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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단편소설/장순/기억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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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17회 작성일 16-12-3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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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장순





기억의 조각




   시력을 잃었다.
   적어도 지난밤까지 시력은 살아 있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시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그 모든 것은 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사물의 형체들. 또렷하지 않은 망각의 늪. 가까이 다가가야만 느껴지는 사물의 정체성이 싫다. 공간과 공간 사이가 뿌옇다. 마치 김이 서린 것처럼. 시계의 초침이 달리는 순간, 분간할 수 없는 기억의 조각들이 흩어졌다 천천히 모이기 시작한다.
   어제,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꼭 가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침부터 막걸리 한잔에 거나하게 취해 주말을 만끽하려던 나의 희망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작은할머니의 팔순잔치니 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거리가 먼 것도 아니었다.
직업을 몰수당한 백수. 그것이 내 직업 아닌 직업이다. 그러다 보니 친척들을 만나는 것이 그리 달가운 편이 아니었다. 재취업은 물론이고 이렇다 할 노력 없이 온종일 캔버스를 마주 보고 앉아서 그림 같지도 않은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못마땅한 시선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또 사진 찍으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직업은 될 수 없었다. 좀 더 안정적인 것이 필요했고 나는 직업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회사의 부도와 함께 나는 직업을 잃었다.
   그림 속, 사진 속 풍경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 숨 막힐 것 같은 자책감이 나를 채근한다. 시력을 찾아야 한다. 흩어진 기억의 퍼즐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제아무리 흩어진 망각의 늪이라도 돌이켜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호텔 피로연장에서 어른들이 주는 술을 가리지 않고 마셨다. 그것도 모자라 때론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제멋대로 흘렀고, 시간은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술과의 전쟁은 벌써 선포되어 있었다.
   피로연이 끝나고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큰 당숙의 손에 이끌려 또다시 술과의 전쟁을 한바탕 벌였다.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모른다. 단지 그곳,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당숙과 어떻게 헤어졌는지 모른다. 시간은 멈출 기미 없이 밤을 향해 내달렸고 나는 어느새 술김에 작은할머니 댁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족과 뒤풀이를 하고 귀가하는 작은할머니를 만났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작은 당숙과 마주했다. 우린 의기투합하여 근처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좋았다.
   막걸리, 소주, 맥주, 호프. 그 모두는 내가 대적해야 할 적이라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다. 방심하던 찰라 나는 기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낯선 누군가가 앞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한참 후에야 나는 그가 작은 당숙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기억이 끊겼다가 다시 되돌아온 것은 피시방에서였다. 어떻게 피시방까지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제아무리 기억해 내려 해도 온라인게임의 비밀번호가 떠오르지 않았다. 피시방에서 나온 것도 같다. 집으로 되돌아온 것도 같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훌훌 벗었다는 것이다.
   팬티 차림의 나. 그리고 11월, 가을을 지우기 위해 피어오르는 냉기. 나는 2층 현관 밖에 누워버렸다. 견딜만했다. 모두가 술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시력을 잃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안경을 찾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어딘가 허전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안경이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설마 했다. 집안 어딘가에 안경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주섬주섬 어제 입었던 옷을 챙겼지만, 안경은 찾을 길이 없었다.
   순간의 그 아찔함, 망각의 수렁 속으로 한도 끝도 없이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덜컥, 나는 어쩌면 시간의 형체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갇혀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에 내 시력을, 기억을 되찾아 줄 안경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안경은 내가 제일 아끼는 것이며 고작해야 10번 남짓 썼을까 말까 한 안경이었다. 더군다나 여자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안경이기에 나에게는 특별한 것이었다. 여분의 안경이 두 개가 더 있었지만 나는 오기가 발동했다. 꼭 안경을 찾겠다는 각오. 안경을 찾으면 몰수당했던 어제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온전하지 않은 조각들 사이에서 바동거리는 중이었다. 연연할수록 까마득해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더는 그 냄새나고 칙칙한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희미해진 눈동자로, 술독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대충 모자를 쓰고 피시방으로 향했다. 피시방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다. 저 아래는 분명 내 안경과 내 기억의 조각 하나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단에서 만난 피시방 주인은 어제 왔을 때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나갈 때도 역시 안경을 쓰고 나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안경은 집안 어딘가에서 나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하다. 다행이었다. 나는 안도하며 집으로 되돌아 왔다.
   안경 찾기가 시작됐다. 안경 찾기는 곧 기억 찾기다. 그 반대편 선상에 놓인 것은 빌어먹을 블랙아웃이다.
내 눈에서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내 안경. 나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의미. 그렇지만 그 어디에서도 안경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나는 점점 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흐릿한 시간의 잔영들이 말한다. 그래 꼭꼭 숨어라. 내 기억은 다시 내가 소유하게 될 테니까. 나는 어제 다녔던 술집들을 생각해 냈다. 먼저 집 앞에 있는 추어탕 집으로 향했다. 주인 여자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갈 때 안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까지도. 다음은 호프집으로 향했다.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소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지난밤에 혹시 안경을 두고 가지 않았나요?”
    “아니요. 안경을 두고 갔으면 제가 챙겨 놓지요.”
   여자가 서랍장을 뒤지는 시늉을 해 보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 마지막 희망마저도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걸어오면서 집 어딘가에 분명 있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안경이 감쪽같이 사라질 리 없었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잔영 사이로 나는 참혹한 패배자가 되어 걷고 있었다. 술과의 전쟁에서 나는 완패한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패배라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결코.
   술로 망가진 몸과 마음은 숙취를 동반한다. 그 숙취를 최단시간에 풀기 위해서 나는 종종 해장술을 선택하기도 한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나는 다시 술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호랑이 굴로 다시 뛰어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술은 안경을 찾을 소스였다.
   맥주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얼굴에는 비범함이 가득했다. 잔에 술을 따랐다. 어디 버텨보라지. 나를 이겨내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나의 고집에 불과했다. 술기운이 올라왔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키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다.
   이대로 지고 싶지는 않다. 나는 본격적으로 보물찾기에 돌입했다. ‘까짓거 돈 주고 안경을 새로 사면되잖아’ 라고 스스로 의지를 깎아내리기도 했지만 시작된 보물찾기를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안경을 되찾았을 때의 그 희열을 위해서. 
어디에서부터 시작할까?
   나는 먼저 신발장 위를 살폈다. 그러나 기대는 이내 꺾이고 말았다. 그렇다면 옷을 벗어 놓았던 자리에서부터 다시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보물은 언제나 찾기 힘든 법이다. 나 역시 그것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미궁 속이다.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술과의 전쟁 따위는 무모한 짓이라며.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도전이다. 책장, 옷장, 책상 서랍, 진열장, 그 어디에서도 안경의 종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듬성듬성 빠져버린 치아처럼 안타깝기만 한 내 기억의 조각들. 자꾸만 어긋난다.
나는 침대 위에 초라하게 누웠다.
   지난밤을 다시 생각하고 또, 다시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냉장고, 드라마에서 보면 전화기를 냉장고에서 종종 찾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후닥닥 냉장고로 달려갔다. 그리곤 냉장고의 냉장실이며 냉동실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없었다.
나는 시간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간다. 어쩌면 내 존재의 의미마저 퇴색되어 조각난 기억들과 뒤섞일지 모른다.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곤 희멀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모두가 네 탓이야’ 하면서 나를 나무랐다. 술과의 의미 없는 전쟁을 나무랐다. 잃어버린 기억이 소중한 일부분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예전에도 이런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다행히 술집 주인이 안경을 보관하고 있어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반대다. 그 누구도 안경의 흔적을 말해 주는 이 없었다. 처음부터 안경을 찾는 것은 무리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나의 몫이다. 전쟁에서 무기를 잃어버리다니 그것참! 어이없는 일이다. 무기 없이 어떻게 술과의 전쟁을 치렀을까?
가만히 눈을 감는다. 시계 초침의 잔악한 혀가 나의 몸을 핥고 지나간다. 순간 섬뜩함이 느껴지면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섬뜩함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찾을 만한 곳은 모두 찾아보았다. 그래도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신경질.
   언젠가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모자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우산을 잃어버리는 것은 예사다. 그러면서도 술과의 그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술을 끊으면 될 일이다. 아예 전쟁을 꿈꾸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는 금주를 되새김질해냈다. 동시에 위가 더부룩하면서 뒤틀리기 시작한다.
   전자레인지는 말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전자레인지 문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열었다. 역시나 희망이 사라지고 말았다. 싱크대 문을 열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안경에 대한 실마리를 도통 발견할 수는 없었다.
내 존재에 대한 상실감을 나는 극복해야 한다. 나는 되도록 차분하려 노력했다.
    ‘머리를 굴려! 시간을 되찾는 거야. 너는 할 수 있어. 여기에서 포기한다면 너는 영원한 낙오자가 되는 거야.’
   나 자신을 채근하는 나도 이제는 막막할 뿐이다.
   <오늘은 어때? 오늘 하루도 물론 잘 보냈겠지. 그럼 남은 시간은 나와 놀아 줄 수 있겠네. 오늘 하루가 썩 기분 좋은 날이 아니었더라도 나에게 위로를 받으면 좀 나아질 거야.>
   돌이켜 보면 술이란 녀석은 음흉한 미소를 감춘 채 그런 식으로 다가오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욕구를 잘라내지 못한 채 또 술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늘 그랬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건 패배를 의미한다. 물건을 잃어버린다는 건 패배의 증표다. 그리고 굴욕이다. 술은 전쟁하라고 생겨난 것이 아니다. 즐기라고 생겨난 것이다.
   친구가 있었다.
    “너는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참 좋은 놈이다. 그런데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사람이 달라 보여.”
    “어떻게 달라 보이는데?”
    “넌 개야!”
   언젠가 술자리에서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마시려던 술을 친구의 얼굴에 붓고 귀싸대기를 갈겼다.
    “그럼 너는 개와 같이 술을 마시는 거냐?”
   그날 친구는 아무 소리 없이 되돌아갔다. 나는 씩씩거리며 술을 벗 삼아 화를 달랬다. 다음날 친구는 전화로 다시는 나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날 개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친구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은 공공의 적이다. 그래서 나는 술과 싸우기를 마다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내가 만났던 그녀는 공공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싸웠다.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술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그녀가 불쌍해 보이기도 했지만 정작 불쌍한 쪽은 나였다. 의미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고야 마는 바보 같은 존재.
   그녀를 두 번째 만난 날 나는 그녀를 안았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술기운에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그만의 대가를 돈으로 받았다. 그리고 내 옆에 누웠다. 우린 벌거벗은 채 음침한 모텔방 안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서로 술에 취해 술 냄새를 분간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의 거짓되고 과장된 신음에서 술 냄새가 배어 나왔다. 나는 술 냄새를 탐닉했고 그녀는 돈을 탐닉했다. 다음날 잠에서 깼을 때 모텔 방에는 벌거벗은 나만 남아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녀가 벌거숭이였다는 것밖에는. 서로 믿질 것은 없었다. 그녀도 벌거숭이, 나도 벌거숭이였으니까. 그때부터 만취해서 집에 들어올 때면 나는 팬티만 입고 현관 밖에서 자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술과 사랑에 빠졌었는지도 모른다. 부질없는 사랑, 두려움 없는 사랑, 소지품을 잃어버려 가면서, 시력을 잃어 가면서도 보잘것없는 사랑을 스스로 예쁘게 포장했던 바보 같은 놈! 의미 없는 사랑에 나는 구역질이 났다. 욕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내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시는 가까이하기 싫은 녀석. 제아무리 벌거숭이라고 해도, 제아무리 예쁘게 화장한 그녀라고 해도 이제는 안고 싶지 않다. 그것은 거짓 사랑이기 때문이다. 수십 명 아니 그 이상이 다녀갔을 벌거숭이 몸뚱이 위에서 쉬고 싶은 생각은 이제 추호도 없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사랑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가랑이 사이 서지 않는 그곳을 끈질기게 세우려 노력하면서. 더 망가지기를 바랄 것이다. 잔혹한 존재. 기억을 야금야금 벗겨 먹으면서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사랑을 꿈꾸는 녀석. 너에게 어떻게 복수를 해 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만족할 수 있겠니? 차라리 진정한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텐데.
너를 탓하지는 않겠다.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은 잃어버린 기억과 기억 안의 시간, 그리고 네가 가져간 전리품인 내 안경을 돌려받으면 그만이다.
기억은 파도를 몰고 와서 포말로 깨져버리고 만다. 나는 이순간 깨진 포말의 조각 맞추기에 전념해야 한다. 기억을 되찾아 주는 가전제품이 있었으면 좋겠다. 기억을 뒤쫓을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을 찍어둘 걸 그랬나.
내 머릿속에 설치되어 있던 CCTV는 더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CCTV는 영원히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아련한 침묵이 흐른다. 움직임이 없다. 침대 위에 시체처럼 누워 있다가 나는 잠이 들고 말았다.
   또 다른 오늘이다. 기억의 소멸. 사라진 존재의 슬픔. 찜찜한 하루가 다시 시작이다. CCTV모드 변경. 클래퍼보드clapperboard가 재빠르게 손뼉을 친다. 나는 집착이 강한 편이고 미련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쉽게 싫증을 낸다거나 포기하는 법이 없다.
처음은 ‘혹시’라는 단어에서부터 시작된다.
   안간힘을 쓰며 침대를 옷장 쪽으로 당긴다. 침대 사이에 안경이 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경은 없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상관없다. 내 집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니까. 어제는 보물찾기에 불과했다면 오늘부터는 집착의 시작이다.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간절해지는 것. 나는 조각난 기억을 사냥한다.
   사냥꾼의 눈은 날카롭고 정확해야 하며 빈틈이 없어야 한다. 물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한다. 초점은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고 흔들림 없어야 한다. 조금의 실마리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냥할 대상에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한다.
   작업할 때 쓰는 안경을 찾아 쓴다. 이제 준비는 다 됐다. 본격적인 시작만 남았다.
세탁기 속을 들여다본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착각. 텅텅 비어 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소개팅을 처음 받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겨울쯤이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였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날 오후는 야무진 눈초리에 쓰디쓴 하품이 매달려 있었다. 그때는 수줍은 그녀였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는 모습이 순박해 보였다. 처음의 교감. 내 교감신경을 송두리째 빼앗곤 빈털터리로 만들어 놓았던 그녀. 나는 그날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친구 집에서 그녀의 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다.
   그녀가 지금처럼 그 녀석으로 진화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녀석이 다시 어떤 모습으로 진화하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술이라는 그 녀석은 순식간에 진화한다. 그리고 나는 그 녀석의 친구도 알게 되었다. 바로 담배라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들과의 첫 소개팅을 나는 후회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소개받았을 녀석들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총구를 겨눈다. 녀석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어디 한 번 방아쇠를 당겨 볼까?
탕!
   심장을 꿰뚫는 소리. 하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무모할 뿐이다. 녀석은 콧방귀도 끼지 않는다. 녀석도 사냥꾼이다. 기억 사냥꾼. 그런 녀석이 당할 리 없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녀석을 혼내는 일은 내 몫이고 안경을 찾아야만 나는 녀석을 용서하게 될 것이다. 내 이마에는 벌써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쓰레기봉투, 재활용봉투 속에도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숨어 있을까? 난 안경을 어디에 팔아먹은 것일까?
   사냥감은 때론 아주 가까운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현관 밖에서부터 시작이다. 현관문을 열자 찬바람이 싸하게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이런 날씨에 팬티만 입은 채 밖에서 나뒹굴었을까? 나는 현관 밖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도 없다. 속이 타기 시작한다.
   소홀했던 나를 용서해라. 내 기억들이여, 그리고 실마리를 제공해 줄 내 안경이여. 나는 큐브 속에 있다. 큐브를 맞추지 못한다면 나는 그 속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큐브는 내 머릿속이다. 나 자신을 스스로 채근하기 시작한다.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신발장 앞에 서서 진지해진다. 그리고 온몸의 감각들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신발장 사이로 빠졌을지 모른다. 신발장을 통째로 끌어낸다. 흐릿한 기억의 굴레.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돌아설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꺼이 다가서는 것뿐이다. 포기할 때도 됐는데 왜 그리 집착하는지 모르겠다고. 그건 이제 오기 때문이다.
나는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을 생각이다. 평소에는 알지 못했던 잡동사니가 왜 이렇게 많은가. 좀 더 담백하게 살 수는 없었던 걸까? 결혼한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많은지. 하지만 잡동사니들은 언제부턴가 내게 묵은김치처럼 김치찌개를 끓이면 진한 맛이 배어 나오는 것들이다. 차마 외면할 수 없는 내 몸뚱이들.
   초인종이 울린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절로 깜짝 놀라고 만다. 올 사람이 있었던가? 현관문을 연다. 여자 친구가 앞에 서 있다.
    “약속 잊었어?”
    “약속!”
   그제야 생각이 났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뭐 하고 있었어?”
    “안경 찾고 있었어.”
    “설마?”
   순간 들키고 말았다. 아마 설마가 사람 잡는 거라지. 어떻게 해서든 순간의 모면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침대맡으로 달려갔다. 휴대전화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설마 휴대전화까지 잃어버렸다면. 휴대전화는 항상 놓아두는 그 자리에 있었다. 배가 고팠던지 제 몫을 해내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다. 일단은 다행이었다. 이렇게 쉽게 안경도 찾을 수만 있었다면 조각난 기억들도 자연스럽게 되돌아 왔을 텐데.
조각난 기억과 안경. 이제는 안경을 찾기 위한 도구가 조각난 기억이 되어 버렸다. 둘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조각난 기억과 안경은 동일 선상에 있다. 그래서 그토록 조각난 기억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여자 친구는 어느새 외투를 벗고 있었다.
    “술 먹고 어디에다가 빠뜨리고 들어 온 건 아니고? 집에 쓰고 들어오긴 온 거야? 잘 생각해봐. 오빤 술 마시면 물건 같은 것 잘 챙기지 못하잖아. 오빠, 정말 이참에 술 끊어야겠다. 오빠 친구 말대로 오빠 머릿속에 미친개가 사는 건 아니겠지?”
    “집에 있을 거야. 아니 있어.”
   여자 친구도 나를 도와 안경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조각난 기억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기억이 먼저인지 안경이 먼저인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찾아도 안경은 그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비밀의 문아, 열려라! 공간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시간은 멈추는 법이 없다. 그러나 때론 조각난 채 멈추기도 한다. 멈춘 시간의 언저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여자 친구는 되돌아갔다. 안경을 찾지 못하면 헤어지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달고.
   이제 나는 세 가지를 걱정해야 한다. 조각난 기억과 안경의 존재 그리고 다가서는 이별의 그림자. 술과의 전쟁은 너무 불공평했다. 한순간 무방비 상태에 놓였던 나를 무참하게 짓밟았던 것도 모자라서 기억과 안경까지 빼앗아 가다니. 고약한 녀석!
별수 없다. 벌거숭이가 되어 조각을 찾아 맞추어 보는 수밖에. 나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팬티만 입은 채 현관 밖으로 나가 뒹굴었다. 그렇게 10분쯤 되었을까, 아무런 느낌도 징조도 없었다. 더는 추워서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막막해졌다. 다음 상황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뒹굴었으니 샤워를 했을 것이다. 안경을 벗었던 상황이 밖으로 나가 뒹굴었을 때인지 아니면 샤워하기 위해서 욕실에 들어섰을 때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무작정 샤워를 했다. 그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러면서 욕실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없다. 욕실에서 나와 나는 속옷을 갈아입었을 것이다. 속옷을 갈아입기 위해 서랍을 열었다. 또 없다.
그 뒤에는 무엇을 했을까? 피곤해서 침대에 눕지 않았을까? 그럴 것이다.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그것이 다였다. 왜 이렇게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는 것일까.
   침대에 누운 채 눈만 끔뻑거린다. 숨이 막혀 온다. 삶의 자락이 너무나 흐릿하다. 내 일상에서 시간이 멈춘 것은 토요일 밤이다. 되돌아가고 싶은 시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조각난 시간의 굴레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추어탕 집에서, 호프집에서, 피시방에서 난 정말 안경을 쓰고 있었을까? 의문이다. 그렇다고 재확인하기 위해서 그곳을 다시 찾을 수도 없다. 그들이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 그들이 내 시력을 담고 있는 안경을 무슨 필요로 가로채겠는가. 일단은 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의 몫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비겁한 처사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다릴 수 없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내 기억의 조각들은 더욱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 테니까. 그러다 보면 영영 안경을 되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더 집착할 수밖에 없다.
뒤죽박죽되어버린 일상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날카로운 길고양이의 눈으로 금방이라도 나를 할퀴고 지나갈 것만 같다. 어둠이 두렵다. 불을 켠다.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어떤 여유도 없다. 나는 점점 심약해져 간다.
휴대전화에 밥을 준다. 난 배가 고프지 않다. 나는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 정지된 시간의 조각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 술과의 전쟁 따위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 당분간은 그 전쟁이 역겨울 것이다.
   그녀, 술과의 전쟁을 직업으로 삼았던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찾아갔었다.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술기운이 올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불쑥 그녀의 말을 꺼냈었다. 친구는 자기가 술을 사겠다며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우린 택시에 올라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 그녀는 없었고 그녀처럼 전쟁터에 몸뚱이를 무기 삼아 나온 여자는 많았다. 우린 진탕 술을 마셨다. 두 테이블을 해치우고 가려는데 여자가 잡았다.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가라고. 친구는 갔고 나는 여자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모텔 방에 발가벗겨진 채 버려져 있었다. 술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모텔 방으로 들어왔는지, 왜 발가벗겨져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조각난 것이다. 나는 먼저 지갑을 찾았다. 카드가 있는 것을 알고 안심을 했다. 뒤이어 휴대전화를 살폈다. 휴대전화에는 내가 결제한 기억이 없는 액수가 SMS로 날아와 있었다. 순간 역겨움이 일었다. 기억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카드를 도용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카드사에 전화를 걸어 카드 분실신고를 했고 재발급 신청을 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그 이후로 기억 상실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한 달 동안을 가위에 눌린 채 살았다. 그리고 멈추었던 기억들은 되찾지 못한 채 흐르는 시간과 함께 까마득해지고 말았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안경만이라도, 애인을 바라볼 수 있는 시력만이라도 되돌려 줄 수는 없는 걸까?

   또 오늘이다. 토요일 밤 그 상태로 일시에 정지된 시간인 오늘. 오늘은 기필코 찾을 것이다. 오늘이 아니면 집착도 느슨해질 것이 뻔하다. 오늘을 고비로 안경을 찾아내던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똑같은 안경을 새로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고 싶다.
   나는 오늘을 반성한다. 나는 애인을 만날 염치가 없다. 나는 뒤진 곳을 또 뒤지며 안경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런 나를 벽시계가 조롱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시계가 무료하게 하품한다. 며칠째 반복되는 일들 때문에 벽시계도 지루한 모양이다. 시계의 걸음걸이는 느슨했다. 놓친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이제 없다. 그러나 미련을 버릴 수는 없다.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남겨둔 채 나는 서 있다. 집이 너무 낯설게 느껴진다. 이 공간에서 내가 서 있을 곳은 없을 것만 같다.
   마치 운동장 한가운데에 외톨이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것만 같다. 천천히 집안 곳곳을 살핀다.
   실종이다. 안경은 미아다. 집착과 노력은 이제 시간 속에 묻어 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완전한 패배자다. 술과의 전쟁에서 수치스러움을 겪어야 했고, 나는 인정해야 한다. 다시는 너에게 도전하지 않겠다.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모두 먹어 치운 후에 술은 자신을 뜯어 먹는다. 결국에는 시간마저도 조각을 내놓고 음흉한 손을 내밀어 망각의 늪으로 끌어당긴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모두가 자초한 일이니까.
모든 것은 끝이 나고 말았다.
   외출을 준비한다. 안경은 찾지 못했지만 똑같은 안경으로 새로 살 생각이다. 날씨가 춥다고 했던가? 옷을 입고 지갑과 휴대전화를 챙긴다. 그리고 가죽점퍼를 꺼내 입었다.
   열쇠를 챙겨 신발을 싣는다.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봐야 미련만 남을 뿐이다. 내게 남은 것은 포기뿐이다. 이제는 멈추었던 시간이 흐를 수 있게 태엽을 감아주어야 한다. 현관문을 열자 차갑고 퀭한 바람이 앞을 가로막는다.
문을 잠그고 열쇠를 점퍼 안주머니에 넣는다. 동시에 열쇠와 무언가가 부딪히는 느낌이 든다. 안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넣어둔 기억이 없다. 무얼까?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열쇠와 그토록 찾던 안경이다.
나는 기억의 조각을 움켜잡는다. 뿌듯해진다. 하지만 다른 조각들은, 아니, 다시는 조각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
나를 가장하여 나인 척 나를 삼킨 녀석! 이제 너와의 이별을 고한다. 부디 다른 곳에 가서는 미친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녀석아!








**약력:1970년생. 시집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바쁘면 환절기에 만나자』 외. 에세이집 『내 머릿속의 또 다른 나』 외. 장편소설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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