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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신작시/박진성/여름의 빛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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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박진성
여름의 빛
네가 빛에 갇힌다면 제라늄의 붉음과 이팝나무 하양으로 네가 色에 갇힌다면 나는 어둠을 선물할 텐데 중력이 없는 우울 말고 통증이 없는 심해 말고 물의 마음을 인화하는 암실을 네게 줄 텐데 단 하나의 물병이 놓여 있는 빈 방의 목마름을 데려올 텐데 손바닥 바깥으로 손금이 녹는 나는 대낮을 걷는 빛의 짐승
소용돌이를 선물할 텐데 광합성을 배우는 잎의 테두리 말고 빛의 내부에 닿아 터지는 물관의 수직 말고 안 보이는 표정에서 없는 표정으로, 같은 공중에서 떨어지는 다른 빛들처럼 우리는 무심할 텐데, 나는 빛을 걷는 대낮의 짐승, 들끓는
빛에 우리는 갇혔다…… 우리 스스로 갇혀서 빛 속에 몰래 우리 안의 짐승을 풀어줬다 한낮의……, 식물로 지은 테라스를 선물할 텐데, 낮을 모르는 빛을 모르는 동물의 마음을 모르는 얼음을 선물할 텐데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죄악 하나가 그 얼음에서 녹는다면
빛을 피하려고 감은 두 눈 속의 그 빛끼리 만난다면
세상의 모든 가설
공중에서 죽은 새가 꼭 있을 것 같고
빗속에 눈송이가, 여름의 눈송이가 숨어서 내리는 것 같고
올라가는 물들이 올라가고 있을 것 같고
하얀 방의 하얀 의자에 앉으면 하얀 색 피가 돌 것 같고
스탠드의 하얀 불빛에만 이 화분은 마음을 주는 것 같고
동물에서, 동물로, 우리는 이 세계에 없는 죄를 만드는 것 같고
파란과 파랑과 파문과 파랗게…… 노을이 지는 곳이 있을 것 같고
너는 그곳에 통증을 모두 버리고 온 것 같고
메스에서 죽었다가 자궁에서 다시 태어나는 아기가 있을 것 같고
그렇다면 이 방은 너의 자궁 같고
유리문 너머 저 세계는 우리를 버린 메스 같고
잠옷으로 갈아입으며 우리는 잠을 선물하는 것 같고
잠과 꿈의 사이에서 네가 기다릴 것 같고
표정 없는 천사가 아침을 막고 있을 것 같고
너의 몸은 소리 같고
그렇다면 나는 네가 오래전에 버린 슬픔 같고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이 단 한번은 있을 것 같고
같이 해야 완성되는 기도가 있을 것 같아서
우리는 그곳으로 포개져서 사라지는 것 같고
* 이면우 :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약력:충남 연기 출생. 2001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목숨』, 『아라리』, 『식물의 밤』. 산문집 『청춘착란』.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 시작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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