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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장수양/올해의 도마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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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42회 작성일 23-01-0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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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장수양/올해의 도마 외 1편 


장수양


올해의 도마 외 1편



그는 짧은 도마를 샀다


무엇을 썰지,

무엇이든 이 위에 오르기 전에 썰 필요가 있다


일을 마치고 그는 부엌에 가봤다 부엌은 외롭고 불 꺼졌고 사라질 줄 몰랐다 


고유 향이 났다 

이곳에서 지은 첫 식사 역시 

사라질 줄 모르는 바


그는 혼미하였다 어둠이 찬 싱크대란 그런 거였다

기다려도 젤리가 되지는 않는다


아마 계단을 오르는 장면일 거예요 선명하되 단순하지 않아요 사뿐이 모든 층계의 위로 

어디 가는지는 으레 기억나지 않지요


많은 것을 사봤어요

호기심에


도마에는 용도 이전의 차가움이 있다

그는 싫지 않았다


슬픈 시간을 입 안에서 단맛이 나도록 

씹을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그건 작고 불 꺼졌고 사라지지 않는 일 중 하나였다





스모킹 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긴 연기의 끝을 보고 있다 나는 필터 속의 깊은 어둠을 응시한다 이렇게 붉고 뜨거운 어둠을 처음 본다


이런 식으로 닳기 위하여 긴 길을 걸어간 적이 있었는데 

새로 산 코트만 몹시 남루해지고 말았다


나의 몸은 아직 세찬 빗방울처럼 걸을 수 있다 차분하게 담배를 던지는 사람 호를 그리는 불티


나는 타들어가는 불을 뱃속에 삼키며 길을 걸었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 사자마자 낡아버린 내 코트 같은 얼굴 하고 있었다


화상을 입은 자리는 재생되지 않는데

우리가 화상을 입는 순간은 어디서든 재생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라이터를 가지고 있다 나도 호주머니 속에 라이터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생각은 흡연실에서 먹구름처럼 떠다닌다


헌옷처럼 사람의 얼굴 뒤집어쓴 채 

얼마간 나의 표정은 간지럽고 아프다는 듯 굳었지만

이제 마주쳤던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반갑습니다 흡연실에서 만난 아저씨들 다정한 언니들

이렇게 뜨거운 붉은 어둠을 처음 보지요? 이렇게 낡은 우리들을 처음 만나지요?





*장수양 201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앤솔러지 시집 『도넛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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