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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미니서사/김혜정/여우난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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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서사
김혜정
여우난 골
어제 나는 나무 하러 갔다가 은빛 여우 한 마리를 잡았다. 꿩을 잡으려고 놓은 덫에 여우가 걸려 있었다. 보통 여우가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나는 여우를 내 방에 들이고 문밖에서 지켜보았다. 백 살은 족히 먹은 듯했는데 자정이 지나자 과연 여자로 변신했다. 나는 밭일을 하러 가기 전에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녀는 잠꾸러기 미인이라는 듯이 하루 종일 잤다. 그건 내가 중간에 몇 번 확인한 사실이었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 방 앞으로 갔다. 등불을 켜지 않은 방은 어두웠다. 나는 살금살금 방문을 열었다.
“어서 들어와요. 하루 종일 당신을 기다렸어요.”
그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고운 자태에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과 그녀가 내뿜는 숨을 오래도록 음미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온 순간인가. 나는 이 순간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났다. 나는 그새 혹시 나 말고 다른 남자가 숨어들었는지 의심이 되었다. 여우에 관한 옛 이야기가 떠올랐다. 남자를 여럿 품고 잔다는.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야말로 진정 순결하고 아름다웠다. 잠시나마 그녀를 의심한 것이 부끄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녀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문밖에 어떤 그림자가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우람하고 건장한 남자였다. 나는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서 나에게 도끼날을 들이대는 걸 상상했다. 오싹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일어서고 피가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녀를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는 그녀를 잃느니 차라리 그녀와 함께 죽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녀의 숨이 잦아들었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얼른 그녀의 목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문밖에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나는 쾌재를 울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몸은 싸늘했다. 나는 그녀에게 변명했다.
“밖에 늑대 한 마리가 있어서 말이오.”
그러나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칼을 다시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마당에 서 있던 나무 한 그루가 나를 비웃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녀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체취만 남아 있는 방에 나는 주저앉았다. 그녀의 옷을 벗겼다. 감미로운 체취가 밴 옷을 감싼 채 자리에 누웠다.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이토록 행복한 밤은 다시 오지 않을 거였다.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일까.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가죽이 벗겨진 여우 한 마리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방을 나왔다. 얼마 가지 않아서 마을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만득이가 여우를 잡았다며?”
“백 년 먹은 여우라던데.”
나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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