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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신작시/김점미/그녀와 나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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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점미
그녀와 나
우리는 두 개의 물줄기
사랑의 해수면 아래
그녀는 무관심의 파도를
나는 분노의 파도를
앉혔다 세웠다 하며 반세기를 살아낸
흔들리는 지축의 힘,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끓고 끓어오르는 성난 마그마가
사랑의 해수면 위로 솟구칠 때까지
우리는 두 개의 물줄기
한때 우리는
지독한 사랑의 바다에 빠졌지만
해수면 아래서 조용히
애증의 칼날이 자라는 걸 알지 못했지
격랑의 시간은 어김없이
이성도 감성도 모두 집어삼키고
세상의 축도 뒤흔들고
그녀와 나를 폐허로 쓸어가더니
쓰나미가 끝난 자리
잔인한 햇살을 뿌려놓았네
그녀와 나는 아직도
물줄기 뚝뚝 가슴에 박으며 떨고 있는데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할지 모르는
회복기 환자처럼 늘어져 있는데
우리는 두 개의 물줄기
결코 만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지독히도 잔인한 천상의 인연
흉하고 독한 사랑의 꽃밭에 뿌려지는
붉은 핏방울
99 센트*
가난한 서민의 가격 99센트는 가장 비싼 값으로 팔렸네.*
서민과 가장 먼 소더비 경매장에서
딥티콘**으로 구성된 그 수퍼마켓은
자신을 통틀어도 못 가질 값 380만 달러의 사진이 되어
모범적인 자본주의 속으로 걸어가 버렸네.
형형색색의 공산품은 컨베이어 벨트마냥 가지런히 쌓여 돌아가고
거대하고 다양한 공장의 토사물은 매장을 가득 메운 채
자랑스럽게 매달려 있네, 99센트짜리 목걸이를 걸고.
제정로마시대부터 암흑의 중세를 거쳐 현대까지
99센트는 대도시의 삶을 지키거나 지배하는 안전한 담장
편안한 규범의 침대에서 자고 먹고 살아가는 서민들의 천정
외부의 침입을 막아 온 역사적인 선물
표정 잃은 대중에게 선사하는 자본 신神의 자비
오늘 이 한 장의 사진이
새삼 소름끼치는 이유는
99센트로 하루를 사는 이의 눈물 때문이고
그 삶조차도 유희되는 자본주의 때문이고
나의 무기력함 때문이고
그럼에도 아름다운 사진 때문이고
또다시
오늘의 햇살 때문이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 때문이고
함께 식탁에 앉는 정직한 지인들 때문이고
아직은 죽지 않은 우리의 영혼 때문이네.
* 「99 Cent Ⅱ Diptychon」는 독일 사진 작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작품명으로 99센트는 작품의 제목에서 따옴. 2007년 소더비 경매에서 380만 달러라는 고가로 팔렸음.
**딥티콘diptychon : 중앙에서 접어 포갤 수 있게 경첩을 박아댄 2장의 판자. 여기서는 사진 작품.
**약력:2002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 『한 시간 후, 세상은』, 요산창작기금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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