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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책 크리틱/이현호/눈물을 재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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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260회 작성일 16-12-31 18:30

본문

책 크리틱

이현호

 

눈물을 재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

― 소율 시집 『내 얼굴 위에 붉은 알러지』와 송정현 시집 『꽃잎을 번역하다』

 

 

1.
   바다는 함부로 건널 수 없는 철옹성이다 쉽게 접근해서는 안 되는 절대 금지구역,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먼 곳 혹시 내가 저 푸른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아득해하던 어릴 적 그때
 
   바다로 간 사람들 더러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다는 이튿날 여전히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띄웠다 어쩌다 슬픔이 장막처럼 덮여오고 빗줄기 간간이 사납게 울었다
                                                                                                                                                                                           ―「바다로 가는 길목」 부분

   소율 시인에게 이 세계는 “망망한 바다”와 같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은 “함부로 건널 수 없는”, “쉽게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언제 한 번 삶이 쉬었던 적이 있는가? 매일 아침 신문을 펼치면 현실에 좌절한 사람들, 삶을 비관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우리 주변에는 ‘바다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이들이 있지만 그들의 ‘슬픔’에 아랑곳없이 “바다는 이튿날 여전히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띄”운다. 「벚꽃 축제」라는 시에 ‘팽목항’이 나와서인지 “바다로 간 사람들 더러 돌아오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세월호의 영령들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그만한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 철옹성 같은 현실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여러 ‘슬픔’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슬픔이 피할 길 없이 “장막처럼 덮여오고” 천지불인天地不仁의 빗줄기가 “사납게 울어”댈지라도 산 자들은 “여전히” 살아가야 하고 그러면서 삶은 지속된다. 소율 시인의 시 세계에서 이 슬픔은 생生이 내재하고 있는 불가결한 요소다. 물론 슬픔과의 동거를 두고 슬픔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거나 그것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슬픔을 겪으며 생의 무정함을 깨달은 자의 생활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밤마다 마른 울음 삼켜야 했다 한밤중 시계소리만 긴 밤을 울어대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선명하게 새겨지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곰팡이

꽃 도도하게 솟아올랐다 어둠 속에서 낮게 포복해있던 상흔들 물기 젖은

바람이 불어올 때쯤이면 꽃송이 불콰하게 피워 올렸다



…(중략)…
 


자목련이 놀라 화들짝 꽃망울을 터뜨려댄다
훌쩍 가벼워진 어깨를 펴며
슬픔의 덩어리들을 뭉클뭉클 쏟아 내놓고 있다



눈시울을 붉히며 
봄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이 봄에 자목련」 부분



   우리는 곧잘 슬픔에 빠진 사람을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로 위로하지만 정말로 시간이 하는 일은 슬픔의 치유가 아니다. 시간은 슬픔을 우리 의식의 영역에서 조금씩 흐리게 할 따름이다. 그렇게 희미해지는 슬픔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은폐되어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중략)… 그 안에서 뿌리를 키워간다”(「파도」). 매년 “선명하게 새겨지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슬픔은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러다 “물기 젖은 바람이 불어”오는 소소하고 일상적인 사건을 계기로 불현듯 되돌아온다. 이렇게 귀환한 슬픔은 강하게 누를수록 더 힘차게 치솟는 용수철같이 억압의 세기만큼 더 큰 폭발력을 발휘한다. 인용 시는 봄날 화려하게 피어나는 자목련을 통해 그러한 슬픔의 작동 방식을 잘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 연에서 우리는 그 슬픔을 대하는 시인의 자세를 알 수 있다. 뭇 생명들이 “꽃망울을 터뜨려”대는 ‘이 봄’을 우리는 “밤마다 마른 울음 삼켜”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특기할 것은 『내 얼굴 위에 붉은 알러지』에는 ‘봄이면 가끔 통증’이라는 제목의 부部도 있거니와 「이 봄에 자목련」처럼 ‘봄-꽃(나무)-울음(슬픔)’이 조응하는 시편들이 여럿 있다는 점이다. 이 시들은 엇비슷한 서사 구조를 보이는데, 한겨울의 시련을 견디고 피어난 봄날의 꽃들 앞에서 시적 화자는 격렬한 슬픔을 느낀다. “빛이 밝을수록 그늘도 깊다.”는 말처럼 포근하고 기운생동氣韻生動 한 봄날은 도리어 외롭고 슬펐던 날들을 떠올리게 하고, 생명력의 상징인 개화開花는 죽음을 상기시킨다. 시집에 유독 ‘낙화’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글의 말미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푸른 물결 어질대는 바다 한가운데로/한순간에 몸 날리는 새빨간 동백”(「사월 오동도」)의 투신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저 ‘망망한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인 까닭이다. 이처럼 시인은 봄과 꽃의 일반적인 상징에 기대지 않고 그 이면을 살핌으로써 거기서 어떤 진실을 궁리하고 있다.
   한편 소율 시인이 내면화하는 슬픔을 따라 들어가 그 진면목을 파악하려 한다면 송정현 시인의 슬픔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다는 점에서 좀 더 당차다. 송정현 시인도 그 슬픔을 감추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것과 적극적으로 대면한다. 시인이 ‘자서’에서 밝힌 대로 『꽃잎을 번역하다』는 “방대하고 아름다운 슬픔의 여정이 기록”된 시집인 셈이다.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 보라’
갈증이 태양을 따라 아침을 깨우고
해갈하지 못한 어제는
아침 자율학습시간에 적히고
하염없이 오늘을 위해 일어섭니다
오늘은 어제의 복습,
내일은 모레의 예습,
어제와 오늘, 내일이
반복적으로 갈증을 학습하지만
늘 역부족인 채
잠을 머리에 이고 꼬박 밤을 세웁니다
누군, 생의 마지막에 물꼬를 찾았다고 유언하지만
그건 체험하기 힘든 전설일 뿐,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 것들을 진실하게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
전설이 엮인 책을 읽다
오아시스가 있는 지점을 가늠하는 눈을
번쩍 띄게 하는 문맥,
 속으로 우는 눈물이 고여 샘이 되다
                                                                                                   ―「사막에서 낙타가 우는 법」 전문



   인용 시의 정황은 앞서 살펴본 소율 시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다로 간 사람들이 돌아오건 말건 이튿날이면 동쪽에서 해는 떠오르듯이’(「바다로 가는 길목」) 해갈하지 못한 어제는 오늘을 위해 일어서고 그런 오늘이 내일도 모레도 반복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마라”는 시의 부제로 미루어 보건대 이때의 ‘갈증’은 우리가 현실에서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삶을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한 무엇에 대한 희구일 것이다. 그 바람들은 ‘망망한 바다’와 다를 바 없는 ‘사막’에서 우리가 쉽사리 이룰 수 없는 것임은 자명하다. 이 갈증은 “생의 마지막”에나 간신히 해갈될 수 있는 것인데 그마저도 아무나 체험할 수 없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시인은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 볼 것을 제안한다. 일차적으로 이 말은 갈증을 유발하는 원인인 태양, 즉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기는 것들을 피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는 의미일 테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이는 “모든 것을 진실하게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벌어지는 일은 시력의 상실이다. 그전까지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잃을 때 “오아시스가 있는 지점을 가늠하는 눈”이 번쩍 뜨인다. 이 새로운 눈으로써 우리는 갈증을 풀 수 있는 ‘물꼬’를 찾을 수 있다. 시의 마지막 연은 그것이 우리 안에 있음을 밝힌다. 소율 시인도 「이 봄에 자목련」의 마지막 연에 썼듯이 “눈시울을 붉히며/봄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며, “속으로 우는 눈물이 고여 샘이” 된다.



2.

   강아지처럼 벽을 파고 있어요. 바깥은 온통 물음표지요. 금지된 곳은 지
척이라도 가장 먼 곳이 되요. 입구를 찾지 못한 담 너머 금목서 눈치도 없
이 내 코를 자극하고, 열리지 않아 슬픈 하루를 종일 서성거려요. 아침이

오지 않는 밤은 언제쯤 끝이 날까요. 저 금목서 향이 그대와의 통로가 될

수 있을까요. 바람이 내려놓은 것들이 풍경이 되어 걸려요. 울음인지 웃

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풍경, 흔들며 빗소리가 가까워져요. 뚝 뚝 뚝, 지

붕에 눈물 떨어지는 소리 들리면, 누가 문 좀 열어줄래요?
                                                                                                                                   ―「외인 출입 허용」 전문



   송정현 시인의 슬픔은 소율 시인에 비해 조금 더 ‘관계’에 주목한다. 인용 시에서 화자의 “바깥”인 “그대”는 “온통 물음표”인 미지의 대상이다. 시의 화자는 그대를 알지 못함으로 그대는 “지척이라도 가장 먼 곳”에 있는 존재가 된다. 물론 이때의 “바깥”은 소통을 염원하는 특정한 인물로도 소율 시인의 ‘바다’와 같은 냉정한 현실로도 읽을 수 있다. 중요한 건 화자와 그 사이의 소통이 단절되어 있고, 화자는 그와의 연결을 간절히 바란다는 점이다. 화자와 그의 관계가 복원 혹은 새로 개통되지 않는 한 “아침이 오지 않는 밤”과 다르지 않은 “슬픈 하루”는 끝나지 않는다. “강아지처럼 벽을 파고” 있는 화자의 작업이 먼저 성공하든 그전에 타인이 도래하든 과정은 별 의미가 없다. 빗소리가 “눈물 떨어지는 소리”로 들릴 만큼 슬픔이 깊어서다. 하여 화자는 “누가 문 좀 열어줄래요?”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부끄럽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본능적으로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과는 반대다. 다른 시편들에서도 송정현 시인은 결코 슬픔을 부정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다. “진짜 강자가 된다는 건/동굴에 감쳐둔 덜 자란 눈을 바깥 햇살에 당당히 드러내는 일이다”(「갈애渴愛」)라는 선언처럼 오히려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숨김없이 토로하는 일이야말로 그것을 타개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 보라”와 같은 맥락이다.



금오봉이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지웠다
쪽빛과 하얀빛의 교묘한 그러데이션
안과 밖의 띠를 만들지 않는
섀도 화장법을 배울 무렵부터
속과 겉의 경계를 허무는 연습이 시작됐지만
아직도 미완성인 뫼비우스의 띠
 
…(중략)…
 
아가야, 잘 자란 어른이 되기 위해
가끔은 중앙선이 없는 하늘 길로 향일암에 오를 일이다
기다리지 않으면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길에서   
모르는 사람과 마주칠 때 잠시 바위틈 벽에 기대어 서볼 일이다
지우고 허물어 경계를 지운다는 그 말에
너도 나도 함께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다
                                                                                                                          ―「경계라는 말」 부분



   인용 시에서 송정현 시인은 ‘슬픔’과 ‘관계’에 대하여 보다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외인 출입 허용」이 안과 밖, 나와 그대를 구분한 채 그 사이의 벽을 부수는 데 천착하는 반면 이 시는 그것 자체를 무화無化시키는 일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안과 밖의 띠를 만들지 않는”다면 「외인 출입 허용」의 ‘벽’과 ‘담’은 애초에 생길 수가 없다. 나와 그대가 “쪽빛과 하얀빛의 교묘한 그러데이션”처럼 섞여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인위적으로 구분하겠는가. 구분이 없어지는 순간 나와 타자의 존재 자체가 ‘통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또한 “속과 겉의 경계를 허”물어버림으로써 「사막에서 낙타가 우는 법」의 ‘오아시스’는 나와 세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시인은 “지우고 허물어 경계를 지운다”는 행위를 통해 이제는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 보”던 것에서 더 나아가 “중앙선이 없는 하늘 길로 향일암에” 올라버린다―향일암의 한자가 向日庵이라는 사실이 그저 공교롭기만 한 건 아닐 것이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지워진 곳에서 “너도 나도 함께 마음을 주고받는” 이 소통으로 하여 모든 ‘금지’는 해제되고, “열리지 않아 슬픈 하루”(「외인 출입 허용」)는 종식된다.




어느 날, 사랑이 그렇게 내게로 왔다
무한대의 바다 초원 강물처럼
쪽빛하늘 그리움처럼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와락 달려드는 호숫가의 밤안개처럼

                                                                                                    ―「바이칼」 전문



   소율 시인 역시 엄혹한 현실과 천지불인의 세계를 건너기 위한 해법으로 경계의 무화를 제시한다. 인용 시는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다가오는 “사랑”의 모습을 고운 이미저리로 잘 보여준다. 그중 ‘안개’는 『내 얼굴 위에 붉은 알러지』에 자주 등장하는 시어인데, 이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경계를 지움으로써 현실의 상처를 봉합하고 세계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새벽이면 안개가 성큼성큼 걸어나와 사람들을 지운다/길을 지운다/너와 나의 흔적들을 지운다/기억을/상처를/어제를”(「안개 혹은 기억의 집」)이나 “곳곳에서 불균형이 균형을 맞춰가는 새벽안개 속/비눗방울처럼 퐁, 퐁, 가벼워지는/너와 나의 길”(「길」)에서처럼 말이다. 유의할 것은 이 안개가 슬픔의 상처를 흐림으로써 이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전술했듯이 희미해진 슬픔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더 큰 어둠으로 자라난다. 안개가 진정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까닭은 나와 너의 경계를 지움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슬픔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하기 때문이다. “모두 잠든 밤 슬픔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짓눌려지는 무게에 할 말을 잃”을지라도 또 그 슬픔을 “아무도 모른다”(「비가 내린다」)는 비애가 엄습할지라도, 나아가 “당신과 나의 사랑은/땅속에 끝끝내 뿌리내리지 못하는 물풀들처럼/흔들리다 흔들거리다/한순간 휩쓸려가도”(「물 위에 집을 짓다」), 우리는 끝끝내 “그를 만나 포옹을” 하고 “벌거벗은 그의 상처 어루만지며 뜨겁게 눈물 함께”(「자작나무 숲에 들다」) 흘릴 수밖에 없다. ‘검푸른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지는 동백꽃처럼’(「봄이면 가끔 통증」) 서로에게 끝없이 투신할 뿐이다. 그 이유를 소율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안은 항상 타인에게서 온다”(「아침 창가」)라고.



3.
   우리가 슬픔을 딛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인 ‘사랑’은 ‘눈물’과 ‘상처’ 위에 피어난다. 좋은 일만을 함께하는 사이를 두고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송정현 시인은 이를 “사랑이 시작되는 자리에는/잘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사랑무」)라고 표현한다. “나를 준다는 일이/가슴의 심지 한 올 뽑아 내주는 것이란 걸” 알 때 “눈물 같은 것이 비쳤지만/잘려 나간 상처, 잊은 듯/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이 자”(「사랑무」)라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안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모든 살아있는 자의 슬픈 허기’(「철새, 그 어쩔 수 없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자신을 위하는 길이다. 이를 알고 있는 두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타인의 슬픔에 동참’하는 일을 노래한다. 이런 의지의 표명이야말로 요즘 같은 시대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게 아닐까.
   두 권의 시집을 읽는 내내 하나의 단어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바로 ‘물기’다. 첫인상으로서 제목의 ‘붉은 알러지’와 ‘꽃잎’이라는 말이 주는 선명한 색감과는 달리 ‘축축한 물의 기운’이 두 시집의 주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 길지 않은 지면에 두 권의 시집을 다루다 보니 비슷한 점을 중심으로 글을 쓰게 되었지만, 아주 당연하게도 두 시집은 각자의 개성을 갖추고 있다.―위에서 인용한 몇 편의 시만 살펴봐도 바다, 빗줄기, 울음, 물기, 물결, 오아시스, 눈물, 샘, 비, 강물, 호숫가, 안개, 물풀… 등등 다양한 물의 이미지를 만날 수 있다. 두 시인은 이 ‘물기’를 다채롭게 변주하며 각자의 시 세계를 꾸려나가는데, 거기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물’은 수재水災를 일으켜 우리 생활을 송두리째 파괴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다. 두 시인이 주목하는 ‘슬픔’도 물의 이러한 이중성을 닮았다. 슬픔은 말 그대로 슬픈 것이지만 서로의 슬픔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 두 시집의 긴장감은 바로 이 슬픔의 양면이 갈등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며, 시집의 전언은 그 충돌의 접점에 선 시인들이 이쪽과 저쪽을 함께 내어다보는 시선 속에 있다. 송정현 시인의 「눈물의 재구성」은 이런 두 시인의 공통된 시적 지향을 잘 보여준다. 이 시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하산길에 만난
까치 한 쌍이 앞질러 간다
한 마리가 날아오르면
다른 한 마리가 짝을 좇아 뒤따르고
다시 다른 나무로 구르면
연신 좇아가 간격을 좁힌다
까치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흐른다
눈물방울처럼



눈물은 서로를 향해 흐르는 서정시
누군가를 맑게 껴안는 고요
                                                                                                  ―「눈물의 재구성」 부분








**약력: 2007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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