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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신작시/신철규/프롬프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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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신철규
프롬프터
내 머릿속엔 달싹거리는 입술이 있습니다.
모든 신경은 분명한 발음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너는 무대 뒤 검은 커튼 뒤에 숨어 내게 속삭입니다.
넌 나의 인형이야, 넌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블라인드 틈으로 지켜보는 눈이 있습니다.
글자들은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영원히 결승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마라톤 주자처럼 나는 항상 뒤쳐집니다.
글자가 지나가지 않으면 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가면 뒤의 얼굴 얼굴 뒤의 가면.
거울 속에는 뒤통수밖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나의 말을 받아 적느라 고개를 들 수가 없군요.
내 눈에서 모래가 줄줄 흘러내립니다.
나는 흐르는 모래를 닦지 않습니다.
나는 또 다른 가면을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난독증에 시달리는 찌푸린 미간은 쉽게 펴지지 않습니다.
*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재현의 불가능」.
얼음
―연기로 가득한 방
얼음은 얼음이 되려고 언제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일까
출렁이던 물이 빙점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출렁거림이 잦아들고 고요한 침묵이 심장이 된다
투명한 물에 연기처럼 흰 색이 퍼져나간다
눈꺼풀 위에 얼음을 올려둔다
눈동자 위로 빙하가 흘러간다
붉은 호수에 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버둥거린다
얼음을 한가득 입에 문다 입천장과 혓바닥이 얼얼하다 입 속 살갗이 차갑게 마비된다
가시 돋친 선인장을 삼킨 것처럼
얼음을 깨문다
얼음 속엔 수많은 부리가 있어서 입 안을 쪼아댄다
입속에서 육면체의 얼음은 모서리를 잃어간다
얼음이 녹으면서 들러붙는다
서로에게 족쇄를 채운다
우비를 뒤집어쓰고 등을 돌린 채 직사의 물대포를 맞고 있는 사람이 있다
죽은 물고기를 씻어내는 수돗물처럼 얼음 탄환이 쏟아진다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아스팔트 바닥에 물이 흩어진다
불투명한 온실처럼 가슴이 뜨거워진다
데인 살갗에 얼음을 문지른다
연삭기로 얼음을 갈면 귓속에 눈이 내린다
사각사각
방 안이 설빙으로 가득 찬다
이 방을 물로 가득 채우고 얼려버리면 이 방은 깨질 것이다
**약력: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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