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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김나비/기우奇遇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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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11회 작성일 23-01-0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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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김나비/기우奇遇 외 1편 


김나비


기우奇遇 외 1편 



뼈만 남은 봄을 씹으며 여름이 살을 불리던 날이었어 내가 숨 없이 자고 있어 홑이불 같은 공기를 덮었지 형광등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 흘리고 화장대에는 색색의 알약이 흩어져 있어 그 옆 쪽지에는 빠져나오지 못한 글자들이 몸을 비틀고 있어 물 컵은 쓰러져 있고 흘러내린 물이 입양동의서를 촉촉이 적셔 놓았지 방바닥에 떨어진 초음파 사진에는 동굴 같은 자궁 안에 희끗희끗한 아이가 옆모습을 보이며 둥글게 찍혀 있어 마치 받아쓰기 공책에 받은 참 잘했어요 도장 같아 햇살이 창문에 살을 쏘고 바람이 바람을 흔들었지 커튼이 점점 부풀어 올랐어 칼을 대면 만삭의 커튼에서 아이가 앙앙거리며 나올 것 같았어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어 아무도 오지 않는 한낮의 불 켜진 방안 나는 초록 들판에서 꽃을 따고 있을까 들풀들이 나를 휘감고 푸른 혀로 핥으며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어 내 얼굴이 점점 초록으로 물들고 있어 그런데 이상하지 내 입가에는 풀향기 같은 미소가 폴폴 날리고 있어 내 앞에 서 있는 나도 알약의 둥그런 문을 따고 들어가고 싶어지는 날이야 뼈만 남은 앙상한 봄을 먹고 여름이 퍼런 살을 찌워가던 날이었어 





내가 죽은 어제



잘린 저녁

크레바스에 발이 빠진다


발소리를 덮으며 골목을 끌고 오는 검은 자루

가로등이 껌뻑껌뻑 모스부호를 흘리고

전봇대는 길게 늘어져 와들와들 떨고 있다

놀란 장미 담장에 매달려 빨간 입술을 벌린 채 말을 잃고

쇠줄을 끌어당기는 시베리안 허스키의 고함 허공을 물어뜯는다


자루의 몸집이 커진다

젖은 수건 같은 자루가 내 몸을 덮기 시작하고

순간 발소리가 바짝 마른다

발목을 잡더니 엉덩이로 기어 올라와 머리를 덮는다

엎어진 두려움 위에 배양되는 공포


실눈 뜬 달 아래 두 그림자 춤을 추고

자루 밖으로 뾰족한 나뭇가지가 거세게 나왔다 들어간다

검은 칼날이 그림자를 찌르고

증식된 공포가 달빛을 빼곡하게 가리고 있다

나는 비명을 지르기로 한다


서늘한 자루 눈빛에 꺾여 몸속으로 들어가는 소리

터지지 못한 비명 한 조각 검은 도화지처럼 구겨진다

나는 죽기로 한다 어제

문텐*을 하며

오늘로 발을 빼지 않기로 한다


* 썬텐에 대비되는 말.





*김나비 2017년 <한국 NGO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7년 《시문학》으로 등단. 201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수필집 『내오랜 그녀』, 『시간이  멈춘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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