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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인상(시)/박미경/당선작 거미줄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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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인상(시)/박미경/당선작 거미줄 외 4편
박미경
거미줄 외 4편
추적거리던 비 그치고
바람이나 쳐주려 창고 문을 열었다
거미가 여기저기 그물을 쳐 놓았다
문 여는 소리에 깜짝
도망치던 귀뚜라미가 묶인다
내 탓이다 싶어, 풀어주는데
옆에 있던 옆집 아저씨 한마디 한다
와 그걸 풀어 주노!
그놈도 묵고 살아야 할 거 아이가
쥐새끼 한 마리 못 빠져 나가게 왜
거미는 창고 문을 지키고 있었을까
귀뚜라미는 내 손에 다리 하나
떼어놓고 간 곳 없다
부러진 다리 그물에 던져줘야 하나
혼비백산 달아난 놈 찾아줘야 하나
댓새 내린 가을비에 푹 젖어버렸는지
꽁꽁 거미줄에 묶인 생각이
옴짝달싹 못한다
납골당
코흘리개 적 땅따먹기 때도
제 땅 가져 본 적 없었다고 했다
칠십 평생 전전하던 공사판,
그만 비계를 헛디뎌 서둘러 떠났다
납골당으로 모시자는 큰아들 말에
느그 아부지 답답해 싫다던디, 더듬었다
어깨의 시커먼 질통자국
거머리 같다던 가난타령까지 죄
흰 항아리에 빻아 넣었다
다닥다닥, 벗은 신발 넣어둔 신발장 같다
층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죽어서도 표가 나는 신세
서둘러 자식들은 장례를 치뤘다
몇 푼 남은 합의금 나눠주며
운암댁을 달랬다
가지런한 봉분 꿈꾼 적 없다
생전에 영감이 먹다 만 됫병 막소주를 따른다
죽어서도 땅 한 평 못 가졌다고
운암댁 주정이 늘어진다
일곱 평 임대아파트가 오늘 따라
대궐만 같다
할매 불佛
참새방앗간 남문시장 소라미용실
시주하듯 싸들고 온 보따리마다
고구마가 옥수수가 풍년이다
먹으러 온 건지 수다 떨러 온 건지
파마약 냄새 구수하다
야이 야이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악을 써대는 핸드폰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미용사가 턱으로 받치고 대꾸한다
바빠, 나 지금 부처님 대글빡 볶아!
여든 살이나 먹고도,
철 안 든 주정뱅이 영감 흉보던 할매
부처님이라는 말에 갑자기
가부좌라도 틀려나, 고쳐 앉는다
말대꾸하랴 머리 볶으랴
오줌소태 걸렸다는 미용사는 흘금흘금
보따리 속 소주병을 그만 보고 만 것일까,
청개구리 할매 뱃속에 벌써
들어갔다 나온 것일까,
빠글빠글 볶고 앉아
버스를 기다리던 할매 두엇, 빙그레
염화미소 짓고 있다
미나리
얼음장을 깬 그가 몸을 밀어 넣었다 꽝꽝 얼어붙은 미나리꽝, 서너 쌈 바늘로 찔러대는 몸뚱이, 내처 되돌아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방싯대는 네 살 위살봇과 만삭 아내가 감각을 잃어가는 발목을 잡았을까, 꿈을 꾸듯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언 논물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둥처럼 서서 가물댔다 일그러지며 웃었다
달포째 달고 사는 감기 떼 내려 매운 아귀탕 집에 갔다 여기요, 미나리 좀 더 달라는 말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는다 미나리꽝 깨진 얼음장 사이로 슬로비디오처럼 발을 내딛던 캄보디아 젊은 가장의 얼굴이 김에 어린다
축축하다
산골의 오후는 짧았다
봉화산 너머 해 지면 정숙이네 집에
우르르 시시덕거렸다
늦도록 호롱불에 콧구멍 그을렸다
호랭이가 업어간대도
새벽같이 일어나 본 적 없던 나, 웬일로
그날은 꼭두새벽 잠깼다 방바닥이 축축했다
짓궂은 옥자가 몰래 물을 부었나,
정숙이 엄마 무서워
설마 이불에 물 부어 골탕 먹일까?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행여 누가 깰세라 꼼짝하지 못했다
손부채질에 털고 비비고
쥐도 새도 모르게 옷이며 이불을
말리는 시간은 길고 길었다
도둑고양이처럼 빠져나온 정숙이네 집
한동안 발 끊었던가,
막걸리 몇 잔에, 사십 년 전 까마득히 돌아가니
치마 아닌 눈가가 축축하다
│심사평│
통속하는 것들의 담채, 생의 밑그림을 들여다보다
트로트 열풍이 불고 있다.
‘뽕짝’에 익은 기성세대는 물론 ‘R&D’나 ‘힙합’에 익숙한 젊은이들조차 솔깃하다 하여 오랜만에 ‘K-pop’을 틀었다. 목청 좋고 기교도 남다르고, 외모 또한 출중한 가수들이 눈과 귀를 압도하며 화면 밖으로 일렁인다. 구성진 목소리와 율동에 홀려 한참을 젖는데 갑자기 초등학교 아이 하나가 싱싱한 목청을 뽑으며 등장하질 않는가.
대단한 가창력이다. 몸짓 또한 어른들 뺨친다. ‘나훈아’가 울고 갈 듯한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이의 재롱에 손뼉을 치며 열광하는 어른들이 클로즈 업 될 때, 자막으로 흐르는 노랫말이 천연덕스러운 아이 얼굴을 스칠 때, 일말의 씁쓸함이 순간순간 목덜미를 훔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른바, “카수”의 3대 요소로 ‘가창력’, ‘음색’, ‘감정’을 꼽는다. 가창력과 음색은 타고난 것이거나 ‘조용필’처럼 피를 토해가며 목을 갉음으로써 비로소 ‘득음’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 세 가지 중 베낄 수도 덧낼 수도 없는 것은 필경 감정일 것이다. 대중음악 가운데에서도 트로트는 절절한 감정을 음색에 얹어 나름의 리얼리티에 몰입하는 장르라 할 수 있다. 사랑과 눈물, 절망과 환희, 반목과 화해 등등 인간의 애환으로부터 우려 낸 감정들을 음률에 실어 공유하는 세상사의 본질에 가장 감치는 노래임이 분명하다. 가창력보다는 음색, 음색보단 감정이 우선이어서 같은 곡조를 저마다의 감흥으로 휘청거리는 노래방의 목소리들이 딴엔 그럴듯할 것인데 어린 것의 가슴에서 ‘송대관’의 「네 박자」가 흘러나오다니 원!
가요의 세 가지 관점을 대비하여 시를 읽는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가창력을 수려한 문장, 음색은 감각이나 이미지, 감정을 정서로 치환해도 무방하다면 한결 재미있고 각별한 시 읽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외람되지만 그렇게 박미경을 읽었고 결국은 감정 즉, 바탕의 정서에 치중하여 「거미줄」,「납골당」, 「미나리」등에 밑줄을 그었다.
박미경의 시에 두드러지는 것은 서사다. 시편마다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오래 답습해왔던 삶의 모습들을 날것 그대로 행간에 투사한다. 한 타래의 서사를 단편의 시에 담아내는 솜씨가 남다르다. 서늘하고 구수하고, 딴전부리듯 넉살을 짓기도 하는 그 텍스트들을 이끄는 것은 가창력도 음색도 아니다. 바로 감정이다.
그 감정의 색깔은 투명하다. 공연한 엄살을 떤다던지 과장된 포즈를 취하지 않고 담담하게 정황 속을 잠입하여 화자의 공감대를 형성시킨다. 그에 따르는 것이 현장성의 화법인데 그 점 또한 그의 개성으로 치부할 만하다.
사실 박미경의 시편들은 낯설지 않다. 기존의 리얼리티에 충실한 편이다. 의식과 감각의 새로움을 간구하는 현대시의 방향성을 타진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삶의 본질에 대한 인간정신의 분얼을 시라 할 때 그것의 파생영역은 그리 넓지가 않으므로, 박미경 자체에 대해 조금은 수다스럽다거나 시적 진술에 있어 자조적 색채를 띤다는 점에 조심스런 사족을 단다.
이제, ‘박미경 시인’이다.
가창력과 음색과 감정을 두루 갖춘 시인이 되길 바란다. 감정만으로 절창을 꿈꾸어도 좋다. 다만, 가창력만 가진 아이가 되지 말기를, 목소리만으로 통속하는 이들이 아주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는 트로트이자, 트로트는 아니다.
/김유석(글), 장종권.
│수상소감│
뒤꿈치 들고 살금살금 따라 걸을 터
도대체 시는 왜 쓰려고 하지, 자주 자문했다. 답을 찾지 못해 오랜 시간 게을렀다. ‘시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너무도 커 독자로 살겠노라 선언(?)도 여러 번, 문득 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조바심이 생겼다. 여전히 빈한한 글쓰기에 절망하며 쭈뼛거리는 내게, 용기를 주시고 이끌어 주신 선생님께 기대 슬쩍 발을 들이민다. 누가 되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이 한 짐이다. 커서 시인이 될 줄 알았다는 동네 오빠의 말속에서 티끌만한 싹을 찾아내고, 사차원이란 별명의 의미를 상상력이라 애써 위안하며 감히 시작을 시작하려 한다.
치열하게 시작에 전념하는 분들에게 많이 부끄럽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의 염치로 뒤꿈치 들고 살금살금 따라 걷겠다. 갈 길이 너무 멀다. 그러나 바늘허리 매어 쓰지 못함도 기억하겠다. 어설픈 제 손 잡아 주신 《리토피아》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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