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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집중조명/남승원/당신이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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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53회 작성일 16-12-3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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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남승원





당신이 되는 법
― 조동범 시인의 작품론   




    바닷가의 모래톱을 걸어본 적이 있는지요.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이 경험의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모래와 바닷물의 대비가 빚어내는 선명한 이미지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두 질료들이 만나 서로 젖어들고 말라가며 모래 위에 부려놓은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흔적들과 또 그 위에 우리가 남겨 놓고 다시 지워져가는 발자국도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오히려 이와 더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정된 것은 오로지 죽음 뿐인 우리들로서는 자연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한의 운동을 흉내 낸, 의미와 무의미가 끝없이 겹쳐지고 얽혀 들어가는 놀이의 현장에 매혹당하는 것이 당연할테니까요.
    최근 세 번째 시집 『금욕적인 사창가』를 통해 극적인 죽음과 절망의 모습들을 냉담하고도 객관적인 어조로 그려내고 있는 조동범의 시에 우리가 선뜻 느끼게 되는 매력도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실, 익히 알려진대로 조동범 시인은 첫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에서부터 ‘죽음’을 자신 시작업의 가장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시집 『카니발』에서도 이같은 경향은 이어져 왔는데, 이번 시집에서도 역시 집요할 정도로 죽음에 대한 관심을 붙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논리가 보다 촘촘하게 작용하면서 죽음이 일상화되고 나아가 전시가능한 상품으로까지 변모되는 사회, 또는 예외적 사건으로서의 죽음이 더 이상 어떤 의미로도 기능하지 못하게 된 현실에 대한 통찰이라는 그간의 지적들은 타당합니다. ‘영원한 젊음’을 소망한다는 시인의 말은, 어찌 보면 죽음의 끝없는 반복을 통해 결국 죽음이 유예되어버리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아가 『금욕적인 사창가』에 오면 그가 주목한 죽음은 이제 시적 인식을 뛰어 넘어 수행적 힘을 가진 하나의 방법론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탐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제목 그대로 아름다움에 대한 시인의 탐구방법을 조금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아름다움’을 다루는 태도가 결국 우리들 모두를 시인으로 만드는 것일테니까요.
    전쟁이 모두 그렇겠지만, 시인이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피아간의 구분이 불분명한 내전입니다. 지금 당장은 ‘정부군과 반군’이라고 쉽게 부를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 간의 전쟁과는 다르게 내전에서 서로를 구분하는 이름들은 하나의 역할일 뿐, 주어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서로의 역할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니, 역할을 바꾸기 위한 것이 목표 자체인 행위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대로 ‘내전’이 하나의 시적 상징이 될 수 있는 사실 자체가 이미 확실한 구분을 전제로 작동하는 체계에 대한 우리들의 불신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내전 상황이 사랑을 나누고 있는 연인들의 배경으로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굳이 완벽하다고 말한 이유는 시인의 방식을 조금 더 강조하고 싶어서입니다.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전쟁의 상황은 ‘당신과 나’의 사랑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기법 차원의 배경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육체적 관계를 중심으로 한 연인들의 행위 그 자체와 뒤섞입니다. “교전이 시작되”는 것이 곧 “호텔 침대에 누운 당신과 나의 몸이 천천히 달아오”르는 것을 의미하며, “절정에 다다른 순간”과 “총에 맞은 정부군의 마지막”이 동일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보면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구성된 이 작품은 사랑의 행위에 대한 단계이면서 동시에 전쟁이 벌어지는 단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혹시 이같은 대비가 사랑의 행위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내밀함을 나누는 사랑의 행위조차 육체적 기능이 전시되고 소비되는 전쟁의 이미지를 통해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사랑, 또는 전쟁 단계의 마지막에는 “텅 빈 침대와 정부군의 묘비명”뿐 어떤 결과가 예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사랑의 내밀함은 전쟁의 육체성을 만나 ‘텅 빈 침대’로 유예되고, 반대로 전쟁의 육체성은 사랑의 내밀함 속에서 ‘묘비명’의 흔적으로만 남게 됩니다.
    앞서 지적한대로, 제목을 염두에 두고 시인을 따라 도달해본 아름다움의 자리가 바로 여기입니다. 보다 정확히 하자면 어떤 대상의 속성에서 비롯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 아름다움의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해져야 할 겁니다. 조동범 시인이 최근 시집 『금욕적인 사창가』에서 연작시들을 통해 ‘대륙’을 건너 ‘행성’을 횡단할 때조차 죽음을 뛰어 넘어 확장되는 인식의 세계가 아니라, 죽음의 의미들이 가라앉아 있는 심연에 도달하는 이유입니다. 의미들이 만나고 겹쳐지면서 하나의 내면 속에서 다른 하나의 죽음이 끝없이 이루어지는 곳에 그가 서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시인이 양손에 쥐고 있는 두 질료들을 저울질 하거나 어느 한쪽에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이제 막 손님이 빠져나간 이른 아침의 ‘사창가’와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는 ‘휴일 오전’이 “금욕적”으로 만나고 있는 표제작을 만나게 되었을 때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작품에서 우리는 “절망에 침묵할 뿐”인 ‘당신’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마주하거나, 짐짓 ‘당신’을 못본체 지나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고 믿어왔던 일상의 욕망과 ‘사창가’로 상징되는 유통 공간 속에서의 “비릿한 절정”이 교차되면서 “흰쌀밥”같은 우리 삶의 실제 속살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인상적인 장면을 앞에 두고도 말이지요. 여기에서도 마지막 장면에 의미를 집중시키기보다 두 욕망이 부딪히고 겹쳐지면서 결국 자신들의 자리를 서로에게 내주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시인의 방법론에 주의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이것을 보다 쉽게 이해해보기 위해 ‘금욕적 방법론’이라고 불러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상징계적 질서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욕망들을 따라 걷는 길에서 잠시나마 우리를 멈춰 세울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월요일」에서 “시작된다”는 의미에 몰두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도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저물녘의 황혼이고 해변이며, 역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그린 이 작품을 통해 그 ‘시작’의 의미를 보다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겠습니다. 자칫 시인이 보여주는 상황들의 의미에 빠져들고나면 ‘역전’은 사회적 의미들이 압축되어 있는 상징적 공간으로만 기능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또한 시적 의미로 작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러면 “열차를 향해 투신을 거듭”하는 일들이나 “교복 치마”가 육체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도 그저 심상한 일들이 되고 말겠지요.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로서의 ‘소녀’를 비롯하여 시인이 ‘역전’으로 호명하는 것들에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여 보면 이내 이 작품의 초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서성”이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역전이 으레 그렇듯 서성대는 일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소녀’가 불러 일으키는 미성숙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히 모여든 곳에서 하릴없이 그저 서성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성”이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점차 서성이는 행위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역전’은 한정됩니다. 이제 작품 속에서 서성이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부여받은 의미들을 벗어나고자 하는 ‘금욕적’이고도 적극적인 노력으로 변모됩니다. 위에서 우리가 불러본대로 시인만의 ‘금욕적 방법’은 말 그대로 욕망의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욕망을 작동시키는 힘들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스스로 시작되었든 또는 외부로부터 오게되었든 구별없이 말입니다. 이제 서성이는 것은 “소녀들의 처녀들”입니다. 단순해 보이는 이 구절에도 조동범 시인의 방법론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엄연히 구분되는 ‘소녀’와 ‘처녀’가 관형격 조사를 사이에 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전체이자 부분이며,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소유물의 관계로 뒤섞인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되지 않으면 절대로 “서성인다”는 행위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시인의 ‘시작’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엇의 처음이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의 시작이며, 시작의 반복만 있을 뿐입니다. 시인에게는 이것이 바로 “탐미의 순간”이며,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시인이 보여주는 ‘기록의 순간’일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대로입니다.
     『금욕적인 사창가』는 이같은 ‘탐미의 순간’ 내지 ‘기록의 순간’들로 빼곡합니다. 가령, 「대륙횡단특급 2」에서 “존재하지 않는 좌표를 찍”고 이국적인 배경을 “질주하”면서 “생과 사의 두근거리는 최초를 떠올”리는 “트럭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특히 이 ‘트럭커’가 보여주는 동적 이미지는 흥미로운데,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는 다섯 편의 연작시 전부를 압도하면서 자칫 폐쇄적인 세계에 갇힐 위험성을 가진 시인만의 방법론에 수행적 운동성을 부여합니다. 또 다른 다섯 편의 연작인 「행성횡단특급」으로 이어지면서 “닿을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려주”(「행성횡단특급 4」)고자 하는 시인의 바람이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시인을 따라서 대립적으로 기능했던 의미와 무의미, 당신과 나 그리고 일상과 욕망 등이 겹쳐지고 넘나들면서 서로가 상대방의 흔적이자 상처로 남는 ‘아름다움’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조동범 시인이 어째서 그토록 모든 작품들에 “당신”을 참여시키고자 했는지도 이제 분명해집니다. 이 모든 것에 ‘당신’이 불참한다면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는 상태로 되돌아가버리고 말테니까요.
    타인들이 만나 타인의 죽음이 반복되면서 결국 타인에게 드러나는 것으로서 ‘공동체’를 설명하고자 했던 낭시의 말을 떠올려보면, 시인의 방법론도 그것과 퍽 닮아 있습니다. 익히 알려진대로 공동체가 자리잡는 지점으로서의 ‘무위de'œuvrement’가 생산이나 완성과는 차단되고 과제를 넘나들면서 단수적 존재들 자체가 끝없이 유예되는 장이라고 한다면, 이제껏 우리가 따라왔던 조동범 시인의 방법론이 가진 힘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에어포트」에 등장하는 ‘환승터미널’을 그 훌륭한 예로 이해할 수 있을겁니다. 모국을 버리고 망명을 선택한 인물이 망명지에서 보내줄, 하지만 결코 도착하지 않는 특별기를 기다리고 있는 환승 터미널은 이미 그 자체로 의미들에 저항하고 또 의미들이 유예되는 동시에 끝없이 의미들이 반복되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후반부에 속도감있게 진술되고 있는 구체적인 행위들은 그 어떤 것도 ‘당신’이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공간에 사실상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연쇄적인 발생의 움직임을 멈출 수도 없게 됩니다. 즉, 존재가 벌이는 행위로서 어떤 인과율을 따르는 사건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환승터미널’에서 이어지는 사건 속에서 끊임없이 ‘당신’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발레리는 이같은 상황을 시적 출발의 근원으로 말했었습니다. 자신 안에 있으며 스스로도 모르는 것, 미숙함이나 불확실함, 무력함 등이 ‘나’를 구성하며, 동시에 그것은 타인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균형이면서 다른 한편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행동으로 존재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그도 어쩔 수 없이 가상의 또 다른 나(Monsieur Teste)를 필요로 했습니다. 조동범의 시를 읽는 일은 우리가 직접 시인의 눈을 빌려 시인이 애써 구성해 놓은 장면 속에서 무수히 많은 ‘당신’이 되어 동참해보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무리 많은 말을 늘어놓아도 그것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의 시를 통해 얻게 되는 이 경험이 문학적 삶의 한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약력:문학평론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계간 《포지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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