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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신작시/김정경/모란의 남쪽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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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정경
모란의 남쪽
사내가 뒤집어쓴 담요에 모란이 만발했다
남부시장 채소전과 과일전 사이 밑동만 남은 버드나무에 기대
시루 속 콩나물같이 허리 세우고 잠들었던 사내
시장 여인들이 끼니때마다 밥과 반찬 덜어 그의 모란꽃
옆에 놓아둔다 밑 빠진 독에서 술을 물처럼 마시고 말라가던 사내는
붉은 눈으로 꽃잎 열고 나와 식사를 한다
검고 긴 목의 사내가 모이 쪼는 비둘기처럼
빈 그릇 두드리면 장바닥에 엉덩이 바짝 붙이고 앉은 여인들
떠밀려나지 않으려 발끝에 힘을 준다
봄볕 살가운 남쪽 찾아 나섰건만
앉고 보면 북쪽이었다고
헤프게 벌어진 가랑이 안에 세발나물 고들빼기 조기 바지락
수북이 쌓아 놓고 목청 다듬는다
싸요, 사요, 살은 놈이야, 실한 거라니까, 다가오는 발자국 향해
물가 나뭇가지처럼 자라는 여인들의 손
깨끗이 비운 사내의 밥그릇에 소주를 부어준다
신 김칫국물 떠먹인다 그의 입안에 꽃이 벙그는 동안
돌아가며 잔 비운다
파장 시간 지났는데 누가 흘리고 갔나
시장 여인들이 옷에 묻은 물기와 흙 털어내면
사내도 문 닫을 채비를 한다
몸 여기저기 붙여놓고 잊어버린 파스처럼
끝이 살짝 말린 채 부푸는 모란
남쪽 끝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사내의 방에 주렁주렁
고치 같은 꽃이 열린다
파세지아타*
하나둘 피어나는 불빛 등 뒤에 거느리고 옛집 가는 길. 한 집 건너 한 집이 점집이던 중노송동 417-15번지. 전자랜드 21 보살, 남노갈비 보살, 노송슈퍼 보살, 간판 이름 바꿔 부르며 걷던 언덕길. 저녁이면 아버지, 아버지, 엎드려서 울다가 매일 아침 주님 아버지의 권능으로 죽어가는 자 병든 자 일으켜 세우던 이웃집 울음소리. 어디로 갔을까.
밤마다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온 이빨에 뒤꿈치 물리는 꿈을 꾸어도 날 밝으면 친구에게 혓바닥 보이며 학교로 달려가는 골목의 아이들. 돌아올 때는 오래 떠돌다 가까스로 온 사람처럼 골목 끝에 불쑥 나타나는 몇 년 치 훌쩍 늙은 얼굴. 이사 나올 때 신발 한 짝 속에 묻어둔 고구마 한 알은 뿌리 내렸을까.
언젠가부터 마지막 문장으로 가는 길을 쉽게 잃어버리는 나는, 물 위에 신발 한 짝 띄워 보내고 뒤따르며 귀가를 늦추는 아이. 모닥불 피운 듯 강가에 환한 빛 일구어 놓던 강가 고향마을 벚나무들, 강물에 씻은 별들을 풍등처럼 날려 보내고 있을까.
* 파세지아타 : 해 질 무렵, 로마 사람들이 마을을 천천히 걷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산책.
**약력: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주문화방송 라디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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