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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집중조명/조동범/난센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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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13회 작성일 16-12-3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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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조동범






난센
―두 번째 이야기




   바람이 불어오면 어느새 아침은 펼쳐집니까. 공원은 산책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고, 그러나 침몰하는 여객선에서 슬픔은 전송되지 않습니다. 피크닉의 도시락 뚜껑을 열 때, 그것은 정주할 수 없는 누군가의 일용할 양식입니까. 아니면 하굣길의 즐거운 빈 도시락과 리듬입니까.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로 누군가의 행과 불행은 오늘 하루를 망설입니다.



    횡단보도 앞에 선 노파가 문득 왼쪽으로 난 숲길로 들어설 때, 빌딩이 조금씩 기울어질 때, 이윽고 바람은 망각을 거듭합니다. 횡단보도 앞의 솜사탕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면, 그것은 이윽고 휴일입니까 아니면 오래전에 잊힌 행과 불행입니까.



    피크닉을 펼쳐놓은 신문지에서 닿을 수 없는 국경은 흐느끼며 흘러나오면, 그것은 폐쇄된 국경입니까. 아니면 증명할 수 없는 죽음들의, 흘릴 수 없는 눈물입니까. 구름은 평화롭게 흩어지고, 비행운마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슬픔과 비명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계곡마다 비행기의 잔해와 시신들은 타오릅니까. 아니면 죽을 수조차 없는 누군가는 영원토록 깊은 바다를 흐느낍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디입니까. 비행운은 소멸을 복기하며 어떻게 하늘이 되어갑니까. 그것은 구름을 펼쳐 어느 순간의 비극을 위무합니까. 그리하여 구름은 영원토록 복원될 수 없는 미래입니까. 비행운이 하늘을 가로질러 정주할 수 없는 과거를 흐느낍니다. 천천히 하늘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식육점의 간판에 불이 켜질 때, 어느덧 갑자기 버스는 당도하고



    국경은 무너집니까. 숲길은 이윽고 뒤를 돌아보는 노파를 마지막으로 폐쇄되고, 모든 과거는 기억할 수 없는 수평선이 되어갑니다. 그리하여 산책을 하는 누군가가 솜사탕 앞에 서도 신호등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름입니까, 피크닉의 도시락입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느새 기억할 수 없는 몰락입니까.

 


   *난센여권. 무국적 난민을 위해 발행하는 국제적인 신분증                 





난센
―세 번째 이야기                                                               




    당신이 그것을 환멸이라 부를 때, 도륙 당한 오늘 밤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세계의 모든 진리를 향해 멘토들은 불온하고, 환멸은 타오르는 상여처럼 무덤을 향해 정주할 수 없습니다. 국경일의 텔레비전은 상투적인 지리멸렬을 회고합니까. 아니면 여관마다 헤어진 연인들은 절정을 흐느낍니까. 휴일의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서 멈출 수 없는 환멸은 비롯되고, 신호대기중인 트럭에서 채 자라지 못한 가축들은 쏟아집니다. 몸통도 없이 쏟아지는 가축들의 울음은 환멸을 향해 거세됩니까. 당신이 그것을 환멸이라 부를 때, 그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군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침묵입니까. 아니면 국경을 이야기할 수 없는 절망입니까. 동물원의 미아보호소에 버려진 길 잃은 아이들은 사산된 오늘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태어날 수 없을 때, 모든 애도의 방식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것은 국경 너머의 불길한 소문입니까. 아니면 애도할 수 없는 침묵입니까. 연착을 거듭하며 여객기는 정처 없는 오늘 밤을 침묵하려 합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딸로 태어난 오늘 밤을 잊을 수 없습니까. 당신이 그것을 환멸이라 부를 때, 때 이른 철쭉은 어느새 시들기 시작하고, 철거 예정인 건물마다 정주할 수 없는 흐느낌은 펄럭입니까. 비행운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밤은 그러나 신뢰할 수 없다고, 당신은 도륙 당한 국경처럼 오늘 밤을 애도합니다. 그리하여 누군가 투신을 거듭하면 그것은 버려진 고양이입니까. 아니면 도로를 가로지르지 못한 늙은 두꺼비 떼입니까.





알레고리



    수면에 비친 나무와 새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당신은 기록될 수 없는 역사에 종언을 고한다. 그리하여 어느덧 구름은 사라지고,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은 유령을 흐느끼며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지려 한다. 수면의 경계로부터 모든 배후는 시작되는가. 아니면



    수면의 경계로부터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마는가. 나무와 새들과 확언할 수 없는 예언이 무너질 때, 이윽고 수면은 폐기되기 시작하고,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그러나 당신은 바라볼 수 없다. 수면으로부터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질 때, 우리는 과연 배후에 가까워지는가. 아니면 배후는 끝도 없이 오독되고 마는가.



    아름다운 단풍이거나 순백의 구름, 청명한 하늘이거나 물가의 평화로운 사슴은 이제야 비로소 절제된 외로움을 향해 달려가려고 한다. 그것은 이제 단 하나의 피사체이며, 더 이상 진부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가 무너지고 수면에 비친 나무와 새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누군가의 진부한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 아이를 낳고, 그저 단풍이며 구름, 하늘이며 사슴이 나부끼는 강변을 산책하려고 한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온다고, 누군가 말을 했지만, 그것은 진부한 의도가 아니었다고 당신은 믿고 싶어진다. 아침 식탁처럼 놓인 단풍이거나 구름, 하늘이거나 사슴을 지나 연인들은 걸어가고, 아이들은 끝도 없이 태어나며, 단풍이거나 구름, 하늘이거나 사슴의 배후가 되어간다.







―-귀신고래                                                               




    바다가 밀려가면 두근거리는 심장은 메마른 해변을 출렁이기 시작했다. 태양은 뜨겁게 우리의 육신을 말리고, 나의 꼬리와 너의 꼬리 그리고 나의 머리와 너의 머리는 폐기되어버린 신화를 떠올리며 참혹했다. 나의 꼬리와 너의 꼬리가 물살을 가를 때, 난류와 한류의 경계가 출렁일 때, 파괴된 신전은 여전히 방치되어 있고 신들의 음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나의 아가미가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감각할 때, 해변의 방풍림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며 바람을 흐느낀다. 나무의 이파리가 공중에 커다란 초록을 만들며 웅성거린다. 나의 꼬리와 너의 꼬리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신들의 이야기는 믿지 않는다고 중얼거린다. 바다의 이야기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며, 너와 나의 아가미는 오로지 서로 다른 흐느낌을 거듭할 뿐이다. 나의 꼬리와 너의 꼬리는 바다를 어색하게 더듬으며 헤엄치던 최초의 바다를 애써 떠올려본다. 이제 이곳 해변에 밀려오던 파도는 먼 바다로 물러가고 우리는 영원히 바다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바다로부터 스며나오던 신화는 사라진 지 오래. 모든 것이 소멸에 이를 때, 그것은 마치 단 하나의 심장처럼 우리를 흐느끼기 시작한다. 너와 내가 바라보던 바다는 서로 다른 길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지만, 단 하나의 바다는 우리의 심박을 두근거리며 귀신처럼 출렁인다. 우리의 종(種)이 생을 다할 때, 우리의 지느러미는 바다의 서늘한 결을 어느덧 잊겠지. 해변을 산책하는 노부부는 몰락을 거듭하는 태양을 바라보고, 애인들은 언제나처럼 이별을 거듭할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날 시간이라며 해변은 천천히 눈을 감기 시작한다. 우리의 종(種)이 생을 다할 때, 모든 애도의 방식은 사라지고 말겠지. 그리하여 하나의 신화가 절멸에 이를 때, 나의 머리와 너의 머리, 그리고 나의 꼬리와 너의 꼬리는 우리의 마지막 심박을 말없이 애도하기로 한다.







    너의 숨이 나의 어깨에 닿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나는 마음이 아프다. 너의 눈을 통곡하던 오늘 밤은 오래된 묘비명처럼 음각되고, 사라진 역사처럼 너는 고요하다.



    너의 눈을 흐느끼며 통곡하는 오늘 밤은 그 끝을 가늠할 수조차 없구나. 네가 나의 어깨에 기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순간은 모래폭풍이 사라진 들판처럼 고요했다.


 

    참을 수 없는 죽음은 어깨 위에 걸린 채 자꾸만 내게 말을 걸어오고, 나의 어깨로부터 너의 죽음은 천천히 흘러나오는구나. 나의 어깨에 기대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



    너는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가. 이국의 민요처럼 너는, 낯선 산과 나무와 강물을 허밍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페이지는 사라지고, 우리가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흐느끼던 날의 세계사는 폐기된 채 복원되지 않는다.



    오늘 밤은 나의 어깨로부터 죽음을 잉태하기 시작한다. 잊을 수 없는 전생처럼 너는 눈을 감고, 마지막 너의 숨이 나의 어깨에 닿을 때, 묘비명은 나의 심장을 새파랗게 낭독하기 시작한다.






<시론>

지배적인 정황과 시적 순간의 층위



    시적 순간은 우리의 미의식을 자극하는 그 어떤 감각이며, 미의식을 감각하게 하는 시적 사유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시인이 파악하고 재현하고자 하는 것은 결과물로 제시되는 언어나 미적 표현으로서 기능하는 단순한 언어 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로 이루어진 시적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언어를 넘어서고자 한다. 따라서 시적 순간은 언어 이전의 시인의 감각으로부터 비롯되기 마련이다. 물론 시인은 미적 인식을 현현하게 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게 되기를 언제나 희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미적 인식의 앞에 놓이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시인들이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기를 희망하고, 언어에 대해 예민한 촉을 세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품고 있는 언어에 대한 희망은 언어 자체에 대한 단순한 갈급 때문이 아닌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시인은 언제나 자신만의 미적 인식을 드러낼 수 있는, 주관적인 묘사와 진술을 통해 개성적인 시적 표현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시인들이 꿈꾸는 것이 언어에 대한 단편적인 갈망이 아님은 분명하다. 시인은 시의 감각이 재현될 수 있는 그 어떤 시적인 순간을 꿈꾸고 그 세계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시적 순간은 바로 그와 같은 감각이 시작되는 순간 탄생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언제나 미적 인식을 전제로 한다. 이때 언어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언어 자체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때때로 시적 순간에 앞서 언어라는 기표가 제시되고 언급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언어가 시적 순간에 앞서 발현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적 순간은 이미 시인의 내면에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시인은 무의식적이거나 선험적으로 시적 순간을 파악하고 감각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시적 순간을 탐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감각을 곧두세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탄생하는 시적 순간은 과연 무엇이고 그것은 어떤 경로와 감각을 통해 구체화되는가.
    시적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정서와 감각을 지배하는 무엇인가와 만나게 된다. 그것과 마주하는 순간, 우리의 정서와 감각은 그야말로 예술적인 순간들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그런 충만함의 순간들로부터 시의 언어와 자리는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들과 만나기 이전의 삶과 사물은 의미화되거나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들이다.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한 삶과 사물들이 우리의 정서와 감각을 지배하는 시적 순간과 만나게 될 때, 그것은 비로소 특별하게 재조직된 의미구조로 전이되기에 이른다. 시는 바로 이와 같은 조직화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드디어 온전한 미적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미적 가치를 부여받은 후에 재조직된 시적 순간을 우리는 ‘지배적인 정황’이라고 부른다.
    지배적인 정황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지배적인 정황은 하나의 정황이 미적 인식이나 예술적 인식으로 전환되어 우리의 우리의 미적, 예술적 감각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배적인 정황이 존재하느냐 아니냐는, 그것이 예술적인 경향과 감각을 지니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지배적인 정황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은 미적 인식으로 기능할 수 없는 것이 되며, 따라서 그것은 시적 순간으로 온전히 기능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 시적 순간은 바로 이와 같은 지배적 정황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지배적 정황을 통해 시는 비로소 시적인 순간과 만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적 순간은 지배적인 정서와 감각을 통해 표현되는 지배적인 정황에 다름 아닌 것이다. 지배적인 정황은 자신의 내부에 그 모든 시적 순간과 시적 감각을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지배적인 정황은 드디어 시적 순간이 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의 미적 순간과 미의식의 첨예한 지점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지배적인 정황이다. 그럼으로써 지배적인 정황은 우리의 미적, 예술적 의식을 끊임없이 지배하고자 한다.(《딩아돌하》 2015년 가을호 발췌 재수록)






**약력:2002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산문집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평론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 딩아돌하 작품상, 미네.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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