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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특집/인공지능 시대의 시/문신/호모 페이션스Homo patience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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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434회 작성일 16-12-31 11:13

본문

인공지능 시대의 시

문신





호모 페이션스Homo patience를 기다리며





슬프네 나는 전체성을
전체성을 얻을 수 없네
                                                                        ―박희수,「 전체성」 부분



1. 근래 읽었던 시 가운데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인상이다. 시의 전체 맥락이 아니라 전체로부터 절단하여 뽑아낸 저 구절은, 사실, 인간의 인간성이 실패했음을 경고하는 것처럼 읽힌다. 부분의 합은 전체를 초과한다는 생물학적 진리를 감안한다면, 전체성에 이르지 못하는 자기한계의 벽면 앞에서 누구라도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전 체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다소 과장하자면, 자기의 자기성을 얻 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본성을 끊임없이 의심해왔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 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 같은 존재론적 고민이 철학사의 중심축 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존재 근거를 알 수 없다는 불안 을 우리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해소하고, 존재 이후의 세계를 종교적 으로 구축해왔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는다. 그 뿐인가? 생사生死의 순 간은 어쩔 수 없이 단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나’라 는 개별성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나’를 발견한 그 순간을 우리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부르기도 한다. 알다시피 사건은 그 이전과 이 후의 질적 전환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나’를 발견한 최초의 순간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근대적 의미에서의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 다. 이 ‘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우리는 불러왔고, 그는 언제나 생각 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때때로 나는 내가 여전히 어렸으면
어린애가 되어 따뜻한 해바라기 밑에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그런 생각은 시간 속의 상상이라 여유롭다
그네가 벽에 오가는 그늘도 본다
어쩌면 오로지 그네를 보러 온 듯도 싶은데
앉아 타는 사람 없이도
혼자 미끄럽게 흔들리는 그네
                                                    ―박희수,「 나와 해바라기와 그네와 그림자」 부분



   우리의 생각은 이 시에서처럼 언제나 “본다”는 감각경험을 통과 할 때 구축된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데, 인간의 개별적인 감각기 관과 그것들을 해명해내는 컨트롤타워로서의 생각이 독립 층위에서 위계를 형성하지 않고 인간적 차원으로 통합된 전체를 이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장의 감각경험이 그것에 국한된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이전의 유사한 자기경험과 타자들의 간접경험까지 포섭해 내는 경험임을 입증한다. 그리하여 전체는 부분의 합을 넘는다는 의 미를 우리는 감각경험과 사유행위의 소통맥락에서 실현하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유행위를 존재 근거로 상정하고 있는 인간성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의 사유가 효력을 상실해간다는 진단이 심 심찮게 보고되고 있다. 인간만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그동안의 유일 한 증거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유 활동의 진원이자 그 자체라고 하는 지능이 더 이상 인간 고유의 식별표식이 될 수 없다 는 증거들이 나오면서 이제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파국을 향해가 는 형국이다. 한동안 풍문처럼 흘려듣곤 했던 무서운 이야기는 그러 나, 믿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현실세계에 발을 디뎌놓았다. 그것은 예 정시각보다 훨씬 일찍 플랫폼에 도착해버린 기관차처럼 어리둥절함 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2. 2016년 3월 9일 13시. 어쩌면 그 시각은 인류 문명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순간으로 기록될지 모르겠다. 그동안 낭만적 으로 예견해보곤 했던 인공지능 시대를 체감 현실로 본격화한 순간 이기 때문이다.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알파고AlphaGo의 첫 대국은 말 그대로 세기의 관심을 끌었고, 대국을 앞두고 전문가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결과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들 은 인간적 여유와 인간적 우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예 기치 않게(?) 알파고의 승리로 대국은 끝났고, 바로 그 시점에서 우 리들은 인간의 인간적 의미를 새삼 짚어볼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세간에서는 SF영화를 떠올리며 인류 종말을 성급하게 예견하였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인공지능 개발의 윤리성을 강하게 내비치기도 했다. 더러는 헤겔의 변증법을 들먹이며 주인(인간)―노예(알파고)의 역전된 현상을 역사발전의 필연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다양한 분야 에서 분분한 견해들이 쏟아졌고, 분석했고, 결과를 예측했지만, 정 작 인공지능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에는 회의적인 것 같다. 영국 옥 스퍼드 대학에서 강한 인공지능―약한 인공지능이 코딩된 명령체계 에 복종하는 차원에서의 지능이라면, 강한 인공지능은 보다 진화된 형식의 인공지능으로 인간과 유사한 차원에서의 자기주체성을 확보 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의 출현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양한 경로로 시뮬레이션을 했는데, 그 결과는 충격을 넘어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최종적인 결과는 인류의 멸망으 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든 지금, 우리 인간은 붕괴해가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도 인간적 모멸감이 차오 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인간은, 왜, 자꾸, 그러는 걸까? 여기 서 ‘그러는’ 행위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 로 인공지능의 시대를 예견(?)해 낸 데카르트의 명제를 그 자리에 넣 어보고 싶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일찍이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구축하고 인간의 사유 활 동을 존재 증명의 유일한 근거로 삼으면서부터 지능의 문제는 잠재 적으로 존재를 불안하게 할 촉매로 남아 있었다. 사유―존재의 구도 는 우리들에게 전지구적 차원에서 다른 존재들을 제치고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했다. 인간은 고대의 자연법칙 시대를 극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성의 시대를 개척하였고, 중세 신들의 세계를 근대의 과학적·합리적 세계관으로 전환해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연장선 에서 인간 스스로 신의 영역에 닿고자 한다. 그 가시적 성과가 인간 존재의 유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능을 인공적으로 창조해 낸 것 이다.

   인간의 인공지능 개발은 창조신화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 는 ‘닮음’이라는 매개가 놓여 있다. 신화시대에 창조자가 자신을 닮 은 인간을 창조해낸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그러한 방식으로 인공의 지능을 개발하고 있다. 이 ‘닮음’의 담론은 알다시피 원본과 사본 간 의 거센 투쟁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바벨탑 이야기가 신화시 대에 벌어진 원본―사본 간의 투쟁이라면, 장차 인간지능-인공지능 간의 투쟁도 충분히 예측해볼 수 있다.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 결과를 우리는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어쩌면 미래로부터 ‘불 안’이라는 기관차가 너무 일찍 현재의 플랫폼에 도착해버린 건 아닌 가 생각한다.

   그런데 ‘불안’이라는 기관차에서 플랫폼에 발을 딛는 것은 호모 페 이션스Homo patience(고민하는 인간)다. 미래로부터 그가 우리 시대에 도래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고민하는 인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아 우슈비츠로부터 인간의 인간성을 목격한 후, 빅터 프랭클이 인간적 불안을 고민하는 인간으로 대체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호모 페이션스는 인간적 불안을 기저감각으로 지녔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인간이 현세기에 이르러 고민 하는 인간으로 개종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개종을 강요하는 것 은 역설적이게도 사유하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다. 인간 지능의 한 계를 실험하고자 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노력들은 창조자처럼 행세 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에 포섭되었다. 그리하 여 새로운 그러나 불완전한 세계는 우리들에게 불안을 미리 끌어다 주었고,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자긍심에 조금씩 균열을 발생시켰다. 이 균열을 보수하기 위한 대안으로 호모 페이션스가 긴급하게 호출 된 형국이다.

  




칡넝쿨 걷어낸 둬뙈기를 둘러보는데
밭의 경계 삼은 왕돌 그늘에 배 깔고
입을 쩍쩍 벌리는 까치독사 한 마리
다 가까이 오면 독 묻은 이빨로
숨통을 물어뜯어버리겠다는 듯이
뒤로 물러설 줄도 모르고 내 낌새를 살핀다
누군가에게 되알지게 얻어터져
창자가 밖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데
꺼낸 무기라고는 게 기껏 제 목숨뿐인 저것이
네 일만은 아닌 것 같은 저것이
저만치 물러난 산그늘처럼 무겁다
                                                                              ―이병초,「 까치독사」 전문



   이 시에는 고민하는 인간의 전형이 제시되어 있다. 그가 바라보는 “까치독사”는 “누군가에게 되알지게 얻어터져/창자가 밖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 존재 상실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 경우 사유하는 인간이 라면 “까치독사”의 존재 위기를 담론 삼아 그것의 의의, 예컨대 생명 의 소중함이라거나 뱀의 신화적 의미 혹은 맹독의 치명성 등을 밝혀 나가겠지만, 고민하는 인간의 경우에는 “까치독사”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고, 그것이 “네 일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상황의 전이를 경험한 다. 나아가 결정적으로 “까치독사”와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는 각자 의 층위에서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에 이른다. 그리 하여 “저만치 물러난 산그늘”이 “까치독사”와 화자가 서로 작용하는 시간(그늘)과 공간(산)으로서의 삶이라는 전체성을 드러낸다. 이 시에 서 “까치독사”와 화자의 전체성은 “무겁다”는 것으로 비유되는 삶의 비의秘意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민하는 인간이란 누구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분명하게 해두어야 하는 것은 ‘사유’와 ‘고민’의 서로 다른 기능이다. 그 것은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페이션스의 구분이기도 하다. 기본적으 로 데카르트의 명제에서 비롯된 호모 사피엔스는 사유 활동을 개인 존재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사유화私有化된 사유思惟, 다시 말해 자기존재의 사유이다. 반면 호모 페이션스는 타자의 처지와 운명에 공감하고자 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모 페 이션스에게 ‘나’는 자기로서의 ‘나’가 아니라 ‘너’에 대한 관계로서의 ‘나’가 되고, 반대로 ‘너’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나’와 소통하는 차원에서의 ‘너’가 된다. 호모 사피엔스가 ‘존재하기’를 목적으로 삼 는다면 호모 페이션스는 ‘관계하기’를 삶의 동력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3. 고민하는 인간의 출현으로 우리는 조금 복잡한 지능의 지형도를 그리게 되었다. 우선 사유하는 인간의 지능intelligence이 있고, 그들 이 창조해낸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있다. 여기에 고민하는 인 간의 지능이 더해져야 한다. 그 지능을 어떻게 불러야할지는 모르지 만, 고민하는 지능은 감각작용+지능의 총합이 부분의 합을 넘어서 는 전체성으로서의 지능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유하는 지능이나 인 공지능과는 다른 종류의 지능이다. 사유하는 지능이 감각정보를 합 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종합하여 처리하는 과정에서 감각의 역할을 의심하고 배제하고 있다면, 고민하는 지능은 그러한 감각경 험의 특수한 구체들을 예민하게 고려하는 지능이다. 이는 인간은 사 유하는 지능으로는 규정하기 어려운 섬세한 감각이 있다는 점을 인 정하고, 그러한 섬세한 감각들이 지능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지능 과 협력하면서 유기체적 자기충족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또 하나, 알파고의 사례를 통해서도 우리가 목격한 내용이지만, 인공지능은 어떠한 경우라도 자기존재의 이익에 충실하며 자기진리에 만 복무하는 특성이 있다. 이 같은 목표 중심의 지능은 배타적 속성 을 지닌다. ‘나’의 목적 이외에는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어떤 것으 로부터도 영향 받지 않는다. 이세돌 9단이 대국 과정에서 어려움을 토로했던 것 가운데 하나로 알파고가 지능 외에는 어떤 것도 드러내 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감각의 미묘한 작용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다 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비인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 떤 의미에서 보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취조 형식과 다름없었 다. 알파고에게 이세돌은 마치 피의자처럼 날것으로 노출되었고, 알 파고는 강하게 쏘아대는 불빛 저편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 같은 비대칭적이고 일방적인 구도 속에서 건져낸 1승은 분명 인 간의 인간성, 좀 더 분명히 말해서 고민하는 인간의 인간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고민하는 인간 이세돌이 대국 후에 무엇을 했는 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복기하기’였다. 상황이 끝난 후에 첫 수부터 마지막 수까지 그대로 따라가면서 상황을 분석하는 일은 부 분과 전체의 관계를 짚어가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각각의 수가 물 리적인 총합을 넘어 전체성을 지향한다는 바둑과 단순한 낱말의 결 합, 시행의 배열 너머의 이야기라는 서정시는 닮았다. 서정시란 극 도로 단순하게 말하자면 감각체험의 정서적 재배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기하기’는 서정시의 핵심적인 작동 원리 중 하나가 된다. 이 복기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고민하는 인간의 한 전형을 확인할 수 있다.
  



비 온 뒤끝, 꽃잎 떨어져
담쟁이에 장미꽃이 피었다
사진 한 장 못 박고 넘어갔다

단속 카메라 위에 얹힌 눈이 미끄러져 내리면서
렌즈를 덮고 있었다 휘인 눈은 아직도 미끄러지고 있다
키스 한번 못한 첫사랑이 여태
담장의 덩굴장미처럼 두근거리고 있다
(……)
그 별이 늘 그 자리에 뜨듯
흐르나 정지된 것들 걸리는 것들
현상은 하지 못 하는 것들
촉이 생긴 것들이 있다 크헝크헝
꿩처럼 울면서 메주콩 같은 눈물을 흘리던,
가슴에 들어 관솔이 된,
현상불가의 것들도 있기는,
있는 것이다
                                                                                   ―윤관영,「 것들, 지나가다」 부분



   고민하는 인간은 늘 복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불가의 것들” 이다. 세상에는 상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는 불가항력의 사건들이 존재한다. 고민하는 인간들은 실체가 모호 한 것들을 통해 계통적인 기억과 환유적인 체험들을 넓혀간다. 그 방식이란 “흐르거나 정지된 것들 걸리는 것들/현상은 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촉”을 세워 감각하는 것이다. “촉”은 논리적으로는 설 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담쟁이에 장미꽃이 피 었”어도 “사진 한 장 못 박고 넘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진 을 찍는 행위는 사건을 감각하고 그것을 명백한 사건으로 기록하는 일이다. 따라서 “눈이 미끄러져 내리면서/렌즈를 덮고 있었다”는 진 술은 사건의 기록을 유보하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사건의 논리적 인 과를 덮어버리는 일이다.

   이처럼 논리적으로 해명 불가능한 시의 세계를 사유하는 인간은 논리적·합리적 질서로 치환해내고자 노력해왔다. 그것은 일종의 권력 행사였다. 모든 사건들을 자기 통제의 그늘에 두고, 그것들을 특정한 기준에 따라 질서화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이 아니고 무엇이 겠는가. 특히 인공지능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결 코 네트워크를 확장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유하는 인간의 지능이나 인공지능은 자기를 중심에 두고 타자를 외부에 두는 중앙 집권적 사유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알파고의 등장은 엄밀 한 의미에서 새로운 사유 형태가 아닐 수 있다. 오랫동안 우리 삶의 통제관 역할을 해왔던 사유하는 욕망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는 일 이다.

   그렇더라도 인공지능의 실체는 인간의 인간성을 각성하게 만든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인공지능을 통해 고민하는 인간을 발견한 것 은 사유하는 인간의 시대에 작별을 고하는 결정적 장면인지도 모른 다. 그것은 원시자연의 시대―그리스 철학의 시대―중세 신의 시대 ―근대 이성의 시대를 거쳐 온 인간의 문명사적 전개가 또 다른 변 곡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로도 읽힌다. 인류는 역사의 변곡 점마다 세계관에 큰 폭의 변화를 만들어왔고 세계관의 변화는 문학 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인공지능의 등장 은 새로운 문학적 자세와 세계관을 요구할 것이다.

   이제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갈 삶과 문학의 대안적 세계관은 무엇 이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인공지능이 사유하는 인간의 지능에서 비롯되었고, 인공지능의 능력 가중치가 월등하긴 하지만, 많은 면에서 서로 닮았다는 점에서 고민하는 인간의 지능은 새로운 세계 인식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고민하는 인간은 홀 로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더불어 관계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단독주체가 아니라 서로주체이기 때문에 고민하는 인간은 인간의 인간성을 전체성의 차원에서 실현해내는 존재가 된다. 고민이란 대 상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감각과 사유의 총합으로서의 전체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의 시대에 시는 호모 사피엔스가 누렸던 고독 한 시선의 권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나’의 시가 아니라 ‘우리’의 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고민이란 언제나 ‘나/너’의 문제에서 ‘우 리’의 문제로 나아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바 있는 ‘매혹의 복수형’이다. 그동안의 서정시가 ‘고독한 단수 형’으로서 발화자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고민하는 인간이 누벼할 시의 세계는 ‘나’ 아닌 ‘우리’의 삶을 건드리 는 복수형의 매혹에 도전해야 한다. 그것은 읽는 자이면서 쓰는 자, 즉 고민하는 인간의 세계이다. 그럴 때 고민하는 시/시인, 쓰면서 읽 고 읽으면서 쓰는, 다시 말해 작가이자 독자인 시인들의 활약을 기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약력: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시),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문학평 론)로 등단. 시집『 물가죽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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