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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미니서사/김혜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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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15회 작성일 23-01-0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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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미니서사/김혜정/비 


김혜정 소설가




비는 한 달째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비가 퍼뜨린 바이러스에 감염된 섬사람들의 절반이 죽었다. 내가 섬에 온 뒤 한 시간쯤 지나 비가 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비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섬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섬을 탐방하기 전에 섬에 대한 자료를 찾느라 다른 것은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런데 투숙객 중 한 사람이 호텔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감염된 거였다. 그날 밤 호텔 매니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호텔 문을 걸어 잠갔다. 섬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호텔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이제 호텔에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채 열 명도 안 되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호텔을 빠져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의 생사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서로 거리를 두다 못해 경계했다. 나는 우연히 술자리를 함께한 두 사람과만 말을 트고 지냈다. 애인과 함께 왔던 호텔에 애인과 헤어진 뒤 혼자 왔다는 이십대 여자와 얼마 전까지 회사원이었다는 사십대 사내. 그는 이 섬이 고향인데 회사를 그만두고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나는 섬 탐방 기사를 쓰려고 인근의 섬을 향해 가다가 이 섬에 끌려서 도중에 내렸다. 여자는 한시라도 빨리 섬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 사내는 무심했고, 나는 비가 그쳐주기만 기다렸다. 

나는 샤워를 하고 식당 겸 카페로 올라갔다. 두 사람을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사내가 먼저 나와 와인을 마시며 창밖의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잔 하실래요?”

이 호텔에서 마지막 남은 와인이었다. 나는 좋죠, 하고 잔을 들었다. 사내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원래는 앞쪽 해안선에 섬들이 보였는데 이제 섬들의 윤곽조차 찾을 수 없네요. 비가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지워버린 거죠.”

  남자가 말했다. 비가 지워버린 것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만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도 지워버렸다. 비가 그치지 않는 한 누구도 앞날을 예측하지 못했다.

“한 달 전에 동생이 죽었어요.”

건조한 말투로 사내가 말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제가 동생을 죽였어요.” 사내의 부모가 일찍 돌아가신 뒤 사내는 열 살 터울인 동생을 키우다시피 했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사내는 뭐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인이 된 동생은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나중에는 술로 시간을 탕진했다. 한 달 전 동생이 마지막으로 50만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게 동생을 위한 일이라고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날 밤 동생은 자기 방에서 목을 맸다. 동생의 유골함을 들고 고향으로 왔는데, 그날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유골함은 아직 호텔 방에 있다.

여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흰색 블라우스에 물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비를 맞지 않고 호텔 밖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를 알아냈어요. 그동안 사라진 사람들 말예요, 그 통로로 빠져나간 거였어요. 오늘 자정에 통로 끝으로 헬기가 올 거예요. 마지막 헬기래요.”

나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브라보를 외치는 대신 사내를 쳐다봤다. 저는 여기 남을 겁니다,라고 사내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이 호텔 정도면 삶의 최후를 맞기에 괜찮은 곳이죠.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내가 일어섰다. 건조한 말투였지만 비에 흠뻑 젖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자정에 봬요.”

여자가 말했다.

나는 멀어져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왠지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여자와 나는 침묵을 지키며 남은 와인을 마셨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





*김혜정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 당선.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영혼 박물관』. 장편소설 『달의 문門』, 『독립명랑소녀』. 간행물윤리위원회(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송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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