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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김순옥/외박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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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김순옥/외박 외 1편
김순옥
외박 외 1편
얼음 위를 걷고 또 걸었다
발바닥이 갈라져 핏물 스며든 얼음 녹으면
여전히 제자리다
여기서부터 나는 나를 버린 듯해서
발바닥보다 낮은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발소리 하나 서성이다 머리 위로 떨어진다
제사상 아래 향을 피워 모사기에 술을 따라 낸다
방문이 열리고 촛불이 흔들린다
거기 계세요?
감꽃 목걸이가 아주 잘 어울리네요
꽃잎이 아주 시원하구나
아버지, 꽃으로 물들어가겠네
퇴주잔을 다오 퇴주잔을 다오
문지방 너머 홀로 서 있는 그가 보인다
눈사람이라고 말하려다
동쪽을 향해 퉤퉤퉤, 세 번 침을 뱉는다
아직 얼음은 녹지 않았다
멀리서 물로 가득 찬 사람이 오고 있다
죽는 꿈을 꾸면 오래 산다는 말이 좋았다
자고 일어나 유통기한 넘긴 우유를 마셨다
아래로 떨어져서 위태한 사람을 우연히라도 만난다면 상엿집 문짝에 내 이름을 새겨 달라고 해야겠다 단체 사진 좀 찍어 주세요 귀신들이 이름 위에 이름을 포갠다 나는 내가 아닌 나를 들키지 않으려 포즈를 취한다 푹 꺼진 바닥으로 발을 들여놓다가 내가 없어지는 일을 생각한다 없어진 내가 몇 개인지 세어 본다 세지 못한 숫자가 부러진다 소리를 앞질러가던 겁이 목구멍에 걸렸다 숨이 막혀 달려간 화장실에서 내 속의 나를 몇 번이고 토해낸다 얼굴은 자꾸 변기 밑으로 미끄러지고 기르던 개가 버려지는 내 표정을 핥는다 거기 낯선 얼굴이 발에 밟힌 깡통처럼 구겨져 있다 음복하시지요 간밤의 흔적들이 일제히 사라진다 변기에 내일 사용할 물이 차오른다 이제 일어난다 유통기한보다 늦은 내가 침대 아래로 떨어진 이불을 끌어올린다
*김순옥 201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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