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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소시집/권순/그림자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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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12회 작성일 16-12-3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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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권순






그림자




내가 왼쪽 어깨에 해를 받으며 저수지로 갈 때
그는 허리가 잘린 채 비스듬히 뒤따라 왔다



나도 그도 부지런히 걸었지만
우리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발길을 돌려 오른쪽 어깨에 해를 받으며
포구로 돌아올 때 잠깐 그가 보이지 않았다
나의 정수리와 등짝이 후끈거릴 때 
문득 앞서 가는 그를 보았다
자꾸 발끝에 채이는 그를
툭툭 차면서 갔다



내가 구부러진 방죽을 멀리 돌아올 때
그는 두 팔로 허공을 저으며 가고 있었다
온통 풀빛이었다 



내가 땀을 닦느라 걸음을 멈추었을 때
그는 행인들 사이에 있었다
모두 아랫도리가 검었다
정수리를 지나던 해가 갯골에 박힐 때쯤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따금 도심 한복판에서
그를 만나는 날이 있었다






지금은 먼지인 것




아카시아꽃 다 떨어지고 밤꽃이 한창이다
수북한 꽃잎들 흩날린다
날고 날아서 가루가 된다
한때 아카시아 꽃이었다가
벚나무 열매였다가
떨어져 쥐똥처럼 마르다가



실뱀이었다가
말라붙은 검불이었다가
지금은 먼지인 것



세상에 흩날리던 먼지들 죄다 모이는 곳
바람에 묻어 날아가 쌓이는 곳
어딜까



한때 사무치는 당신이었다가
소백산 연화봉에 부는 바람이었다가
깔딱재로 내려가는 철쭉의 진분홍 향이었다가
희방폭포 아래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었다가
다래덩굴에 걸려 흩어져서
풀섶에 속속들이 쌓인 것
쌓였다가 흩어진 것






바닥을 보이다



저수지가 말랐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 바닥, 30년만이라고 한다 저수지가 마르고서

야 바닥을 성찰하기 시작한 무리들이 있다 그들이 나선 곳은 재래시

장, 바닥 민심을 수습하기 좋은 곳이라고



한 남자가 바닥에 엎드려 뱀처럼 구불텅거리고 있다
구불거리는 그를 따라 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정육점과 어물전이 싸우고 있다
어느 바닥에서 굴러먹다 왔냐고
도대체 눈에 뵈는 게 없냐고
허리춤에 손을 얹은 여자와 칼을 든 여자가
맞고함을 지른다
질척한 소리들이 바닥에서 솟는다



시장 바닥에서 십 수 년을 버텼다는 여자와 
바닥 맛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여자가
서로 머리채를 잡는다



누가 먼저 바닥에 닿았던 것일까



바닥을 치고 오르려는 사람들이 출렁거린다
그들의 바닥이 소란하다





전야



노을이 붉다
사방이 고요하다
초저녁잠이 막 밀려오는데



흩뿌리는 빗줄기 앞세우고
그가 오는가
후드득 소리에 선잠이 깬다
담장 아래 나무들, 머리채를 흔든다
흔들릴수록 더 젖는다
젖을수록 휘어진다



저기 그가 온다
산과 나무를 안고
아파트를 안고
놀이터 미끄럼틀을 안고
쓰레기통을 안고
도둑고양이를 안고
낙과를 안고
질경이와 달개비를 안고
막 달려온다



출렁, 밤이 뒤집힌다






소금으로 씻는 다리



아침부터 단속반이 떴다
여자는 절룩거리며 리어커를 밀고 다닌다
뒷골목이 젖는다



빗줄기 잦아들고 땡볕 드는 염천에
꼭지 마른 참외와 토마토를 모둠으로 놓는다
손등으로 연신 눈물 땀을 닦는다
저녁이 멀다



종일토록 의족에 쓸린 다리를 짐처럼 내려놓고
여자가 몸을 눕힌다
헐은 의족을 뺄 때면
쓸린 다리가 홧홧해서 눈물이 난다



남자가 우는 여자를 안아 든다
붉은 고무다라 뜨신 물에 피멍든 다리를 담근다
두 손으로 꾹꾹 주무른다
더운 숨 모아 입김을 넣어준다
굵은 소금 탁탁 뿌린다
무처럼 썩썩 비벼 씻는다
다리가 움찔거린다



저녁마다 호사를 누린다며 여자가 환해진다
얼굴 가득한 주근깨가 한 움큼 쏟아진다
불빛이 멀다






시작메모




   사방에서 바닥이 소란하다. 소란한 바닥에서 삶은 이어지고 사람들은 자리를 다툰다. 바닥에 닿았다면 바닥을 치고 오르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서로 바닥을 보여야 애틋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 바닥을 치고 있다는 사람들 틈에 나 역시 머물고 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으련다. 잠시 누군가와 또는 다른 생명체와 사물과 사물도 아닌 그 무엇과 자리바꿈이라고 여기면서 마음을 다진다. 먼지로 꽃으로 날짐승으로 바람으로 사람으로 가축으로 서로 잠시 동안 자리를 바꾸어 어른거리는 것일 뿐임을 기억한다. 한 점 얼룩으로 왔다가는 어느 봄날에 여전히 강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사과꽃 냄새가 애인을 달고 온다. 날아오르기 좋은 봄날이다.






**약력: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막비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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