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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추모특집/이가림 시인 타계 1주기/이가림 시인의 병상시/잊혀질 권리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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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472회 작성일 16-12-31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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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특집

이가림 시인의 병상시





잊혀질 권리




어린 날

물수제비뜨기의

가뭇없이 가라앉은

조약돌인 듯



후미진 마을의 오두막

홀로 조는

등잔불인 듯



캄캄한 밤

으악새 우거진 골에

떨어진

한 조각 운석인 듯



모래 이불 밑에

몰래 숨은

한 마리 모래무치인 듯



촉촉한 흙에 반쯤 묻힌 보리씨인 듯
나 그렇게



없어진 있음으로

조용히 지워지고 싶어




죄값



사는 동안
하도 많은 죄를 지어서
그 죄값이 얼마인지
나는 모른다



남의 밥통을 몰래
가로챈 죄,
남의 생각을 내 것인 양
슬그머니 둔갑시켜
팔아먹은 죄.
자정 넘어 술에 취해
남의 집 대문에
오줌을 갈긴 죄,
거리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숱한 여자를
눈으로 간음한 죄,



신부님한테조차
반쯤만 사실대로 털어놓고
나머지는 거짓말로 꾸며
고백한 죄……



이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를 짓는 일이라기에
수없이 시를 지어 발표했는데



그 역시
곧장 갈 수 있는 진실의 지름길을
아리송한 말을 늘어놓아
헷갈리게 한 셈이니



이 많은 죄값을
어찌 갚을 것인지



혹시
그럴 수 있다면,
다음 세상에 가서
프랑시스 잠의 당나귀가 되어
투르네 마을 농부들의 짐을
평생토록 저나르는 것으로
빚을 갚았으면 한다





투병통신投甁通信·3



나는 여태껏
한 숟가락의 물도
당신의 마른 입에
떠먹여주지 못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떠먹여주고 싶은
한 숟가락의 물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먼 훗날
한 숟가락의 물을 겨우 얻게 된 날
내가 당신에게로 가는 외길이
이미 끊어져버렸을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한 숟가락의 물을 마련하려고
달 없는 고비 사막보다
더 숨 막히는 밤길을
등뼈에 공이가 박힌
한 마리 낙타처럼 걸어왔습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영롱한 보석
몰래 숨겨둔 한 방울의 눈물을
당신의 문지방 앞에 떨굽니다.





물총새잡이의 기억·7
―오래된 둠벙




둠벙 속의 해를
잡기 위해
하루 종일
대야로 물을 다 퍼내었으나



매양
손에 잡히는 건 
물큰한 진흙
한 줌



해는
낚아채자마자 
어느 결에
저만치
금비늘을 번득이며
달아나곤 했다



오래된
그 둠벙 속에
이젠 해가 살지 않는 듯
하아,
아무런 기척이 없다.





돌의 꿈·3
―백비白碑 앞에서



학력도
경력도 쓰여 있지 않은
공백이야말로
자신이 이룩한 최대의 공적이란
뜻인가



저 백비白碑의 주인은
빈 칸을 빼곡히 채운
너절한 생의 자랑거리들을
불태운 뒤,



아무나 쉽사리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곳,
순백純白의 광야 한복판으로
가뭇없이 걸어갔을 것이다



이 세상에 와서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내게 물었을 때,
어떤 시인처럼
가끔 울었다는 것뿐이라고
나도 그렇게 대답할까



난 끝까지 미련에 발목 잡혀



깨끗한 공백 하나 마련치 못하고
자술연보 몇 줄
남겨놓으려 하는 것인가






감자를 먹으며



밤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걸터앉아
찐 감자를 먹고 있는데,
토종닭 한 마리 기웃기웃 다가와
함께 먹자는 듯
내 발등을 콕콕 쫀다



그래
이거나 먹어라, 하고
감자 껍질을 던져주었더니,
잔뜩 눈을 흘긴다



같은 마당에 사는
식구끼리
그렇게 푸대접 하면 안 되지, 하고
말하는 양
캬악 캬악
기침을 한다



조금 전에
내가 던진 감자 껍질을
떠메고 가는
일군의 개미 떼,
그 개미 떼 먹으라고



토종닭이 그걸
남겨 놓은 것일까


아아,
하늘 아래
목숨 붙어 있는 것들은 다
서로 밥을 나눠 먹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생구生口들이로구나!





저무는 풀



저무는 풀
보아라,
저무는 풀을 보아라
해가 서산마루 너머로
떨어지면서
날이 저무는 것처럼
그렇게
풀도 저무는 것을



풀은
제 살던 땅에
고스란히 허물을 벗어놓고
지하로 내려가
어둠이 사는 아늑한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뿐,
결코 긴 깊은 잠에
빠지지 않는다.



새벽이 오면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두 팔 벌려 한껏 기지개를 켠다.



풀은
죽는 법을 모르는 자이기에



작별의 인사도 하지 않는다.
해가 동산 마루에 다시 솟아오르듯
솟아오르기 위해
제 살던 땅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노을을 맞이한다.



가만히 보아라,
저무는 풀을 가만히 보아라
우리도
저와 같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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