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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신작시/박해림/우물이 있던 자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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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박해림
우물이 있던 자리
땅이 입을 꽉 다문 건 오래 전의 일이다
말을 하기로 작정하고 가슴을 채웠던 단서를 하나씩 묵독한 뒤
갈빗대 힘살까지 제의로 삼았다
냄새는 아무것도 안 하는 자의 몫
침묵을 공중에 내던진 후
어둠 속에서 수만 개의 꽃봉오리를 키워 손과 발을 만들었다
두레박을 끌어올릴 때마다
꽃잎과 나뭇잎과 구름이 지저귀면서 쏟아졌던 건 그 때문이다
간혹, 우주의 격한 울음을 빠져나간 구름과 빗방울이
고열의 밤을 스캔했지만
새벽녘 잠을 설친 꽃과 벌레들이
땅의 은유를 신화에 채워 넣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도둑고양이들이 담을 넘어와 꿈을 흥정하고
꽃과 벌레를 집어삼키기 전의 일이다
시를 파는 소년*
남미 콜롬비아의 소년 케빈은 시를 판다
공치는 날이 많지만 뒷골목을 누비는 발길은 파닥인다
“시 한 편에 150페소입니다. 짧은 글은 100페소, 소설 발췌 부분은 50페소에 읽어드려요.”
검정 비닐봉지 속의 책은 마을을 다 덮고도 남을 분량이지만
아직 미개봉이다
파닥이는 발바닥이 반죽처럼 부풀고
해가 중천에 잠겼을 때
발뒤꿈치를 핥던 개 한 마리가 소년을 막아선다, 컹컹
차라리 내게 시를 팔아, 내게 시를 팔라구
겹겹의 산복도로를 구름이 뛰어다니고
그늘이 엎질러지고 지구가 겅중거리고
넘어진 지구를 끌고 뛰어내리는 저 불타오르는 노을을,
이 마을의 노을 이야기를 시로 번역하면 150페소보다는 더 받을 텐데
내게 시를 팔아, 차라리 내게 시를 팔라구
그러면 더 이상 시가 검정 비닐봉지 속에서 출렁거리지 않을 거야
시 대신 계산서를 읽어주는 일은 없을 테니
개 한 마리, 소년 케빈의 그림자를 펼쳐들고 노을을 옮겨 적는다
“노을 한 편에 150페소입니다. 짧은 글은 100페소, 발췌 부분은 50페소…”
“컹 컹…”
저물도록 한 장도 넘기지 못한 산복도로 마을이 주춤주춤 흩어진다
* EBS독립영화 다큐 ‘시를 파는 소년’에서 차용.
**약력:1996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1999년 《월간문학》동시 등단.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그대, 빈집이었으면 좋겠네』, 『바닥경전』외. 동시집 『간지럼 타는 배』. 시조집 『미간』, 『저물 무렵의 詩』 외. 시평론집 『한국서정시의 깊이와 지평』. 시조평론집 『우리시대의 시조, 우리시대의 서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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