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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신작시/김종호/맨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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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종호
맨발
새로 산 신발을 잃어버렸네
나를 따라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구두바닥엔 王 자를 쓰지 않았으므로
조문객들 틈에서 슬쩍
양손 바닥을 들여다보았네
집에서 떠날 때 공들여 비방을 한
붉은 王 자가 희미하게 번져가고 있었네
재개발지역의 빈집에서 주워 온
금간 항아리 바닥에도
아내는 극진하게 王 자를 처방했지만
그리하였으므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낯선 신발들 틈에서
상주도 나도 서늘하게 바라보기만 했네
밖에는 진눈개비 몰아치는데
질컥질컥 끌고 온 슬리퍼를 장례식장 주차장에 팽개쳐놓고
맨발로 가속페달을 밟았네, 밤길을
맨발로 걸어갔을
영혼처럼
서둘러 떠난
그 누군가의 뒤를 쫓듯이
헛간
어릴 적 사숙했던 아버지는
집은 허물기 위해 짓는 거라고
잠언 같은 유언을 남기고 가셨지만
흙의 내장까지 환하여
별빛 고요히 머물다 가던 헛간 한 채
오래도록 가슴속에 들여놓고 살았는데
긴긴 겨울, 늑골을 가로지른 서까래들이
툭툭, 가슴을 찌르는 날
나는 헐어내지 못한 헛간에 쭈그리고 앉아
별빛이 당도하기를 마냥 기다리곤 했는데
이젠 아버지의 얼굴도 희미하여 쉽게 떠오르지 않는 밤
불안은 종종 얕은 잠을 깨워
눈 내리는 강변을 밤새 거닐게 하네
누가 내 흔들리는 삭신을 잘게 쪼개 시래기두름처럼 새끼줄로 엮어
바람 무성한 헛간에 매달았으면 좋겠네
뼈마디에 새겨놓은 그리움이며 후회며 한 칼 한 칼 도려내어
풍장 치듯, 그렇게
눈발 속에 하염없이 내걸었으면 좋겠네
**약력:1982년 〈강원일보>신춘문예(시),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동시) 당선. 시집 『둥근 섬』, 『적빈赤貧의 방학』. 저서 『물·바람·빛의 시학』 외. 원주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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