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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소시집/안명옥/나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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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안명옥
나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대추나무 아래서
여자가 혼자 울다 간다
대추나무는 알고 있었다
꽃에 이르는 길만 고민하다
밤낮 몽둥이질 견디면서
죽을 수도 없었다는 것을,
센 몽둥이질을 견디는 동안
멍을 어루만져주던 달빛 아래
대추나무는
삐쩍 말랐다 대추나무는 그 사이
붉은 열매를 무수히 달고 있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붉은 대추알 안에는
무수한 밤의 번개와 천둥과 벼락이 스며
살아봐도 미래가 없다는 절망이
알알이 영글어 있음을
누군가 또 긴 막대기를 가져와
대추나무를 마구 후려친다
열매와 함께 가지가 부러지고
가지를 잡고 있던 이파리가 손을 놓았다
폭력의 기억과 달빛을 맞바꾸고
몽둥이질과 열매를 바꾸며 사는 여자
그녀는 대추나무에 목을 매고
대추나무는 그녀의 퍼런 몸을 풀어주어
그 자리에 꽃처럼
번개 맞은 도장 하나를 남겨놓았다
*미국 여성 폴레트 켈리가 쓴 시 제목.
미용실
가벼워지고 싶어
미용실을 지나가다가
머리카락이 자꾸 바람에 엉겨
알록달록 싸인볼 속에는
염색과 파마가 붐빈다
7년 전부터 내 머리카락이 더디 자라고
7년 전부터 내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7년 전부터 내 머리카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미용사는 내 머리카락을 쥐어보더니
갈라지고 상한 머리카락부터 쳐내고 나서
어떤 스타일로 할 건지 정하자 한다
불안이 새치처럼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자고 나는 이렇게 길게 견뎌왔는지
바오밥나무 뿌리처럼 잘라내도
무성하게 자라는 음지의 것들
여자는 머리카락으로 살아간다
방심하면 끝에선 갈라지거나 툭툭 끊어지기도
한 번 상한 머리카락은 반드시 쳐내야 한다
산다는 건
상하거나 갈라지는 머리카락이
나를 잘라내는 것
단발머리 된 나를 들여다보니
7년 전으로 사라져 버렸을까
거울 속 내가 보이지 않는다
콩
키질하는 대로 흔들리는 나.
알맹이 단단한 것들은 안으로안으로 남는데
가벼운 검불들, 쭉정이들, 껍데기들
덜 익은 알갱이들
바깥으로바깥으로 밀려난다
밀려나 한동안
저희끼리 몰려다니다가
들러리가 되어 주다가
제풀에 떨어져 나가고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다가
허공을 오르며 까불거린다
어떤 나는 묵정밭에 떨어지고
어떤 나는 바위 위에 떨어지고
어떤 나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고
어떤 나는 비옥한 땅에 떨어진다
대접받고 살려면 알곡이 되어야지
바닥에 떨어진 쭉정이들
어머니 쓰레받이에 담아
불 아궁이에 넣는다
덜 여문 나는 아직
콩콩 튀면서 키질 안에서 살고 있다
낮술
옛 애인은 낮술을 먹는다고
불광동에서 여자에게 바람맞고
목로주점에서 홀로 술을 마신다고
부모에게 얹혀사는 옛 애인은
늙은 어머니가 모아둔 적금을 깨
베트남 갔다 그냥 돌아왔다고
돈 주고 가난한 나라 딸을 사는 것 같았다고
베트남 처녀에게 사장이라고
거짓말 할 수 없었다는데
구겨진 남편의 셔츠를 다리던 나는
전화를 걸어온 옛 애인에게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낮술도 마셔서 좋겠다고
낮술 마실 수 없는 넥타이보다 나은 팔자라고
세상에서 가장 위독한 술은 입술이고
가장 독한 술은 예술이라고 농담하다가
내 고백에도 술이 필요하다고
나도 그 거짓말 때문에 사랑했다고
난데없이 비가 내려
전화기 곧 밧데리가 방전될 거라고
번들거리는 불광동
옛 애인은 비척비척 하염없이 젖고 있을 것이다
CCTV
누군가 진실을 훔쳐보고 있다
골목마다 CCTV가 들어서면서
집들의 창문이 닫히고
가로등 아래 연인도 사라졌다
오늘도 CCTV가 인간을 재배한다
점잖은 표정의 식물들
그것은 엘리베이터가 키우는 분재
건물에서도 공항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무표정한 눈빛이 내걸린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없는
외눈박이
온몸을 더듬고 지나가는 적외선 눈동자
당신 심장이 수상해 당신 호르몬이 바뀌고
당신 피가 너무 검붉어
당신 눈빛이 흔들리고 있어
눈앞의 현실만 보는
외눈박이 삶처럼
그래서 사는 게 괴로워지듯
사람들은 외눈박이로 살도록 시스템은 조정돼
24시간 내내 365일 내내
나는 곧
대체되거나 복구될 테고
시작메모
우연히 한 지인을 만났다. 그녀는 옷가게를 열었다고 했다. 독립하게 되었다고 했다. 오래전 그녀 집을 가서 차를 마실 때 그녀 보석함이 진열된 장식장이 유난히 눈에 띄었었다. 그녀의 삶은 우아하고 또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듯 보였는데 그날 그 지인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다. 그동안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았던 것이다. 특히 폭력 후에는 늘 장미 백송이를 비롯 많은 꽃을 보내왔다고 했다. 그리고 보석도 해주며 미안함을 보였단다. 그녀가 국화를 받기 전 독립한 것은 잘 한 일 같아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 친구가 떠올랐다. 행사 뒷풀이도 마치고 그녀와 한방을 쓰면서 그녀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우리 고향집 대추나무가 떠올랐다. 대추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음식의 독을 빨아내고 결혼 폐백이나 제사상에 오르면서 번개 맞은 대추나무는 도장이 되고 그러면서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로 늘 열매를 맺는 대추에 애정이 생겼다. 대추를 수확할 때마다 몽둥이질을 당하고 대추나무가 번개와 천둥과 숱한 밤을 견디고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후 나는 대추차를 그냥 마시지 않게 된다. 지금도 인사동 가면 푹 끓인 대추차를 한 잔 마시고 오면서 그녀들을 생각한다.
**약력:200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칼』. 서사시집 『소서노』, 장편서사시집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 창작동화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 동화 『금방울전』, 『파한집과 보한집』. 역사동화 『고려사』. 성균문학상 우수상, 바움문학상 작품상, 만해 ‘님’시인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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