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61호/신작시/박은형/플라타너스 우체국에서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
박은형
플라타너스 우체국에서
나루가 멀지 않다고 했다
애첩같이 더디 늙는 저녁강을 끼고
여름은 깃이 너덜해지는 곤충의 구애를 견딘다 했다
꽃백일홍 몽땅한 그늘을 업어다 몰래 키운다고도 했다
얼음장 밑으로 남매를 데려갔다는 산 밑 저수지에
발소리들 모여 빗방울마을을 지었다
고인 물 떠나지 못한 옛 이야기 아직 마음을 쏠고
수피 줄여가는 이 여름 끝을 찾아와
그래도 간간이 서로를 마저 웃어 우리가 되는 이름들
흔들림이라는 짧은 영원을 가진 나뭇잎 사이로
탄식과 기쁨의 정원을 무수히 통과한 무명의 오후가 온다
비 젖은 플라타너스 머리숱에 들숨을 깊이 대면
안다고 믿는 순간 부패가 시작된 기억의 냄새를 바꿀 수 있을까
눈빛 가장자리를 헐어 플라타너스 우체국에 걸어놓는다
가는 길에 저 쪽 빗방울마을에도 들러야 한다
마음을 나간 발소리 다 떼어 주면 찹찹 가을비 올 테고
무심한 옛사람의 얼굴 하나 내게 남을 것이다
왔던 길을 돌아 나가는 길목에 계절이 생기고 있다
겨울 서랍
장갑 한 쪽을 또 잃고 왔다
맨손에 관한 간략한 처방전을 받은 외짝들이
마저 헤어지지 못하고 서랍 안에서 소신껏 없어진다
습기의 왼쪽이나 오른쪽, 혹은 허물의 정면에
갖가지 상실의 부위를 담아두기 적절한 서랍은 놓인다
무정형의 거울 속에 집을 지은 일몰은 내 취향의 서랍
서쪽들 또는 강물소리나 변장한 저녁들이 들어가 오지 않는다
깨진 사랑은 영영 오지 않는 것들에 의해 완성되기도 한다
꺼내서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모두 모래언덕의 후예일 뿐
재봉선도 없이 계절과 맞닿았다 멀어진 천 년이
고분 앞 석상으로 서서 부동의 서랍을 산다
전력을 다한 추위가 잠들던 장갑 한 짝의 체온을 돌아보는 일이나
시간의 손잡이를 당신 눈물에다 꽂아 두던 일도 그렇다
부추꽃같이 작은 서랍 하나를 마름하는 일이고
서랍으로 접혀서 마침내 소슬해지는 일
오늘을 살아냈다는 자전적 안부와
미루나무 그늘처럼 조금, 당신만 편애하던 때를 추억하며
가까이 있지 않아 미덕이 되는 겨울무지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였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장갑 한 짝을 흘린 그 때는
**약력:창원 출생. 2013년 《애지》로 등단.
- 이전글61호/신작시/이생용/동백 아가씨 외 1편 16.12.30
- 다음글61호/신작시/정선희/사진 찍는 집 외 1편 16.12.3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