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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신작시/반연희/흐르지 않는 시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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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반연희
흐르지 않는 시간
고대 로마에서는 초승달을 보고 뿔피리를 불어 시간을 알리곤 했다 8월의 사막에서 초승달이 뜨기 시작하면 신의 소리를 들은 아라비아인들은 낮과 밤의 두 얼굴로 시간을 멈췄다 깨어난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이천 년 동안 강줄기처럼 이어졌다 벽돌을 지고 나르던 이들의 몸은 쌓아올린 벽돌만큼 자주 무너져 내렸다 생명이 깃들지 않은 것들에게 시간은 길이나 높이로 표현 된다
화장술은 육체적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기법이다 시간이 멈춘 이집트의 무덤에는 눈화장을 짙게 한 남녀가 벽 위에 서 있다 내가 화장을 지우거나 꿈에서 깨어날 때 시간은 신발을 신는다
큰 질량 근처에서 시간은 늦게 간다 당신이란 행성도 나와 다른 시간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 너와 나의 무거운 침묵 속에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흐르지 않는 시간에 갇힌 이들이 있다 그들은 멈춘 시간 속에서 꽃이 되었다 비 내리는 거리에 흰 꽃잎들이 무겁게 떨어져 날린다 도끼를 든 누군가가 꽃나무를 내리찍고 있다
검은 문장
몸을 가진 것들에겐 모두 욕망이 있다
개미들이 모였다 흩어진다
검은 문장을 만들며 몸집 보다 큰 잠자리를 끌고 간다
개미의 행간을 따라 나는 무엇을 물어 나르나
검은 문장에 걸려든 건 잠자리만이 아니어서
나는 부스러기 생각을 물고 검은 문장을 쫓아간다
하나의 검은 문장이 네 장의 날개로 갈라지고
내 의식도 몇 개의 가닥으로 흘러간다
내 스스로 날아오르려 애 쓴 적이 있었던가
살아 움직이는 문장들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욕망의 해체작업은 소리 없이 진행된다
흙이 기록하고 바람이 지우는
**약력:2011년 《다층》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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