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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특집/제 6회 김구용문학제/권경아/부조리한 세계에 맞서는 공존의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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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세계에 맞서는 공존의 기획
― 남태식 작품론
권경아
1.
남태식의 『망상가들의 마을』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에 대한 저항을 드러내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근대는 자본주의의 기획과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초래한 비자본주의적 저항들이 공존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근대성의 개념은 근대가 자본주의적 기획과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초래한 비자본주의적 기획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의 역사라는 인식은 이러한 맥락에 있다. 즉 근대는 낙관적 전망으로 진행되던 자본주의적 기획과 함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예술은 다양하게 반응하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칼리니스쿠는 19세기 전반의 한 시점에서 서구 문명사의 한 단계에 속하는 모더니티와 미적 개념으로서의 모더니티 사이에 역전 불가능한 균열이 생겨났다고 지적하며 근대성의 개념을 부르주아 근대성과 미적 개념으로서의 근대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 자본주의에 의해 야기된 광범위한 사회 경제적 변화의 산물인 모더니티는 진보의 원리, 과학과 기술의 유용한 활용 가능성에 대한 신뢰, 시간에 대한 관심, 이성숭배, 그리고 추상적 인본주의의 틀 안에서 정의된, 그러나 동시에 실용주의 내지는 행동과 성공의 숭배를 지향하는 자유의 이상, 이들 모두는 근대를 위한 투쟁에 연루되어 왔으며 중산층에 의해 수립된 승승장구하는 문명의 핵심적인 가치로 보존되고 증진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적 모더니티는 자신의 낭만적 시초에서부터 근본 개혁적인 반부르주아적 태도로 기울어져 중산층의 가치척도를 혐오했으며 폭동, 무정부주의, 묵시론에서 귀족적인 자기유폐에 이르는 극도의 다변화된 수단을 통해 자신의 역겨움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즉 미적모더니티는 부르주아 모더니티에 대한 철저한 거부 및 소멸적인 부정적 열정이라 할 수 있다.
남태식의 시들은 부르주아 모더니티가 야기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며 자본주의가 팽배해진 현대 사회에 대한 저항과 부정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대는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짙게 깔린 세계 속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안개에 집중하는 것이다.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 집중해야 한다”(「집중」)는 시인의 진술은 부조리와 모순이 가득한 세계를 직시하겠다는 의지와 다름아니다. 어두운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보며 그 어둠의 밑바닥을 “언젠가는 걷힐 안개에 뒤따르는 햇살”로 비추고자 하는 기획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태식의 『망상가들의 마을』은 어두운 세계를 향해 포효하는 외침이라 할 수 있다.
2.
이 양치기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들판 가운데 버려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착한 양치기.
붉은 안개를 몰고 다니는
노을을 등진 늙은 양치기.
(근대화양치기친일양치기반공양치기사대주의양치기신자유주의양치기시장만능싹쓸이양치기자유민주주의양치기역사망각양치노예육성양치기……)
수시로 붉은 안개 속에 얼굴을 감추고
이념의 모자를 바꾸어 써도
모자 아래의 이마는 늘 탐욕으로 번지러워
근본은 전혀 바뀌지 않는
1%
기득권자.
들판 가운데 버려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잃었다는 한 마리의 양까지 끝끝내 찾아서 가두네.
― 「양치기」 전문
이 시에서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고 있는 착한 양치기는 실상 착한 양치기가 아니다. “붉은 안개를 몰고 다니는” 늙은 양치기로 인해 세계는 안개로 가득하다. 수시로 안개 속에 추한 얼굴을 가리고 탐욕을 “이념의 모자”를 바꾸어 쓰고 있는 양치기. 비록 “착한 양치기”로 위장을 하더라도 그의 탐욕을 숨겨지지 않는다. “1% 기득권자”가 쓰고 있던 “이념의 모자”.
선한 목자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찾아 나섰다지만 “착한 양치기”의 가면을 쓴 기득권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마리 양만을 가진 사람의 그 양 한 마리를 뺏어버리는 마는 것이 이 세계이다. 그들이 뿜어대는 안개로 자욱해진 세계. 그것이 ‘근대화,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유로 그들이 감행하고 있는 억압이며 폭력임은 물론이다.
안개가 짙다.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 집중해야만 한다.
안개의 몸피를 더듬어 가늠하고 손가락 발가락의 수를 세어보아야 한다. 안개의 표정은 맑은가 어두운가, 입술은 여태껏 앙다문 체인가 배시시 열리는 중인가, 안개의 속살은 두꺼운가 부드러운가 또 얼마나 깊은가 음습한가 헤아려보아야 한다. 안개의 속살 사이에 들어앉은 나무와 풀과 집과 그 안의 숨결들, 웃음들, 빈 들판의 눈물들, 쉼 없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한숨들을 코로 귀로 숨으로 느껴야 한다. 감전된 듯 감전된 듯 온몸을 떨어야 한다. 언젠가는 걷힐 안개에 뒤따르는 햇살, 뒤따라 날아오르는 새 떼들의 날갯짓 따위는 잠시, 어쩌면 오래도록 잊어야 한다.
바야흐로 때는 안개가 짙을 때, 어김없이 안개가 짙고, 지금 우리는 오직 이 안개에만 집중해야 한다.
―「집중」 전문
시집의 첫 장에 실린 이 시는 “이념의 모자”를 쓴 “착한 양치기”가 몰고 다닌다는 ‘안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세계는 이미 짙은 안개가 깔려있다.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드리워진 안개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부조리와 모순이 가득찬 세계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 부조리와 모순의 실체를 직시하는 것이다. 지금은 안개가 짙은 때이다. “지금 우리는 오직 이 안개에만 집중해야 한다.” “안개의 몸피를 더듬고 가늠하고 손가락 발가락 수를 세어” 그것의 실체를 분명히 파악하고 그 대책을 논의해야 할 때인 것이다. 시인은 “언젠가는 걷힐 안개에 뒤따르는 햇살”이 있음을 믿고 있다. 그러나 햇살은 준비하고 대비하는 자에게만 오는 것. 시인은 새로운 시대를 기획하고 있다. 그 시작이 바로 세계를 직시하는 것이다.
퇴근길 서울 여의도 거리에서는 실직한 30대 전직회사원이,
오후 울산의 단골가게에서는 무직의 20대 청년이,
심야 수원의 어떤 가정집 거실에서는 술에 취한 일용직 30대 노동자가,
칼을 휘둘렀다.
모두 지난 한 주에 일어난 일이다.
퇴근길 서울 여의도 거리에서는 분노한 30대 전직회사원이,
오후 울산의 단골가게에서는 절망한 20대 청년이,
심야 수원의 어떤 가정집 거실에서는 술에 취해 자포자기한 30대 노동자가,
칼을 휘둘렀다.
모두 지난 한 주에 일어난 일이다.
뭉뚱그려 우리는 이 모두를 묻지 마 범죄라고 부른다.
묻지 마 하류, 묻지 마 벼랑 끝,
묻지 마 칼부림, 묻지 마……
퇴근길 서울 여의도 거리에서는 분노한 하늘이,
오후 울산의 단골가게에서는 절망한 하늘이,
심야 수원의 어떤 가정집 거실에서는 자포자기한 하늘이,
칼을 휘둘렀다.
모두 지난 한 주에 일어난 일이다.
― 「하늘」 전문
이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절망과 고통으로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한다. “묻지마 칼부림”에 대한 소식에 시인은 그들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본다. 지난 한 주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은 모두 평범했던 사람들이 저지른 일들이다. “실직한 30대 전직회사원”이나 “무직의 20대 청년”, “술에 취해 자포자기한 30대 노동자”가 칼을 휘둘렀다한다. 그들은 모두 어느 한 가정의 ‘하늘’이었는데 그 ‘하늘’이 무너져버렸다. ‘분노, 절망, 자포자기’가 그들을 무너뜨렸다.
무너지고 있는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다. 어린 꽃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입시제도의 문제는 이제 낯설지도 않을 정도이다. “일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아이들의 죽음.(「물망초勿忘草」) 무엇이 이들을 무너지게 했는가. 무엇이 그들을 분노케 했으며 절망하게 했는지 시인은 그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3.
일어서자.
어깨를 곧추세우고 꿇은 무르팍을 펴고
일어서서 맞서서 요구하자.
빈손은 벼랑 끝에 모인 물길
거대한 물줄기
쏟아지는 폭포
폭포처럼 요구하자.
폭포의 소리는 곧은 소리
곧은 소리를 부르는 곧은 소리
산을 뒤엎는 포효하는 함성
우리는 버러지가 아니다
우리에게 구걸을 명령하지 마라
천부는 애써 품 들이지 않는 것
우리의 빈손에 천부의 금전 은전을 채우라고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로운 삶을 사는 세상
탐욕을 부릴 필요도 굶주림도 없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세상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가 되는 세상을 위하여
엎드려서 구부려서 받는 구걸은 멈추고
차근차근 한 걸음을 지레 설정해놓고
한 발짝도 못 떼고 지레 물러서는 비굴은 멈추고
어디 하나 둘 셋 폭포가 나누어서 쏟아지더냐
한꺼번에 쏟아지는 저 폭포처럼
요구하자.
─ 「모든 이에게 기본소득을 허許하셨으니」 부분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소시민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우리들은 이제 일어서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일어서서 맞서서 요구하자”고 시인은 일어서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일어서자’고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함께 모이면 그것은 “거대한 물줄기 쏟아지는 폭포”가 될 것이다. 시인은 “폭포처럼 요구하자”며 외치고 있다. “폭포의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산을 뒤엎는 포효하는 함성”은 반드시 세상을 뒤흔들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시인이 포효하는 이유이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로운 삶을 사는” 탐욕도 굶주림도 없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세상” “마침내 하나가 되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함께 일어서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나누어 쏟아지는 것은 폭포가 아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저 폭포”처럼 한꺼번에 일어서 맞서야 힘이 됨을 시인은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가로막은 벽 이 편 무덤가에는
큰 집 대문을 향해 나아가는
무덤을 뛰쳐나온 거듭 거듭나는
여러 무리의 새 아이들
벽을 무너뜨려라.
쿵!
한 무리의 아이들이 앞서며 땅을 밟으니
쿵! 쿵!
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뒤이어 땅을 밟고
쿵! 쿵! 쿵!
또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연이어 땅을 밟는다
무너져라, 벽!
무너진다, 벽!
― 「무너져라, 벽!」 부분
일어나자!
솟구치자!
벗기자!
무너뜨리자!
우우우 함께 외치니
앞에 보이는 건
갈라져 솟구치는 잠의 강
부서져 흩어지는 무덤의 먼지
벗겨져 물러서는 무덤의 안개
무너뜨리지 않으면 감옥이라고 불릴
벽, 막아서는, 무너지는, 벽!
─ 「다시, 촛불」 부분
무덤가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 가로막은 벽으로 인해 큰집 대문에 이르지 못하는 아이들. 벽을 무너뜨려야 큰집에 다다를 수 있다. 무덤을 벗어나지 못하던 아이들은 드디어 용기를 낸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땅을 밟고 밟는다. 혼자서는 힘들던 것이 함께라면 가능하다. “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또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연이어 땅을 밟을 때 드디어 벽은 무너진다. 해서 우리는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야 무너뜨릴 수 있다. “우우우 함께 외치”는 함성으로 이루어 낼 수 있다. “무덤의 먼지”와 “무덤의 안개”는 부서져 흩어지게 할 수 있다. “무너뜨리지 않으면 감옥”인 ‘벽’. 우리를 막아서는 벽이 이제는 “무너지는 벽”이 될 수 있음을 시인은 알고 있다.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4.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종일을 피어 있는 꽃이 있다.
한낮에나 어슬렁거리고 나와 한나절만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종일을 싸돌아다니다가 해질 무렵 잠깐 피는 꽃도 있으며,
낮에는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달뜨는 밤에만 나와 피는 꽃도 있다.
여러 철을 이어서 피는 꽃도 있지만, 봄에만 피는 꽃도 있고,
여름에만 피는 꽃도 있으며, 가을에만 피는 꽃도 있다.
겨울에만 피는 꽃도 있고, 언제 피었지? 모르는 새 지나간 꽃도 있으며,
피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끝내 안 피는 꽃도 있다.
어떤 꽃이 보기에
한낮에 피는 꽃은 한나절을, 해질 무렵 피는 꽃은 종일을 논 꽃,
밤에만 피는 꽃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꽃일 수 있다.
한 계절만 피는 꽃은 집 말아먹을 꽃,
모르는 새 피었다가 진 꽃은 멍청한 꽃,
끝내 피지 못한 꽃은 말을 말아야 할 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늘은 언제나 어김없이 모든 꽃들에게
고루고루 물과 바람과 흙과 햇빛을 내리시고,
꽃들은 또 고루고루 내리시는 하늘을 탈 잡지 않으며,
제 필 때를 알아 피고 함께 피어 있으니,
누가 보시더라도 이건 공정하고 조화롭다.
상식의 집에서의 일이다.
상식의 집에서는 이건 그냥 상식이다.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듯,
호흡이 또 상식이듯.
─ 「놀며 피는 꽃」 부분
시인이 공존의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로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것. 각자 서로 다르면 다른대로 서로를 인정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 종일 피어 있는 꽃도 한나절만 피어 있는 꽃도 있듯이. 봄에만, 아니면 가을에만 피는 꽃이 있듯. 끝내 안 피는 꽃도 있듯. 서로 다른 모습 그대로 서로를 시기 질투하지 않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 “하늘은 언제나 어김없이 모든 꽃들에게 고루고루 물과 바람과 흙과 햇빛을 내리시”는 것처럼 꽃들은 “하늘을 탈 잡지 않으며 제 필 때를 알아 피고 함께 피어 있”는 것처럼 인간 또한 함께 피어 있기를 시인은 갈망하고 있다.
꽃들이 창백하다.
이 집에 든 꽃들이 창백하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이름만으로도
앞뒤 어떤 꾸밈말 없이
색깔만으로도 어울림만으로도
어여쁘고 빛나는 이름들이
이 집에 들어 창백하다.
하늘의 무지개
하늘의 별도 이 집에서는
경쟁이다!
전쟁이다!
모두,
창백하다.
─ 「꽃과 새가 있는 집」 부분
꽃들은 “앞뒤 어떤 꾸밈말이 없이 색깔만으로도 어울림만으로도” 이미 어여쁘고 빛나는 이름들이다. 빨강꽃, 주황꽃, 노랑꽃, 초록꽃이라는 색깔만으로도 꽃은 더 이상의 이름이 필요치 않는다. 함께 어울려 피어있는 것만으로 이미 꽃인 것을. 인간들 또한 이리 함께 어울려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없을까. 그러나 인간의 집에 든 꽃들은 창백하다. “이 집에 들어 창백하다”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던 것들이 인간의 그들 아래에서는 창백해지고 마는 것이다. “하늘의 무지개”도 “하늘의 별”도 인간의 집에서는 ‘경쟁’이고 ‘전쟁’이 되어버리고 모두 ‘창백’해지고 마는 현실이 피폐하기만 하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이 “협력의 물결”이라 말한다. “공생의 바람”이 이파리를 흔든다면 “마침내 바뀌는 집”. “마침내 따라 다 바뀌는 세상”을 만날 수 있음을 시인은 믿고 있다. ‘협력과 공생’으로 마침내 바뀔 것이다.
남태식이 무너뜨리고자 하는 벽은 탐욕과 이기와 폭력이다. 그가 원하는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평화로운 삶을 사는”, “탐욕을 부릴 필요도 굶주림도 없는”(「모든 이에게 기본소득을 허許하셨으니」) 세상이다. 자본주의적 근대가 만들어낸 물질만능주의의 만연으로 인간의 탐욕은 극에 달하고 있다. 삶의 가치 하락이나 인간의 소외와 같은 여러 가지 부정적 요소로 작용함은 물론 이제는 생존까지도 위협받고 있다. 궁핍과 인간적 파탄이라는 극도의 현실 상황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추구가 초래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피폐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은 ‘어울림’, ‘공정’, ‘조화’라고 말하고 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공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태식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부조리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 대한 부정을 통해 근대화에 따른 병폐적 모순에 주목하고 있다. 피폐한 현실을 직시하고 어두운 세계 속에서 기획한 전략은 ‘어울림’, ‘공정’, ‘조화’라는 공존이다. 남태식의 『망상가들의 마을』은 어두운 세계를 향해 포효하는 외침이라 할 수 있다. 어두운 세계를 향한 시인의 포효가 절규가 아닌 외침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혼자만의 절규가 아니라 함께하기를 바라는 우리를 향한 외침. 이제 우리가 응답해야 할 때이다.
**약력:2003년 《시와 세계》로 등단(문학평론). 《시현실》 ,《리토피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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