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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신작시/이진욱/꽃낙지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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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진욱
꽃낙지
삽자루를 움켜쥐고 부럿*을 파헤치면
몰락한 양반가 후손처럼 먹물 가득한 선비가 있다
속세를 버리고 오래된 폐허 속에 들어앉아
다시 촉을 펼칠 날만 기다리던 선비
꽃을 피우고 싶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날에는 밤새 먹을 갈며
깊이 침잠하고 있는 것은 차라리 아름다운 침묵이다
가끔 어둠 속에 혼자 사는 맛이 이런 것인가 보다
끌고 가는 것보다 가슴에 진 무게가 더 무거울 때,
사는 것보다 견디고 싶은 마음이 클 때,
나를 비웃듯 아침부터 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
더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때론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둠조차 찾지 않는 수챗구멍에서 눈물이 되어버린
몰락해도
몰락하지 않는 질긴 꽃
*꽃낙지 : 가을 낙지를 나타내는 말
*부럿 : 낙지 구멍
명자를 위하여
―폐교에서
폐교 귀퉁이에 명자가 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울며 서 있다
눈물보다 가벼운 몸으로
쥐고 있던 봄을 툭, 떨어뜨렸다
마른 몸으로는
넘을 수 없는 울타리에 기대어
줄 끊어진 그네처럼 흔들리고 있다
기다림만 피워 올리다가
툭툭 꽃잎을 각혈처럼 뱉고 있다
각박한 마음 한편이 사람을 외롭게 했던 것처럼
손길에서 잊힌 명자가 빈 운동장에서 떨고 있다
발을 멈춰 책 사이에 명자꽃잎 한 장을 모신 뒤
넉넉히 물을 줬다
명자나무에 눈물꽃이 맺혔다.
**약력:전남 고흥 출생. 2012년 《시산맥》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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