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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미니서사/유시연/그녀의 적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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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276회 작성일 23-01-0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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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미니서사/유시연/그녀의 적막 


유시연 소설가


그녀의 적막



그 무렵 그녀는 지쳐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다.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적막과 너른 들과 고독이었다. 자기만의 방을 찾아 그녀는 오래 방치해둔 충청도 외딴집 오두막으로 스며들었다. 서울에서 모임이 끝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그녀의 오두막에 당도하였을 때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먹을 거라곤 된장 고추장 간장밖에 없었다. 묵은 쌀에서는 군내가 났다. 냉장고에 넣어둔 쌀을 꺼내 물에 불려 놓았다. 평소 같으면 무서움을 타는 성격이지만 그녀는 쉼이 필요했고 다른 것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혼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휴식이 되었다. 앞마당과 뒷마당에서는 감이 익어갔다. 해마다 누군가 감을 통째로 털어갔던 터라 올해는 감을 지키리라는 다부진 결심으로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감시의 눈을 번득였다. 그녀의 하루는 길었다. 

책장에서 『드즈바리 순례』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러시아 출신의 여행작가가 쓴 그루지야 정교회 수도원 기행을 담은 내용이었다. 그루지야 정교회 수도원이라 낯선 용어가 있었지만 전례와 성사는 가톨릭과 같았다. 그루지야(조지아)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독립하였으나 볼세비키 혁명을 겪으며 구소련에 지배당하다가 1991년에야 비로소 독립한 신생국가였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천오백여년이나 되었지만 수도원과 성당은 폐쇄되거나 정부 소유로 방치되어 쇠락의 길을 걸었다. 빛바랜 성화나 무너진 담장과 지붕, 식량 부족을 겪으며 꿋꿋하게 수도원을 지켜가는 수도승들이 있고 그 속에서 또 성인이 탄생되는 현상은 불가사의했다. 

주인공인 베로니카는 많은 수도원을 순례하여 글을 썼지만 그녀의 영혼은 하느님을 향해 가는 여정에 있었다. 여성이 들어갈 수 없는 남성들만의 수도원에 베로니카는 어떤 인연으로 스무날을 기거할 수 있었다. 생에 큰 은총과 독특한 체험을 하며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찬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세속의 가치와 기준에 젖어 있는 주인공에게 수도원장인 미카엘 신부는 끊임없이 각성하는 멘트를 날리며 오만과 교만에 빠진 인간의 탐심을 염려했으나 베로니카가 그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적응해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새 떼가 점령한 집에서 그녀는 아침과 저녁, 뜰을 거닐며 짧은 기도문을 암송했다. 오두막 집 뒤에는 묘지들의 언덕이 있었다. 어느 문중 묘지였다. 예전에도 오두막에 도착하면 맨 먼저 묘지들의 언덕을 쳐다보곤 했다. 그러면 심리적인 부담으로 며칠을 보내야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배낭을 마루에 던져놓고 집 뒤로 올라갔다. 

― 저는 평화를 원해요. 당신도 그러리라 믿어요. 그러니 얌전히 당신의 집에 쉬고 계세요. 저도 제 집에서 그럴 거예요.

영혼들에게 속마음을 내비치고는 둥그런 봉분을 바라보았다. 더 없이 적요하고 단조로운 시간이었다. 그녀는 영혼들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믿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이른 아침 눈을 뜨자 새들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두 팔을 크게 벌려 기지개를 켰다. 노란 금매화가 창문 밖에서 흔들리고 있을 뿐 사방이 조용했다. 멀리 너른 들판에서는 희뿌연 바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오래된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먼지 덩어리가 따라 나왔다. 

긴장이 풀렸는지 졸음이 왔다. 낮잠을 참으려고 마당으로 나와 서성거렸다. 이백여 미터 떨어진 이웃에 사는 여자가 바람 쐬러 가자고 찾아왔다. 여자와는 낡은 오두막을 마련할 때부터 알고 지냈다. 여자의 남편이 젖소 농장을 하다가 환갑이 되는 해에 가수를 하겠다고 목장을 팔아치웠다. 여자는 친구가 없었다. 마을 여자들이 일을 하는 시간에 여자는 혼자 집을 지켰고 몇 년이 흘러 우울증이 왔다. 한동안 여자와 커피를 나누어 마시고 발효차를 마시며 웃고 떠들며 지냈다. 여자의 말은 빨라서 자주 네? 네? 그러고는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충청도 특유의 사투리가 뒤섞여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되묻지 않고 대충 짐작만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마루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여자는 바람 쐬러 가는 것을 잊어버렸다. 해가 지고 있었다. 여자는 저녁밥을 하러 일어났다. 

여자가 갖다 준 반찬통에는 애호박볶음과 김치가 들어 있었다.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더니 참기름 향이 났다. 마루에 앉아 어두워지는 들판을 바라보는데 희끗희끗한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오래된 옛날 노래가 들려왔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니이임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우운다. 목장을 접고 가수가 되겠다는 남자일 터였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커다란 창고가 그의 집 옆에 생겼는데 여자 말로는 노래 연습실이라고 했다. 남자의 트로트 노래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며칠이 지나자 떠나온 집이 궁금해졌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오두막에 남아 있고 싶은 마음이 왔다갔다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차츰 오두막 생활에 적응해갔다. 이웃집 여자가 가끔 반찬을 만들어서 갖고 왔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과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때때로 신과 대화하는 것인지 바람과 새 떼와 나무들과 대화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되는 채로 시간이 갔다. 밤마다 이웃집 남자의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잠결에 아~ 아~ 수덕사의…… 노랫말이 귀에 감겼다. 이웃집 여자가 왔을 때 남자의 노래에 대해 물었더니 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이십 대에 돈 때문에 가수가 되지 못했는데 전국노래자랑에서 대상을 받은 후 자신감을 회복했다며 쓸쓸하게 웃었다.   

보름이 지나자 그녀는 입안에서 맴도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하는 노랫말이 입에서 흘러 나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어버렸다. 잠을 잘 때도 아침에 일어날 때도 마당에 풀을 뽑을 때도 속세에 두고 온 니이임, 하는 노래가 입안에서 생성되어 굴러다니는 것에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배낭에 짐을 꾸렸다. 택시는 읍내에서 십 분이면 도착할 것이었다.  





*유시연 2003년 『동서문학』 단편소설 신인상 당선. 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오후 4시의 기억』, 『달의 호수』, 『쓸쓸하고도 찬란한』.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 『바우덕이전』, 『공녀 난아』, 『벽시계가 멈추었을 때』 등이 있음. 정선아리랑문학상, 현진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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