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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특집/나의 시, 나의 생활/김근/끝나지 않는, 끝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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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44회 작성일 16-12-3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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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나의 시, 나의 생활






김근

끝나지 않는, 끝낼 수 없는,





   가난하다. 자발적 가난, 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내가 가난한 것은 생활의 기획이 없기 때문인데, 다만, 그래서, 지금은, 가난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을 뿐이지만, 생활의 대부분이라는 것이 밥벌이의 지난함으로 채워져온 것이 사실이어서 나는 생활을 생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활이 있기나 한지 의심하기만 일쑤이고, 하므로 내게 생활은 생활로서 도무지 가능하지가 않다고만 자주자주 생각하고, 생활은, 늘 생활을 잡아먹기는 해도, 생활을 새로 낳아놓지는 않는다고, 이 불연속도 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기나 있을지, 연속이라고는 하지만, 그 불연속 이외를 늘 시의 시간이라고는 또한 할 수 없고, 시의 불연속도 역시 생활의 시간만이라고는 굳이 말할 수 없으므로, 생활과 시는 상관 없기는 없지만, 생활의 불연속과 시의 불연속 사이에 거의, 언제나,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멍한 시간들이 있는지라, 그건, 그러나, 생각키로는, 생활도 시도 아니어서 내 생활도 내 시도 가난한 것인지도 모르긴 모르겠는데,
   내 생활의 대부분이 밥벌이의 지난함으로 채워져 있다면, 밥벌이 얘기를 안 할 수 없는 것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밥벌이를 놓아본 적 없는 나여서, 가난하다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는 궁핍한 적도 없고, 그것은 내가 가난해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부분도 없지 않아서 그렇게 가난해보이지는 않기야 않지만, 한편, 극단적으로 가난해지기 전에 언제나 일이 밥벌이가 이어지곤 하던 거여서도 그렇기도 그런 것이니, 내 본격적인 밥벌이의 시작은 스물다섯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때가 여태까지도 안 잊히는 것이, 밥벌이의 지난함으로 치면 아니 삶의 지난함으로 쳐도, 그때가 가장 지독한 황홀한, 지독함과 황홀한 사이의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그런 시간이었을 것이 분명한, 오직 생활이 생활뿐인 그때였기 때문이긴 한데, 그때 나는 대학생이었고, 가난한 대학생이었고, 가난해서 휴학한 대학생이었고, 그때 등록금은 100만원 조금 넘는 돈이어서, 남학생들이 대관령 가서 배추 한 열흘 나르면 채워질 금액이거나 공사현장에서 막노동 한 달만 해도 가뿐히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어서, 가난은 어쩌면 핑계에 불과할지도 또한 모르고, 나는 그런 육체적인 노동에는 영 소질이 없다는 것 또한 핑계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가난했다고 치고,
   이, 가난했다고 치고, 는 그 뒤로도 여러 번 내 핑계가 되어주었으니, 내가 서른 살 때 다니던 출판사를 일 년 만에 때려치우고 퇴직금 받아서 오랜 꿈이었던 인도로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통장에 잔고가 0원으로 말라붙어 있어서, 실은 가기 전에 잠깐 선배가 하는 잡지에 합류해 사진도 찍고 취재도 하고 그랬었더랬는데, 인도에서 돌아와서 잔고 0원이 막막하던 차에 선배가 다시 나와서 일해 달라고 했는데도, 가난했다고 치고, 이번에는 전혀 다르게, 일하지 않고 버텨볼 수 있는 있는 핑계로 삼을 만도 했는데, 얼마 후 당시 <출판저널>의 수석기자로 있던 시인 최갑수가 연락이 와서, 얼른 또, 가난했다고 치고, 를 발동시켜 두 말 않고 이력서 넣고 면접 보고, 그 다음 주부터인가 바로 출근하기 시작했더라는, 그 가난했다고 치고, <출판저널> 잘리고, 그 잘리고, 는 좀 고려해봐야 할 것이 그때가 2002년 월드컵 때였고 해고 통보를 받은 날이 폴란드전 하는 날이었는데 거리에는 붉은 인파가 삼삼오오 광화문으로 모여들고 있었고 나는 종로서적 최종 부도 소식을 접하고 종로서적 뒷골목에서 줄담배만 줄창 피워대던 출판사 영업자들을 취재하고 늦은 오후에야 터벅터벅 이물스럽게 그 붉은 인파들에 끼여서 광화문을 거쳐 미문화원을 지나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으니, 터벅터벅, 딱 그 앞쯤에서, 출판계 원로들이 반대 성명을 내고 보도도 되었으니 월드컵 때문에 다 묻혀버리고, 결국 <출판저널>의 운영주체가 재단법인에서 사단법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즉 그래서 거기에 저항하던 기자들은 모두 해고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었으니, 나중에 해고기자들끼리 <출판저널> 특집 단행본을 만들게 되는 것은 또 나중 이야기이긴 해도, 잘리고, 퇴직금 모아, 또 오랜 꿈이었던 티베트로 향했다가 돌아와 보니 또 0원이었던 통장 잔고, 전세금 대출 받아놓은 것 제 때 못 갚아 신용 불량자까지 되고 갚기는 갚았으나 그 일로 이사 갈 때 주인이랑 싸우고, 가난했다고 치고,
   휴학한 나는 충무로 진양상가에 있는 학번이 1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학과 선배네 기획사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일하기 전에 우선 다급한 것이, 당시 나는 안성에서 자취하며 학교에 다니는 처지였던 터라, 서울에 집 한 칸 구하는 일이었으나, 당분간 지내기로 한 서울 연신내 외삼촌 네서 서울 올라가기 사흘 전에 안 되겠다고 통보를 받은 것인데, 이유인즉슨, 그 집 큰 아들이 고삼이어서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던 바, 어떻게 내가 방해했을지는 나도 모르겠고 외사촌인 그녀석도 제 부모도 몰랐을 것인데, 아무튼 그는 내 방해 없이 공부해서 지방대에 겨우 갔기는 갔고 결혼도 안 한 고모집에서 졸업하기까지 지냈다는 이야기는 그 뒤로도 한참 나중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도 그때 서러움이 없지는 않았으니, 그럴 것이 시골 아버지가 그 일로 두고두고 술만 먹으면 눈물 바람을 한 것도 원인이라면 원인이었겠으나 그것 또한 한참 후의 이야기여서, 급한 대로 내가 가기로 한 기획사에 취직해 있는 한 학번 위인 여자선배로부터 소개를 받아 길동에 있는 졸업한 선배네 오피스텔로 들어가게 되었기는 되었는데, 그 오피스텔 바닥이 시멘트 바닥이라 선배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스티로폼 깔고 바닥에서 자는 주먹구구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 내 첫 서울 생활의 시작이었고,
   충무로에서 길동까지 가려면 지하철 한 번 갈아타고 성수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야 했는데 술 먹고 지하철 막차를 타고 잠실운동장까지 갔다가 선배에게 전화해보니 가까워서 슬슬 걸어오면 될 거라는 말을 듣고 잠심에서 길동까지 밤새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던 이야기 같은 이야기 따위야 많지만 다 할 수도 없이, 직장이 클라이언트를 상대해야 하는 만큼 피곤도 스트레스도 이만저만 아닌데다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선배들끼리의 이상야릇한 공기도 또한 감내해야 했고, 문제는 오피스텔 주인이던 선배의 연애가 너무 아름다워서, 길동까지 걸어가면서 그 새벽에 수없이 뱉었던 그 “씨발”은 허공에 흩어지고, 나는 또 다른 잠자리를 알아봐야 했고, 그래서 구한 집이 왕십리의 변소방이었는데, 이 방은 서울에서 연극하는 고향 친구의 방이었는데, 떡볶이집을 지나 좁은 골목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는, 방이라고는 하지만, 방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야외변소 위에 방 하나를 올린데다가 한 벽은 축대여서 기울어진 축대의 모양이 그대로 벽지 위에 도드라져 보였는데, 연탄을 떼는 방이었지만 내가 거기 머무는 동안 한 번도 연탄을 떼본 적은 없고 전기담요와 두꺼운 솜이불에 의지해 그 해 겨울을 났는데, 친구는 자주 집을 비웠고 방 안에 허옇게 입김이 날고 마실 물은 자주 얼었는데, 김광석이 죽었고, 나는 그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김광석이 죽었고, 머물렀지만, 머물 데가 없었고, 시는 영원히 안 될 것만 같았는데,
   기획사 사장인 선배의 도움으로 보증금 200만 원짜리 월세방을 얻은 건 다행한 일이었으나, 그 집은 이제 막 새 건물들이 지어지는 한남동 입구에 섬처럼 존재하는 낡은 건물 한 채였으니, 왜 그랬는지는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그 집 주인 부부의 딱 수전노 인상을 보고 알기는 알았고, 그 한 집에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사는 형편이었는데 다른 집은 몰라도 옆집에 살던 애 딸린 부부는 오지랖 넓게 자주 저희 저녁 식사에 초대해 자꾸 내게 맥주를 먹였으나 난 그 또 너무 남성다움과 허세에 절은 남편의 웃음이 보기도 무척이나 싫어서 내 쪽에서 슬슬 피할 수밖에 없었던 그 집, 군대 갔다 와서 복학 준비하는 동기 놈들 시 모임 핑계로 돈 버는 자가 나밖에 없었던 탓에 늘 내가 술값을 감당해야 했지만 나 또한 기꺼이 겨우 그들과 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을 고맙게 여기며 술 취해서 들어오던 그 집, 그 집에서 나는 오래 침묵하고, 새벽 일 나가는 세입자들의 웅성거림이 들릴 때까지 책 읽고, 시라는 걸 그것이 시인 줄도 모르는 채로 비로소 써갈겼더랬는데, 그때 그 집에서 쓴 시들이 내 시의 기반이 될 시들이었으니, 얼마 안 있다 나는 복학했고, 또 얼마 안 있다 등단했고,
   였으나, 내 생활이라는 것이 등단하고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는 게 내 생각인데, 그 시절보다야 생활의 불편함을 덜기는 조금 덜었지만, 생각해보면, 내 생활은 늘 기획 없이 떠도는 일이었으니, 출판사와 인도와 잡지사와 출판저널과 티베트와 프리렌서와 안양예고 강사 시절에 나는 내 첫 시집의 시들을 발표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동안 내 두 번째 시집의 시를 발표했고, 대학원과 한겨레와 중앙대와 동덕여대 강사와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장 동안 내 세 번째 시집의 시들을 썼더랬는데, 늘 숙제하듯이 쓰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쓸 때마다 들었던 것도 사실이고, 생활과 시는 상관 없기는 해도, 시 쓰는 과정에서는 생활과 시는 늘 반목과 긴장과 길항을 반복했으니, 아주 상관 없다고는 또 할 수 없어, 기실 생활 없이는 또 기이하게도 적어도 내게는 시가 도무지 가능하지 않는 것이 이미 되어 버린 터라, 지금 생활에 덜 긴장하고 밥벌이에 덜 적극적이어서 가난한 것이 번연한, 나를 또 탓하면서, 자주 찾아오긴 하지만 이즈음엔 시로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그 멍한 시간에, 시가 잘 안 써지는 이유를 찾아보고는 있는 중인데, 중이긴 중인데, 이유야 다른 데 있다는 것 또한 알뿐더러 생활도 시도 결코는 끝낼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무척 잘 알고 있는 중이지만, 불연속 중이고 생활의 불연속인지 시의 불연속인지 알 수는 없는 중이어도,







**약력: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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