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61호/특집/제 6회 김구용문학제/남태식/집중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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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시
남태식
집중
안개가 짙다.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 집중해야만 한다.
안개의 몸피를 더듬어 가늠하고 손가락 발가락의 수를 세어보아
야 한다. 안개의 표정은 맑은가 어두운가, 입술은 여태껏 앙다문 체
인가 배시시 열리는 중인가, 안개의 속살은 두꺼운가 부드러운가 또
얼마나 깊은가 음습한가 헤아려보아야 한다. 안개의 속살 사이에 들
어앉은 나무와 풀과 집과 그 안의 숨결들, 웃음들, 빈 들판의 눈물들,
쉼 없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한숨들을 코로 귀로 숨으로 느껴야 한
다. 감전된 듯 감전된 듯 온몸을 떨어야 한다. 언젠가는 걷힐 안개에
뒤따르는 햇살, 뒤따라 날아오르는 새 떼들의 날갯짓 따위는 잠시,
어쩌면 오래도록 잊어야 한다.
바야흐로 때는 안개가 짙을 때, 어김없이 안개가 짙고, 지금 우리
는 오직 이 안개에만 집중해야 한다.
무너져라, 벽
큰 집 대문과 무덤 사이에
벽이 있다.
귀를 잃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벽은
눈을 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벽은
입을 잃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벽은
번듯한 군대마냥 나름 꿋꿋하고
도시에 쏟아진 폭설처럼
호들갑스러우나 시방 더 이상 자라기를 멈춘
피로한 식물이다.
가로막은 벽 이 편 무덤가에는
큰 집 대문을 향해 나아가는
무덤을 뛰쳐나온 거듭 거듭나는
여러 무리의 새 아이들
벽을 무너뜨려라.
쿵!
한 무리의 아이들이 앞서며 땅을 밟으니
쿵! 쿵!
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뒤이어 땅을 밟고
쿵! 쿵! 쿵!
또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연이어 땅을 밟는다
무너져라, 벽!
무너진다, 벽!
다시 불리어진 노래
어수선 산란한 바람에 휘둘리는 밤과 새벽까지 피울음을 삼키는
아침의 날들이 있었다.
들지도 깨지도 않은 피 먹은 듯 늘 붉은 눈의 잠이 있었다.
노래가 있었다.
기억의 실을 자아내지 않고도 추억의 그물을 촘촘히 짜 때때로 향
수를 불러일으키는 반복해서 들려주어 반복해서 듣던 노래가 있었다.
그 노래가 불리어졌다.
일순간 과거에 사로잡힌 세뇌된 광신의 무리들에게서 집단적으로
불리어진 향수의 노래에 오래 애써 쌓은 둑이 무너졌다.
그 시절, 우리가 반복해서 듣던 노래는 무엇인가.
그 후, 우리가 오래 애써 쌓은 둑은 또 무엇인가.
향수의 노래를 부른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묻는 사이,
밤을 휘두르는 어수선산란한 바람과 새벽까지 삼키다가 아침을
맞는 피울음의 공포로 들지도 깨지도 않은 붉은 눈의 잠이 다시 이
어졌다.
이미 꽃
공기 정화를 위해 한 10년 거실에 놓아둔
금전수 산세베리아가 연달아 꽃을 피웠다.
어머, 꽃이 피었네!
금전수 산세베리아도 꽃 피는 몸?
금전수 산세베리아의 꽃을 보고 알았다.
모두 몸속에 품고 있는 꽃.
아이야 0교시에는 뭐하니? 자요.
야자에는 뭐하니? 자요.
아이들은 처음부터 이미 꽃.
애초부터 놀면서 피는 꽃.
문을 연다. 가위를 놓는다.
철사를 푼다, 버린다.
기형의 몸 위에 피우는 꽃도
애써 꽃이기는 하겠지만
꽃은 자유롭게 피는 것.
자유의 몸에서 꽃다운 꽃으로 스스로 피는 것.
금전수 산세베리아가 꽃을 피웠다.
그 꽃 보고 새삼 느끼는
보든 안 보든 꽃인 아이들.
피든 안 피든 이미 모두 꽃.
쓰나미가 오는 밤
삼십 년 전 울진, 핵비가 내리면 어쩌나,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작은 무덤들과 아직 짓지 않은 큰 무덤들 사이에서 다 죽어 서성이
던 그날 밤,
나는 보았다.
벌떡 일어선 파도가 성큼성큼 먼 바다에서 가까운 바다로 쏜살같
이 달려와 작은 포구와 낮은 집들을 굶주린 짐승처럼 순식간에 게걸
스레 먹어치우는 것을,
뒤집혀 흰 눈자위 드러내며 언덕을 기어오른 짐승의 거친 이빨에
깊숙이 물어뜯긴 아직 짓지 않은 큰 무덤들의 벌려진 지붕 사이로
솟구치던 핵비를,
죽어 작은 무덤들에 누웠다가 놀라 일어나 쏟아지는 핵비를 폭풍
으로 맞고 핵파도에 휩쓸려 넘실넘실 물위를 퉁퉁 불어 떠다니는 돌
아갈 기약 없는 얼굴들을,
그 때 이미 내게 온 바로 삼십 년 후 엊그제의 후쿠시마를.
하나, 어찌 알았으랴.
그날 밤 물어뜯긴 이빨 자국을 숨기며, 그 언덕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던 내가 그 후쿠시마를 정말 만나 쓰나미보다 더 크게 눈자위를
뒤집으며 또 죽게 될지를.
숨은 꽃
어떤 이에게 사랑은
벼랑 끝에 핀 꽃이다.
굳이 숨기지 않더라도
숨은 꽃이다.
사랑의 절정! 같은 말은 어울리지 않아라.
가슴 깊숙이 감춘 손은 오래 전에 자라기를 멈추었으니.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 사랑은
손닿을 수 없는 벼랑 끝의 영원히 손닿지 않는 꽃이다.
<심사평>
예리한 풍자의 칼날
2015년은 다른 해보다 유독 시집의 출판이 왕성한 한 해였다. 한 권의 시집이 세상에 나와 독자들의 입에 좀 회자되는가 싶으면 , 또 다른 시집이 나와 독자들의 관심이 또 옮겨가는 일들이 많았다. 그 주기가 유난히 짧은 한 해였다. 개별적으로 놓고 보아 좋은 시집들이 많이 나온 셈이지만, 그 세계 면에 있어서는 이 몇 년 사이의 주제의식을 크게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를 보여준 경우는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또 그 전의 자기 세계를 더욱 발전시킨 경우도 많지 않았다. 그 사이 ‘신경숙 표절 사건’이 있었고, 기존의 문학 제도에 대한 다각적인 반성이 있었다. 대형 잡지사의 편집진이 개편되었고, 기성 잡지와는 차별되는 독립잡지들이 두어 종 생겨나서 제법 호응을 얻고 있다. 시단에서는 ‘표절’ 문제에 대해 그리 깊이 있는 논의가 없이 오불관언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는 느낌이지만, 정말 그래도 좋은지 의문이 든다. 문예지를 넘겨보면, 거의가 비슷한 이야기만 하고 있고, 신춘문예나 신인 투고의 당선작들은 해마다 표절 시비에 휩싸이고 있는데 자정 노력이 없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요령부득의 시를 좋은 작품이라고 상찬하는 평론가들이 적지 않고, 거기에 상을 주고 그 띠지를 시집에 둘러 파는 대형출판사들도 있다. 이제 좀 시의 본령인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요설과 말장난이 득세하고 있는 시단의 요즘 추세에 비추어 볼 때, 『망상가들의 마을』에서 남태식이 보여주는 소탈하고 직정적인 언어는 퍽 예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망상가들의 마을’로 변해버린 욕망의 대한민국에 대한 그의 야유 섞인 풍자는 ‘헬조선’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작금의 한국사회에 대한 상당히 집요한 탐구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특히 괄목할 만하다. 4대강 사업, 실업 문제, 세월호 사건, 입시지옥에 대한 그의 비판적 사유, 사회학적인 상상력은 한국 시단의 한 전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풍자의 칼날이 예리한 것은 물론 그의 현실 인식은 적절한 비유와 상징으로 알맞게 굳혀져 그 깊이에 있어서도 손색이 없다. 이번 시집에는 ‘죽음’의 이미지가 끈질기게 되풀이 하여 나타나고 있거니와, ‘안개’나 ‘무덤’, ‘벽’에 관한 그의 관심은 앞서 언급한 사회학적인 상상력들과 서로 얽히면서 ‘죽음’의 의미적 외연을 넓히고 있다. 그러나 이 ‘죽음’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시집에서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는가 하면, ‘꽃’에 대해서도 끈질기게 쓰고 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어떤 실존적 한계상황을 ‘무너뜨리고’ 신생의 길, 사랑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반복과 열거의 리듬, 그 언어적 율동감은 그의 시 세계에 있어서 또 다른 진경을 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망상가들의 마을』은 남태식의 세 번째 시집이다. 그의 묵묵히 걸어온 시력과 겸손후덕의 인품까지를 감안하여 그의 세 번째 시집을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시집으로 선정한다. 부디 상의 무게에 짓눌리지 말고 더 크고 깊은 시 세계로 정진해 가시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 강우식, 허형만, 장종권
<수상소감>
함께 아파야 했던 기록
2010년 여름에 낙동강 칠백리 길을 혼자서 걸었습니다. 20대 초반 몇 년 간 백수로 혼자서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며 산 적이 있었는데,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럿이서 하는 도보여행에 함께 한 적이 가끔 있긴 했지만 혼자서 하는 도보여행은 그 때 이후로 전혀 못했습니다. 오십을 넘기면서 더 늦으면 하고 싶어도 혼자서 하는 도보여행은 다시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오십을 넘긴 그 해 혼자서 하는 도보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 첫 도보여행길이 낙동강 칠백리 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출발하여 강릉까지 오는 동해안 바닷길을 걷는 것으로 목표를 정했습니다. 이 길은 역시 20대 초반에 혼자서 도보여행을 한 적이 있는 길이었고, 혼자서 자전거 여행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추억을 떠올려보고도 싶었고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담아 준비를 마쳤는데 출발하기 임박해서 4대강 관련 기사를 읽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동해안 바닷길은 나중으로 미루어도 괜찮지만 4대강은 지금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도보여행이라고는 하지만 4대강 보 공사현장을 중심으로 해서 걷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행이라기보다는 답사라고 이름 지어야 하지 싶습니다. 부산에서 출발해서 일주일간 함안보, 합천보, 달성보, 강정보, 구미보, 상주보 주변을 걸었는데, 보 공사현장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서 가는 곳마다 자치단체에 먼저 들러 위치를 확인한 후 찾아갔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한 곳 두 곳 보는 곳이 늘고, 하루 이틀 날이 지나면서 모르는 사이 가슴을 많이 다쳤다는 것을 여행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야 알았습니다. 애초 시를 쓸 목적으로 한 여행이 아니었는데 몇 달 지난 뒤 시를 써야 하게 되었을 때 자연스레 가슴에서 제일 먼저 터져 나온 시들이 4대강 관련 시들이었습니다. 제 이번 시집 『망상가들의 마을』2부에 실린 4대강 관련 시들은 이렇게 써 진 시들이고, 제 이번 시집『망상가들의 마을』은 또한 이렇게 4대강을 포함한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아픈 일들을 겪으면서 함께 아파야 했던 제 아픔의 기록입니다. 혼자 공부를 하면서 스스로 스승으로 모시게 된 선생님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이런 선생님들은 비록 책으로이기는 하지만 늘 가까이 하고 자주 찾아뵙습니다. 김구용 선생님도 제 스스로 스승으로 모셔 늘 가까이 하고 자주 시로 찾아뵙는 선생님 중의 한 분이십니다. 시로서 아직 많이 모자라는 제게 이런 상을 주신 것에 대하여 고마우면서도 한편 부끄럽습니다. 이 부끄러움은 앞으로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갚아 나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수상자 : 남태식
**약력: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
답다』,『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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