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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특집/인공지능 시대의 시/장이지/인공지능 시대의 시 쓰기와 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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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의 시
장이지
인공지능 시대의 시 쓰기와 인간성
1. 프롤로그 : 인공지능 시대의 삽화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에서 컴퓨터를 매개로 하여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 못한다. 그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신상정보를 고의로 왜곡하여 말한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이상 상대는 그 정 보가 가짜라는 것을 확인할 길이 마땅히 없다. 상대가 남자인지 여 자인지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심지어 상대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1) 인간이 아닌 기계와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가. 그것이 가 능하다는 것을 인공지능의 시대는 입증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 기에는 어떤 기묘한 생략이 전제되어 있다. 상대의 성별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의 인간적인 특질이 이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결락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락되어 있는 것은 단지 성별에 관한 정보만은 아니다. 훨씬 많은 결락이 여기에는 개재되어 있다.
1)이것은 인공지능 연구의 시발이 된 앨런 튜링의 1950년대 실험을 간략하게 정리 한 것임을 밝혀둔다(N. Katherine Hayles, “Prologue”, How we became posthuman, The University of Chicago & London, 1999, pp. ⅹⅰ~ⅹⅱ)
비교적 간단한 프로그램이지만 ‘엘리자’라는 것이 있다. 누구나가 ‘엘리자 사이트’에 접속하여 ‘엘리자’와 대화할 수 있다. 복잡한 질문 에는 엉뚱한 대답을 하지만, 간단한 질문에는 제법 그럴 듯한 답을 내놓기도 한다. 우울하다고 하면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아마도 ‘엘리 자’는 상대의 발화에서 특정한 단어에 특정한 방식으로 대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일 터이다. ‘엘리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다. ‘엘 리자’는 표정도 목소리도 없으며 위로의 징표로 발화자의 어깨에 손 을 얹어주지도 않는다. ‘엘리자’의 위로는 왠지 공허감을 증폭시킨다.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다. 데즈카 오사무手塚虫가 고안해낸 ‘아톰 소년’이 떠오른다. 그는 인간 소년― 박사의 죽은 아들―의 ‘대체’로서 실험실에서 탄생한다.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의 모습을 본떠 그를 만들어낸 박사는 그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용품’일 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한다. 소년은 성 장하지 않는다. 박사는 소년을 외면한다. 소년도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로봇은 성장할 수 없지만, 성장을 꿈꾼다. 이것 이 이른바 ‘아톰의 명제’다.2) 이것은 물론 만화 속 이야기지만, 로봇 이 자의식을 갖는다고 하는 상상력은 이제 일소에 부칠 수 없는 단 계에까지 와 있다.
인공지능 기술의 진전은 상상을 초월한다. 로봇이 인간의 영역을 조금씩 잠식해간다. 얼마 전 일본에서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쓴 소 설이 문학상 예심을 통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 이틀 차이를 두 고 인공지능이 넘보기 힘든 영역의 하나로 ‘문학’이 꼽혔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논란이 있지만, 문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이 인공지능을 위협적인 존재로 느끼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2) 오쓰카 에이지, 선정우 옮김,「 인조인간으로 태어나―아톰의 명제」,『 이야기의 명 제』, 북바이북, 2015. 51쪽.
2.‘ 단어의 배열로서의 시’를 흉내 내기 인공지능이 문학작품을 쓸 수 있을까. 브리크Osip Brik는『 예브게 니 오네긴』은 푸시킨이 아니었다고 해도 누군가 썼을 작품이라고 하 여 세계를 경악케 한 바 있다.3) 작품이 작가정신의 소산이라기보다 는 언어의 특수한 조직, 다시 말해 단어들의 배열이라고 보는 형식 주의의 한 극단에서 한 언급이다. 모든 형식주의자들이 이 견해에 동의할 것 같지는 않다. 문학작품이 궁극적으로는 단어들의 배열이 라고 해도, 단어의 선택과 배열에는 작가의 개성이 개입한다. 그렇 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예브게니 오네긴』을 푸시킨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쓸 수 있었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과한 느낌을 주지만, 인 공지능이 어떤 멋진 작품도 쓸 수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이다. 아직 그것이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아닐지라도 ‘단어들의 선택과 배열’ 상의 일정한 시적 원리를 프로그래밍 할 수 있다면, 인 공지능이 한 편의 그럴 듯한 시를 쓰지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것 이 ‘멋진 작품’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쓴 시는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시를 읽어보는 것도 우 리의 논의를 위해 전혀 의미가 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처음에 나는 당신의 왼쪽 눈 시력이었어요 시월이 되자 나는 아침기온
이 되었고 당신의 샤프심 굵기가 되어 매일 같이 학교에 갔죠 첫 눈이 오
던 날, 나는 강설량이 되었고 생물시간에는 페하나 소금물 농도로 둔갑했
어요 다이어트를 시작한 당신, 나를 저칼로리라고 부르다가 하루치 감량
체중으로 설정했지요 어느 날부턴가 당신은 나를 당신의 남자친구로 임명
했고 커플링 무게가 된 나는 당신의 약지에 의지하며 겨울을 났죠 당신의
고삼 시절은 내가 가장 바쁜 시기이기도 했어요 표준편차가 되었다 sinA
의 값이 되었다 정신없었거든요 졸업시즌엔 전광판의 대학 경쟁률이 되어
밤새 껌뻑거렸어요 대학에 들어가 플라톤을 배운 당신, 나를 덜 존재한다
고 업신여겼죠 나는 당신의 구 버전 소프트웨어가 되어 책상서랍에 처박
혔어요 그러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당신은 나를 본격적으로 잊어버렸죠
내가 없이도 세상을 부를 수 있게 된 거예요 현재완료였던 나는 일순 대과
거로 까마득해졌죠 이제 렌즈를 낀 당신은 사월의 찬바람을 맞고도 나를
떠올리지 못해요 만년필을 쓰는 당신, 샤프심이 끊어질까 위태로웠던 순
간들을 기억이나 할까요 눈이 내리면 당신은 눈만 봐요 눈이 얼마나 내렸
는지는 안중에도 없고요 남자친구와 이별한 날, 당신은 약지에서 나를 빼
내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렸죠 그리고 반쪽을 잃은 마음고생으로 살이 빠
지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새벽, 비로소 나는 당신의 몸뚱이에서 완전히 분
해되었죠 가뿐해진 거, 당신도 느끼나요? 이제 나는 당신이 없는 곳으로
떠나려고요 홀로 존재하기 위해서 말예요
―오은,「 0.5」전문
3) 테리 이글턴, 김명환 외 공역,「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론입문』, 창작과비평 사, 1986, 9~10쪽.
오은의 이 멋진 시를 인공지능이 당장 쓸 수 있으리라고 말할 만큼 내가 무모한 것은 아니다. 이 시는 ‘0.5’라는 수치와 인접해 있는―연 상 관계에 놓여 있는―어휘들, 이를 테면 ‘시력’, ‘굵기’, ‘강설량’, ‘농 도’ 등과 같은 어휘들을 배열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이 배열의 순 서가 조금 뒤바뀐다고 해도 시가 성립할 수 있어 보인다. 이 주요어 휘들 사이의 관계는 병렬적이며 순서는 전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해도 부분적으로는 자의적이다. 그리고 ‘-요’가 붙은 사적이 고 내밀한 톤tone이 이러한 배열을 감싸고 있다. 마지막의 “이제 나 는 당신이 없는 곳으로 떠나려고요 홀로 존재하기 위해서 말예요”라는 구절 직전까지의 배열과 어조에는 일정한 ‘패턴’이 발견된다. 그 리고 그 ‘패턴’은 지금 설명한 대로이다. ‘패턴’이 있고, 그것을 논리 적인 언어로 정리할 수 있다면, 이것을 프로그램의 언어로 변환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 시 마지막의 정서적인 언어를 인 공지능이 결구로 택하여 쓸 수 있으리라고 말할 생각이 내게는 전혀 없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인공지능이 시의 패턴을 흉내 낼 수 있다 는 점이다.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덧붙이는 말이지만, 오은의 이 ‘패턴 화’로 요약할 수 있는 시작상의 기교는 그 나름대로의 고유성이 있으 며, 언어의 과도한 변형과 과잉 감정이 크게 유행한 2000년대 시의 흐름 속에서 그에 편승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간 시대적인 의의도 없 지 않다. 인공지능이 오은의 시를 다소 흉내 낼 수 있다고 해서 그의 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3. 인간성, 정서적인 것의 개입으로서 시 쓰기 인공지능4)이 시를 쓴다면 제법 좋은 시를 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한 느낌은 오은의 시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더 강화된 셈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 시를 쓴다면 너저분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 을 것 같다. 시상의 전개에 있어서도 일관성이 어긋난다거나 근본비 교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프로그래밍이 훌륭하다면 어 법에 잘 맞는 시를 쓸 것이고 편집자는 다소 느긋한 기분으로 교정 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의미의 차원뿐 아니라 시의 ‘결 texture’에 있어서도 나름의 맛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상회화 에서 쓰지 않는 한자어를 자주 섞어가면서 시를 쓸 수도 있고, 잠언과 같은 형식을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분위기를 만들어 볼 수도 있 다. 시의 결을 잘 살리지 못하는 사이비 시인들은 인공지능에게도 밀릴지 모른다. 그리고 더 열심히 써야겠다고 수건으로 머리를 싸맬 수도 있다.
4)인공지능은 통사론적으로, 의미론적으로 유사성을 띠는 어휘들의 집합―로만 야 콥슨R. Jakobson이 인간의 발화 기제를 설명하면서 말한 것처럼―을 데이터베이스 로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 중에서 일상에서 쓰는 빈도가 높거나 낮은 어휘를 선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즐거운 상상의 한편에는 ‘엘리자’나 ‘성장하지 못하 는 아톰’이 환기하는 공허감이 존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인공지 능이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 시의 결까지를 그럴 듯하게 흉내 낸다고 해도 역시 그것은 고유성으로 굳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인공지 능이 강정이나 조연호처럼 쓸 수 있다고 해도, 그리고 오은처럼 쓸 수 있다고 해도, 오히려 그 ‘쓸 수 있음의 넘침[過剩]’으로 인해, 그것은 강 정이나 조연호, 혹은 오은과 같은 개성적인 존재는 될 수 없을 것이 다. 우리는 모든 것을 쓸 수 있는 초월적 능력을 갖춘 단 하나의 프로 그램이 아니라 겨우 하나의 톤으로밖에 쓰지 못한다고 해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꾼, 가인歌人 들을 기다려 왔다. 물론 이제 그러한 이야기꾼이나 가인 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을 대신하여 인공지능이 그 자리를 채우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결하고 있는 것은 인간성 그 자체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 논의의 본질이다.
꿈속에서 밝혀놓은 촛불이 다 타 버리자 해가 떴다 기도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떨어진 달처럼 무거운 마음 내가 한번도 가진 적 없는 마음이 내
정수리 위에 비행접시처럼 떠 있다 그 그림자는 잠시 지구를 덮고 정수리
속으로 서서히 내려앉는다, 가라앉는다 뇌수를 고요히 헤집자 온갖 기억
이 새떼처럼 날아오른다 코끝을 스치자 물양동이 같은 얼굴 속에 그득했
던 눈물이 출렁이며 넘친다 목구멍을 꺽꺽 긁으며 내려가다가 멀미처럼
울컥 솟구치는 마음 다시 기도를 막으며 가라앉는 마음 지구 반대편 하늘
까지 뻥 뚫린 우물 속에 물양동이처럼 던져진 마음 무릎을 꺾고 발등을 찧
는 돌처럼 무거운 마음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연루됐을 때 온몸이 다 녹아
줄줄 흘러내리고 있을 때 깊은 밤이 뻗은 힘센 팔이 나를 포옹하듯 꿈속으
로 잠깐 끌어당기고, 꿈속에서야 나는 겨우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
고 꿈밖에선 어떤 말도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눈코입귀 흔들리는 꽃잎
처럼 떨어지는 마음 꽃잎 없는 꽃처럼 무거운 마음 마음이 걷다가 빠진다
는 구름의 크레바스 틈새로 후두둑 꽃잎처럼 빨려드는 마음 돌처럼 무거
운 질량의 마음 하늘까지 뚝 떨어진 마음 내 발목에 매달려 걸을 때마다
모래 위로 끌리는 마음 날 매달고 바닷속에 산 채로 던져진 마음
온몸이 통째로 마음이 되던 날
찬바람이 붙여놓고 간 촛불로도 밝힐 수 없는 몸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몸
―김중일,「 꽃처럼 무거운」전문
육친의 죽음을 노래한 김중일의 시에는 열 개 이상의 ‘직유’가 연 달아 배열되어 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유사성이 있어야 한 다는 원리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면 인공지능은 그것이 가지고 있 는 데이터들을 참고하여 여러 개의 직유를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역시 “물양동이 같은 얼굴 속에 그득했던 눈물”과 같은 확장된 형태의 복잡한 비유를 인공지능으로서는 쉽게 만들지 못할 지도 모른다. 독창적이면 독창적일수록,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인공 지능의 한계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시의 저변에 흐르는 정서적인 것, 이 시에도 여러 번 반복되어 되새겨지고 있는 ‘마음’과 ‘몸’의 관계다. “온몸이 통째로 마음”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특별한 ‘체험의 정서화’에는 인공지능으로 흉내 내기 어려운 진실성이 있다. 이 시가 만약 좋은 시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공지능이 흉내 낼 수 없는 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정서적 진실성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학에서 ‘육친의 죽음’은 자주 쓰이는 소재이고, 그것은 그 나름대 로의 데이터베이스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일종의 ‘매뉴얼’로 추출할 만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물’과 같은 직접적인 어휘뿐 아니라 모종의 상관물들을 동원할 수 도 있다. 인공지능까지 갈 것도 없이 시인들 중에는 이러한 ‘매뉴얼’ 을 은연중에 쓰고 있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것은 특정한 코 드에 익숙해진, 길들여진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뉴얼로 굳어진 표현은 독자들의 정서적 공감을 반감시킨다. 매뉴얼을 뚫고 나오는 특별한 체험이 독자들을 정서적으로 뒤흔든다. 나는 기이한 체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겪는 일이라도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인지한다면, 그것은 특별한 체험이 되는 것이다. 인간성이 끼어드는 지점도 바로 그 언저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4. 에필로그 : 예술과 실패 나는 바둑을 잘 두지 못한다. 은사님들의 대국을 어깨 너머로 보 고 ‘줄바둑’이란 것을 두게끔 된 것도 채 몇 년이 되지 않는다. 바둑 채널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일부러 챙겨보거나 하지는 않는 다. 이세돌이라는 기사棋士는 뉴스에서 더러 본 적이 있지만 그 기사 로서의 이력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 국이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지만 나는 짐짓 이 대결 소식에 대해 신 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세인들의 관심을 끌수록 나는 더 이 대결 을 외면하려고 했다. 인공지능이니 하는 최신 테크놀로지 쪽을 쭈뼛 거리며 기웃거리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문 득 이 세기적인 대국의 소식이 궁금해 슬며시 스마트폰을 열어보았 다. 결과는 이세돌의 ‘대패’였다. 나는 그가 조금 좋아졌다. 그가 “바둑은 예술”이며 승패를 초월한 것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우리의 시 詩도 그렇다고 혼자서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나 내 그 중얼거림은 이 세돌의 사자후와 같은 일갈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내 중얼거림에는 인공지능과 같은 최신 테크놀로지의 위협 끝에 몰린 자의 절박함이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시를 위협하리라고 나는 진지하게 믿지 않는다. 인공 지능과 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쩌면 유행에 휩쓸리는 것이 될는지 도 모른다. 나는 그 점에 대해 걱정한다. 이러한 태도가 어떤 ‘아우 라’를 고집하는 귀족주의적인 것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다. 이 기술복제의 시대에 말이다.
그러나 나는 예술이란 승패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는 저 젊은 기사의 말에 아주 오랜 만에 가슴 벅참을 느꼈다. 결국 최후의 승자 는 테크놀로지 쪽이 될지 모른다. 인공지능이 구현한 시는 제법 멋 진 것이 되리라는 예감도 없지 않다. 어떤 영역에서는 그것이 인간 이 구현한 것보다 실수가 적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가 시를 내려놓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우리가 구현한 시가 인공지능의 그것에 비해 볼품이 없는 것일지라도 우리 는 시를 쓰는 동안 전율을 느낄 것이고 몸살이 날 것이며, 그리고 또 그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월평 에서 못 쓴 시라고 지적을 받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다. 못 쓴 시를 못 썼다고 말하기 힘들어할 필요가 없다. 시에 대한 가치 평가 는 결국 구현된 시를 놓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평가는 시를 쓰는 과정이나 시를 쓴 사람 자신까지를 해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결 국’ 실패하게 되어 있다. 영감은 영속되지 않으며, 육체는 쇠잔해진 다. 누구나가 이 ‘실패’를 안고 시를 쓰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이 말 의 함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약력:2000년《 현대문학》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라플란드 우체국』, 평론집으로『 환대의 공간』,『 콘텐츠의 사회 학』등이 있음. 제주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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