인간으로 탈바꿈 한다
누군가 남은 안개를 왈칵 밀쳐내며 부르는 소리
벌레 님 정신이 드시는가요?
고아孤兒
어머니 돌아가시고 오십이 넘어 나는 고아가 되었다
고독한 아이가 되었다
오십도 불안해 자꾸 뒤돌아보는 어머니, 꿈에 밟혀
당신이 수의 입은 줄도 모르고
측은한 내 손에 별을 쥐어주고 활어보다 싱싱한 초록이 번창하길
온몸으로 햇살의 통로를 내주었다
봄 한 무더기 업고 와 책에 부려놓고 그림자 무늬로 어른거렸다
생각해보니
내가 아이였고 어머니 생전에도 나는 고아 같아
높은 하늘 속이 사라진 어머니보다 궁금했고
책을 읽고 또 읽어도
바다 속 꽃물결 넘실대는 용궁 길을 알 수 없어 헤맸다
아이가
아이의 문 밖을 나와 혼자 먼 길을 건너고
노을이 무르익는 무중력의 문장 속을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국경도 하늘도 더 너머 신세계에서
차편 다 끊긴 깜깜한 밤 허공이 이리 깊은 줄 아셨을까
새삼,
길이 없는 길에 서 있는 혼자가
나이 든 고아인 줄 아셨을까
**약력:198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골방은 하늘과 가깝다』, 『햇빛 비타민』 외. 동국문학상, 한국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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