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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신작시/정병근/굽은 길 나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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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정병근
굽은 길 나무
자문자답만큼 완벽한 대화는 없지
위안은 자문자답의 힘
희망은 스스로 결연한 것
반납 불가의 자세로
나무는 나무다
나의 사랑도 저와 같아서
불퇴의 남루로 서 있자
푸른 불의 심지를 돋우고
끝까지 서 있자
억만 년은 되지 않았겠나
불행한 말을 알아차리고
자라는 입을 잎으로 지운 일
다른 이에게로 가는
발의 유혹을 뿌리친 일
네 귀는 아주 멀어서
몇 백 년을 미리 보내 놓고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군
내가 헤매고 낙담하여 돌아올 때
굽은 길 위에 서 있는 이가 바로 너라는군
너의 침묵을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울창한 네 귀를 열고
너와 말문을 틀 수만 있다면
시 같은 것 쓰지 않겠네
다 버리겠네 나도 한 자리에 서서
백 년을 기다리겠네
우거지는 법
―폐가를 나오며
문 닫고, 눈 감고
한 생각만 하는 것이다
맹세도 약속도 없이
캄캄하게 잊히는 것이다
거미는 줄을 치고
숭숭 뚫린 문살 새로
바람은 들락거리겠지
무더운 어느 날에는
한 걸음이 터벅터벅 와서
마당에 똥오줌을 누고 가겠지
그 똥 속 참외 씨 하나 살아서
너풀너풀 잎을 피우건 말건
신발 속에 강아지 풀 자라든 말든
모르는 것이다
버려지는 것이다
한 생각마저 잊는 것이다
**약력:1988년 《불교문학》으로 등단, 2001년 《현대시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태양의 족보』 등. 지리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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