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62호/신작시/이승예/The라면·19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
이승예
The라면·19
―습관1
*
자꾸만 획득되는 습관을 잊고 싶었다
이 별에는
스스로 온 사람들이 납월매臘月梅*를 피우려고 애쓰며 산다
집을 나선다
별의 꼭지점 같은 주차장을 들어서다가 두무더기 똥을 밟았다
인연을 만나서도 섞이지 못하고 밟혀서야
연인이 된 똥의 온전한 모습은 분탕칠이다
자꾸만 획득되는 습관을 잊고 싶었다
한 오백 년만에 하는 외출인 것 같다
낯설디 낯선 기분이 골똘해진다
무엇을 두고 나왔을까
우울 콤플렉스 짜증 짓눌린 욕망
생각은 늘 전면적이다
눈에 덮힌 문학경기장을 지나간다
포르투칼과의 4강전을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함성도
그날의 승리도 좀처럼 녹지 않을 만년설 속 고요에 들었다
안경을 굴리고 가다보니 동공 같은 지구의 모서리
카페on이다
아메리카no 냄새가 난다
*
작은 소리로 주문을 외운다
뜨거운 피와 흡사한 검은 아메리카노여
푸석거리는 살점의 베이글 한 조각이여
시집을 펼치며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에 눈을 맞춘다 피와 살이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를 만나
백만 한 번째 the라면이 되는 순간
* 납월매臘月梅 : 음력 섣달 눈 속에서 피는 매화.
The라면·19
―습관2
*
문자가 온다
시집에는 없던 그녀가
시집 어머니의 꽃상여 사진을 보내온다
감정의 관점이 쉽게 해독되는 사진이다
이 별에는
이 별을 이별한 사람들이 눈 별똥별이 휙휙 지나가지
나도 지금 카페on이라는 꽃상여를 타고
아메리카no를 마시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손님 몇이 왁자하게 둘러앉은 테이블 뒤쪽 벽에서
줄곧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밀의 생애가 그리워
납월매의 계절에도 밀밭에 박제된 것일까
날카로운 경적에 깨졌던 햇살이 커피를 두어 번 홀짝 거린다
루즈 칠한 여자의 입술이 창문 속에서 흘러내리고
누군가 그녀의 시간을 자꾸 훔치고 있다
집을 나설 때보다 추운 골목을 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습관은 이별을 서두르는 길목
도둑맞은 시간의 끄트머리 그곳에 핀
납월매臘月梅를 보았다
또 하나의 습관이 획득되는 순간이다
**약력:2015년 《발견》으로 등단. 《발견》 편집장.
- 이전글62호/신인상/박효숙/물봉선화 외 4편/소감/심사평 16.12.31
- 다음글62호/신작시/박광영/평행선 외 1편 16.12.3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