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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신인상/박영옥/빈자리 외 4편/소감/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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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 신인상
박영옥
빈자리
칸나꽃대 불쑥 올라오더니
꽃잎 끝이 붉게 열렸다
이슬 마른자리 무당노린재더듬이가
꽃잎과 꽃잎 사이 들락날락 더듬다가 날아갔다
개미 한 마리 이 꽃잎 저 꽃잎 옮겨 다니다가 내려갔다
열점박이무당벌레가 앉았다가 날아가고
붉은점모시나비도 날아갔다
여름좀잠자리가 날아가고
참꽃무지도 날아갔다
달팽이가 칸나 꽃대를 기어올랐다
덧칠 하지 않아도 붉어진 꽃잎
꽃잎이 지던 날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잎 떨어진 꽃자리는 가볍고
가벼워진 꽃대 위엔 바람이 머문다
동백꽃이 진다
새매기 눈이 내리자 송화초등학교 울타리에 동백꽃이 핀다
마을 어귀 함석집 지붕을 넘어 온 바람 동백나무 울타리를 지나간다
바람 지나온 자리 돌아보지 말자고 나무 위에서 툭툭 떨어지는 꽃
이른 봄날 입김으로 녹이던 꽃잎이 길 위에서 붉다
꽃잎을 손바닥 위에 올리면 붉은 3월의 눈이 녹는다
길 가로, 길 밖으로, 길 안으로, 꽃을 차며 걷는다
밟히고 부서진 노란 꽃술 위에서도 눈이 녹는다
나비 되어 날다
뇌성마비 아이의 배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겨우 들어 올리
는 목의 반동으로 얼굴은 일그러지고 하늘로 향한 손바닥이 반쯤 비
틀려 있는 아이는 아홉 살, 한여름 땡볕이 가장 먼 외출 장소인 마루
끝으로 불러낸다. 누이 대신 아이 곁에 서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
다. 마당 한 쪽 봉숭아 꽃잎 위로 나비들이 한가롭다. 미루나무의 매
미가 한 소큼 울음을 풀어낸 후에야 누이는 재빠르게 마당을 가로질
러 돌아온다.
아이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는 내가 두려워했던 모습, 나는 오랫
동안 그 집에 가지 못했다. 뇌성마비 동생 돌보며 평생 살겠다던 누
이는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시집가고, 아이는 홀아버지 눈물 받아먹
고 자라더니 화창한 봄날 아이 손잡고 먼 여행 가겠노라는 아버지
유서 속으로 훨훨 나비 되어 날아갔다. 하늘은 높고 바람이 불고 내
년에도 봉숭아꽃이 필 것을 누이는 안다고!
나비를 볼 때마다 코끝의 숨소리가 고르지 못하다.
바람이 분다
빗물이 염전에 가득 담겨있고
바다는 뚝방 너머 갯벌에서 멀어진다
여자는 해마다 바다가 사라지는 갈대밭에서 온다
흔들리는 갈대의 말이 귓바퀴에 머물러 울고
어디서 돌아서야 기도가 이루어지는 걸까
아직 갯벌 지키는 칠면초의 허리가 먼 바다 쪽으로 꺾이고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이 붉다
아이를 달래던 노래가 바람에 흘러가듯 울고 있고
해걸음에 집나간 엄마가 아직도 젊은 엄마인 채 갈대숲을 돌아본다
포구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여자가 나온 갈대숲 속에서는
잡힐 듯 고요가 서걱거린다 가을이 고집을 부리는 중이다
낮은 숨소리가 갯벌 속으로 들락거리지만 멈춘 적 없다
사랑을 알아버린 눈물은 바람을 따라 다니는 홀씨가 되고
시도 때도 없이 몸 속 어딘가에 숨곤한다
갈대꽃 분분이 흩날리면서 그녀가 이운다
억새꽃 억,
여자아이 둘 나란히 억새꽃 핀 길을 갑니다
한 아이가 한 아이의 손을 잡습니다
가을볕이 억새꽃에서 반짝이고 억새는 휘어져 아이들을 숨깁니다
아이들 소근대는 소리가 억새숲으로 번져갑니다
그리고 바람이 억새꽃 속에서 흔들립니다
아직 그 길에 앉아 있는데 자꾸만 눈이 감깁니다
<소감>
멀어지는 목소리 조심스럽게 따라갈 것
다가서면 그만큼 멀어지는 목소리,
언제부터인지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 왔지만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해서 다가서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앞으로도 조심스럽게 그 목소리를 따라 갈 것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의 글을 격려해 주시는 뜻으로 알고
시인이라는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오랜 시간 희노애락을 함께해 온 어울동인과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해주신 J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박영옥
<심사평>
이미지로 빚어낸 단단한 시적 인식
시가 서정적 장르이며 고백적 양식이라는 정의는 사건이 중심에 놓이는 서사시와 행위로 보여주어야 하는 극시(드라마)라는 장르와의 변별성을 염두에 둔 것일 뿐이다. 어쨌든 시는 직접적 발화보다는 간접적으로 말하는 방식을 취하고, 이를 위해 확대, 심화한 수법이 ‘비유’라 할 수 있다. 제대로 만들어진 비유는 이미지, 특히 시각적 이미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 읽는 이를 깊은 공감의 장場으로 이끌게 된다.
앞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이번에 정식으로 등단하게 된 박용옥 시인은 뛰어난 서정적 자질을 갈고 닦아왔음이 분명하다. 게재하게 된 다섯 편의 작품 모두에서 강렬하면서도 지나치지 않은 뛰어난 이미지를 한결같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칸나꽃대 불쑥 올라오더니/꽃잎 끝이 붉게 열렸다/이슬 마른자리 무당노린재더듬이가/꽃잎과 꽃잎 사이 들락날락 더듬다가 날아갔다”(「빈자리」)는 이미지는 ‘정중동靜中動’의 긴장까지 느껴질 정도로 빼어나다. 하지만 더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뇌성마비)아이/나비’(「나비되어 날다」)의 대조에서 드러나는(비극적 사실을 사실 이상으로 전환轉換하는) 시인의 인식적 탄탄함이다. 이 수고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시대정신을 담는 서정시인이 될 수 있으리라 앞선 기대를 싣는다./장종권, 백인덕(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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