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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강혜성/巳足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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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강혜성/巳足외 1편
강혜성
巳足외 1편
빌딩 안 사무실에는 번들거리는 뱀의 눈들이 사방으로 굴러다닌다. 세로형의 가늘고 긴 눈동자 옆에 최신형 열감지기가 금방 놓친 쥐 한 마리를 쫓고 있다. 비늘로 둘러싸인 무채색의 갑옷을 입고 전사의 후예는 정글 속에서 살아남으려 한다. 가장 높은 나무를 오르기 위해선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먼저 탈 수 있어야 한다. 쥐가 타는 엘리베이터와 구멍을 이용하려는 뱀은 자신의 다리부터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래야 미끈한 몸뚱이 하나 겨우 집어넣을 수 있었다. 다리가 사라진 뱀은 이제 온몸으로 구르고 기어야만 쥐 한 마리를 잡을 수가 있다. 사족四足을 버린 사족巳足이 시력을 잃은 채 책상 서랍 안에서 덜그럭거리는 동안 뱀은 다리 없는 몸으로 최대한의 속력을 내기 위해 피가 나는 달리기를 한다. 그러자 제 몸 속에 수백 개의 다리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비늘껍질 속에 바닥을 읽어나가는 수백 개의 다리는 곡선의 자유만이 얻는 수행의 도를 깨달았다. 비로소 좁은 구멍 속의 쥐를 재빠르게 낚아채며 진정한 전사의 후예로 다시 부활하는 순간이 왔다. 빌딩 안 사무실에는 포식자의 눈들이 번뜩이고 의자 밑으로 수백 개의 다리들이 소리도 없이 스르륵거린다. 단지 서랍 속에선 떨어져나간 사족이 까맣게 밀봉되어 분리불안에 치를 떨며 차르르르 울고 있을 뿐이다.
시네마
어떤 인생을 원하느냐고 매표원이 물었다 사막을 건너온 나는 목이 좀 마르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건네준 표에 어쩜 우물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기실에서는 표의 방향대로 정해진 운명이 예고되어 있다 사람들은 각각 그들만의 검은 방 속으로 줄을 지어 사라졌다 나의 영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목적을 잃은 시간은 언제나 남았다 예고편대로 롤러코스터를 탄 사람들의 두어 시간은 불행하거나 행복하거나 눈물을 흘릴 것이다 표 속에 숨은 지도를 살폈다 목이 말랐다 섬찟하게 정수리를 후비는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싶었다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자주색 쿠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잠시 후 불이 꺼지고 매표소의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옷을 벗었다 가식을 벗어야 숨겨진 비밀을 볼 수 있는 오늘의 추천 영화 뜨거운 천국 나는 다시 사막에 들어왔다 강렬한 태양과 빛나는 모래사막 한가운데 뚜벅뚜벅 그녀가 다가왔다 벌거벗은 존재의 절망이나 탈진 따위는 우걱우걱 씹어 뱉어버리는 낙타 같은 그녀 무덤을 파고 있는 나를 태우고 오아시스로 데려다줄 것이다
*강혜성 2018 《시와 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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