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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추모특집/이가림 시인 타계 1주기/이경림/우리들의 가림스키, 이가림 시인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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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특집
이경림
우리들의 가림스키, 이가림 시인을 추억하며
시작도 끝도 없다는 그 투명한 수레바퀴의 회전을 따라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지 벌써 일 년이 되었다. 사실 나는 아직 추모사라는 말로 그 분과 이녁의 시간을 구분 지을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는지도 모른다. 작년에도 같은 제목의 청탁을 받은 바 있지만 정중히 사양 했었다. 생각해 보니 선생과 한 십여 년 이웃에 살았다는 사실 빼고 는 그 분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인 이라고 꼭 문학을 매개로 만나고 친분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문학 쪽에서 전혀 연계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 지도 모른다.
내게 그 분과의 만남은 다른 문인들과는 좀 다르게 왔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단지 일 년도 못된 어느 날 우연 한 기회에 인천에 살던 선배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아는 사람이라 곤 없던 인천에서 시를 쓰는 선배를 만난 것은 내게 많은 위로를 주 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 분은 한 친구를 만나는데 같이 가자하며 아 주 좋은 친구라고, 주저하는 나의 손을 끌었다. 햇빛이 눈을 찌르는 여름, 제물포 어느 길모퉁이에서 나는 김원옥이라는 이름의 한 여인 을 만났다. 그 분은 온가족이 함께 갔던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채 자리가 잡히지 않은 상태라고 선배는 말했다. 놀 라웠던 것은 그 분의 남편이『 불의 미학』을 번역한 이가림 선생이란 사실이었다. 그 후 우리는 이상하게 마음이 맞아 마치 오래 알고지 낸 지기처럼 자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하고 월미도나 연안부두 같은 곳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상당기간을 나는 선생은 만나지 못한 채 그의 부인과 자매 같은 친구가 되어갔다. 인천에 별 연고가 없다는 공통점이 끈끈한 우정같은 것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상하게 나는 그 분이 마치 혈육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자연스레 우 리는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시시콜콜 생활을 이야기하고 어려운 가 계에 대해 걱정하고 소싯적 연애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 성적을 걱정 하며 팍팍한 현실을 견디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가림 선생을 언제 어디서 처음 뵙게 되었는지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그런 과 정에서 선생의 댁이나 부인과 동행한 동네 골목에서 퇴근하는 선생 을 만나 ‘우리 남편이야’ 하는 부인의 소게를 받고 엉겁결에 인사를 나누었기 때문일 것 같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선생과는 작가회의나 시인협회 모임 등에서 만나 뒷 풀이 자리에도 함께 하며 자연스레 가까워졌지만 그 때마다 마치 형 부를 단체 모임에서 만난 듯 어색했다.
그 분을 만나기 전에 그 분의 역서『 불의미학』과『 물과 꿈』을 읽 었고 그 분의 시집『 빙하기』를 읽으며 그분의 깊은 사유와 학문적 깊이를 존경했지만 실재 이웃인 이가림 선생과 잘 매치가 되지 않았 다. 내게는 그 분이 고매한 불문학자이며 문단의 중진이고 한 대학의 학장이고 하는 사회적 지위보다 김장 날 속을 체워 넣은 김치가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 김장독에 차곡차곡 넣어 주던 한 여인의 따뜻한 남편으로 더 기억에 남는다. 사랑스런 두 딸에게는 지적이며 자상한 친구 같은 아버지로 더 기억에 남는다. 연안부두 벤뎅이 회집에서 회 무침을 먹으며 껄껄 웃던 자연인 이가림 선생이 더 애틋하게 남는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 분과 한 번도 시에 대해, 문학에 대해, 혹은 그 분의 전공인 프랑스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 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내가 그 분께 안고 있는 일말의 섭섭함인 지도 모른다. 문학적으로 나는 다만 그 분이 부쳐주신 몇 권의 시집 들과『 불의 미학』『 물과 꿈』 등의 역서들과 에세이집을 읽고 그 분 의 작품세계를 짐작하는 독자에 불과했다. 공식적으로는 인천작가 회의를 결성할 때 박영근 시인과 함께 몇 차례 인하대에서 선생을 만 났고 선생이 초대 회장을 맡으셨다가 학장 승진 때문에 잠시 그 자리 를 내게 물려주신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작가회의 발기식 날 뒤풀 이에서 ‘빛과 그림자’를 멋들어지게 열창하시던 모습도 생각난다. 원 주 토지문학관에서 있었던 작가회의 모임 때 맛있는 올갱이 된장국 집을 찾아 어느 허름한 뒷골목을 걸으며, ‘
‘맛집은 솥을 보면 알지.’
하며 장난스레 유리 안을 들여다보시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그날 선생이 부르던 노래 ‘부용산’……. ‘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 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온몸으로 토해내던 애끓는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그때 우리는
마치 그의 돌올한 역서인『 불꽃의 미학』의 한 구절처럼 ‘꽃피는 나무의 타는 듯한 폭발을’ 보는 듯하여 이상한 환희 속으로 이끌려 들기 도 했다.
사람의 生은 재는 잣대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녁에서 선생은 한 대학의 학장을 지내시고 많은 상을 타시고 여러 권의 책을 내시고 프랑스의 유수한 대학에 유학을 하시고 최고의 학자가 되셨 으니 누가 어떤 잣대를 들이대도 성공한 생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 러나 나는 그런 사회적 잣대도 중요하지만 직위보다 앞서는 인격을 가진 분이어서 성공한 생이라 말하고 싶다. 옛 속담에 ‘밤에 봐도 양 반’ 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 선생이셨다. 그 분이 말을 앞세우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시인에게나 학생에게 나 일반인에게나 청소부에게나 그 분은 똑같이 겸손하셨다. 무명의 신인들과 어울려 뒷풀이를 할 때에도 그 분은 스스럼없이 친구처럼 대하셨다. 그래서 자연히 많은 후배시인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우리 들의 가림스키’라는 애칭까지 얻으셨다. 베이지색 버버리 코트가 잘 어울리는 프랑스 신사, 고뇌어린 지식인, 고독, 낭만, 선한 웃음……. 그런 이미지들이 선생을 아는 분들의 기억 속에 있는 공통된 이미지 들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거짓말처럼, 우리들의 가림스키를 빼앗아 갔다.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겨를도 없이 진행되는 이 불가사의가 우리들 의 운명이며 실체다. 마치 어느 오후 퇴근길에 우연히 그러나 기적 처럼 만나 인사를 하고 몇 십 년 이웃으로 지내다 어느 날 훌쩍 사라 져 소식한 자 없는 이웃집 오라버니같이.
가만히 그의 절창인「 석류」를 읊어보며 우리들의 가림스키, 그 어지러운 충만의 속을 기웃거려 본다.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 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이가림 「 석류」
**약력:1989년《 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 그 곳에도 사거 리는 있다』,『 시절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내 몸 속에 푸른 호랑이 가 있다』 시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비평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한국문학 번역원 선정 영어 권 번역시집『 A New Season Approaching, Devour it』. 지리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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