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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신작시/이정희/ 이장移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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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정희
이장移葬
쿠나보다 젊었던 아버지가
산비탈 작은 땅에
맨 처음으로
이름 새긴 집을 가졌을 때
더 이상 주민등록초본의 페이지를
넘기지 않게 되었다
솔잎과 떡갈나무잎이 차례로
초본草本을 엮어
지붕을 덮어주기도 했다
너덜너덜해진 가장의 어깨도
가랑잎처럼 가볍던 주머니도
솔잎 향기로 말갛게 비웠다
삼십 년만의 이사
시들어 사라질까 애달프던 날
한 잎 한 잎 떼어
매장埋葬을 했다
향기도 이름도 날아가서
마침내 투명하고 얇은
달빛 갈피가 되었다
시간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반히 비치는 꽃잎들 속으로
아버지 목소리 비어져 나오고
쭈뼛쭈볏 등 뒤에 숨던
숨결 풀어놓고
소리도 없이 나풀 내려와
봄눈처럼 사라져 가는데
이제 그만 나오셔요
어릴 적 뛰어놀던 고샅도 보이고
손수 심었던 단감나무도 보이는
마당 너른 새 집이에요
산꿩이 컹컹 울고
수천의 산벚나무 조등을 밝히는
사월이에요 아버지
꽃잠
아침 햇살이 물비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시월
벤치와 땅바닥 사이에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꽃잠에 빠져 있는 저 여자
가녀린 몸을 동그랗게 말고
하얀 스티로폼 위에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 타는 사람들
시선을 다 흡수해서
억새보다 더 창백한 얼굴로
S자 벤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고치 한 마리
**약력:2004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바람의 무렵. 시와정신 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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