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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특집/제 6회 리토피아 문학상/최광임/금기된 영역을 넘어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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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230회 작성일 16-12-3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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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 문학상

최광임




금기된 영역을 넘어설 때

― 최향란 시들에 관하여





   잠재되어 있던 욕망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인간은 가장 활동적이게 되고 생의 충동으로 넘치게 된다. 인간의 성향이나 능력 중 많은 것들은 수십 년간 무의식에 갇혀있다 그 사람의 생과 함께 사라지기도 하지만 어떤 계기를 만나 비로소 살아 움직이게 되는 일 또한 많다. 그 허다한 욕망들의 총체가 인간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그중에서도 예측 불가한 가공의 에너지로 활성화되는 일, 억압의 기제가 강할수록 충동 또한 커지는 일이 우리 삶의 일희일비를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세상과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고 불화하며 때로는 그 기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유를 꿈꾼다. 모든 존재 자체가 불완전한 ‘결핍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있어 욕망의 생성은 당연한 일이다. 산다는 것은 곧, 세상과 자아 사이에서 그 욕망이라는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이며 그것을 생으로 삼는 것이다.
   최향란의 시들 또한 그 시점에서 출발하고 끊임없이 그 지점에서 불화하고 화해하는 생의 에너지가 생성된다.




   그 후로 몇 만년의 날이 지났는지 몰랐다. 접혀있는 날개. 몸이 마르기

전에 그렇게 날아서 향기로운 페르몬 찾던 자유로운 비행의 기억, 어쩌

면 알고 있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너를 그늘에 묻고 입맛은 햇빛에 묻었던

걸까. 웅크렸던 식욕 앞에 수국 분꽃 해바라기 배롱꽃 맨드라미 능소화 아

아, 진수성찬으로 풀어 놓았다. 굳은 근육 활발하게 움직이고 너를 기억해

내니 배가 고프다. 미안하다. 여름 꽃 박혀있는 밖, 참을 수 없다 
                                                                           



                                                                                                                                                              ─「돌나비 화석 앞에서」 전문




    결핍이라는 것은 모자란 것이자 부족한 것이며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거기다 이 결핍이 인간의 욕망을 추동시키며 인간사의 온갖 희로애락을 양산한다. 이렇게 볼 때 결핍은 명백히 부정적 요소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규범과 질서로만 유지되는 이 사회는 인간의 욕망을 윤리규범과 관습 그리고 제도로서 억제시키고 규제한다. 인간이 세상과 불화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결핍을 인간 본연의 입장에서 다시 규정한다면 정 반대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결핍은 아직 넘치지 않은 것이며, 더 채워야 하는 것이고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다. 다시 또 없는 긍정적인 생의 충동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욕망을 키우고 자유를 꿈꾸는 이유이다.
   어쩌면 시인은 전자에 의해 그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을 애써 잠재워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몇 만년의 날이 지났는지 몰랐다”에서 알 수 있듯 어느 정도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으로 인식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돌나비 화석을 보면서 성애적 대상에 대한 사랑의 욕망이 잠들지 않았음을 인식한다. 다만 “웅크렸던” 것뿐이다. 자의든 타의든 억제되었다는 인식에 다다르고 난 후의 의식 활동은 그 기간만큼 상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강화되고 활성화된다. ‘기억’은 언제든 재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기억이 단순 재생의 영역을 담당하는 것이라 한다면 인간의 욕망은 어느 한계에 다다를 것이며 언젠가는 소멸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은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는 것이다. “너를 그늘에 묻고 입맛은 햇빛에 묻었던 걸까”에서처럼 성애적 대상은 사라졌어도 그 대상을 사랑했다는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 다. 그렇기에 성애적 대상에 대한 사랑의 욕망은 전혀 다른 대상으로 현현할 수 있다. 바로 ‘식욕’으로 치환되며 ‘수국 분꽃 해바라기 배롱꽃 맨드라미 능소화’ 등등 사랑의 형상은 수많은 ‘너’로 병치된다.




수직이 아니어도 기어서 당당한 줄사철나무를 만나
차가운 수직의 본능과
신열에 부어올라 들리지 않았던 시간은 헛된 모래시계냐
아직 물음 던지지 못한 눈 내리는 마이산



온 세상에 눈이 내리고 또 내리는데*의사지만 시인이고 싶은 지바고
용납 못할 개인의 자유와
얻을 수 없는 그녀를 껴안았던 시인의 얼음 별장
하얀 눈은 세상의 끝에서 끝까지 휩쓰나니*
눈 내리는 마이산에서 우리는 다시 흰 빛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은수사 마당에 깊게 홀린 겨울 꿈 헤치고 보니
안과 밖에
온 길과 갈 길에
환히 보이는 그 곳에
유치찬란이라 누락 시켰던 야윈 사랑 치욕으로 잊었던 자유가
시인의 금지된 사랑이 온힘 다해 얼음산 기어서 오르는데
거짓말처럼 다 순하다  



줄기에서 뿌리 내려 또 시작하는 줄사철나무처럼
완성은 아픈 상처쯤에서 늘 발아했다 말하려 하는가
오늘은 가장 밝은 귀 열어 생 하나 상량한다



* 러시아소설 『닥터 지바고』 중에서
   

                                                                                               ―「겨울산에 합장」 전문




   앞서 말했듯 시인의 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세상과의 불화나 자신의 욕망과 불화하는 모습은 미미하거나 잠정적일 뿐 두드러지지 않는다. 시치미 뚝 뗀 듯,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하겠다는 방식이다. 이때 촉발되는 욕망의 대상은 대체로 성애적 사랑에 있으나 그것과의 불화도 적거나 봉인되어 있다. 갈등의 시간, 불화의 시간을 이미 겪어낸 후 그것들로부터 한 발 걸어 나온 혹은 이미 벗어났다는 의미의 생략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 규제와 억압과의 불화를 최소화하는 것만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자아를 객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핍된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그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를 객관화 시키는 방식으로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야만 결핍의 욕망이 생의 에너지로 전환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최향란은 알고 있는듯하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줄사철나무의 수직 본능’도 ‘닥터 지바고의 용납 못할 개인의 자유’도 그리고 ‘시인의 금지된 사랑’도 “거짓말처럼 다 순하다”는 것을 최향란은 안다. 그 앞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만, 이 깨달음이 있기까지의 전 과정은 “은수사 마당에 깊게 흘린 겨울 꿈” 정도로 응축되어 있다. 이로써 얼마나 내적 큰 갈등을 겪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겨울 그것도 방이 아닌 마당에 흘린 꿈이라는 것인데 그마저 깊다는 것 정도로 우리는 짐작할 따름이다. 그 과정 이후의 최향란은 비로소 “안과 밖에/온 길과 갈 길에/환히 보이는 그” 경지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배태하게 되었고 비로소 “완성은 아픈 상처쯤에서 늘 발아했다”라는 말을 “가장 밝은 귀 열어 생 하나 상량”하듯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애적 사랑의 대상’이 전혀 다른 새로운 형상으로 현현하는 순간이다. 줄사철나무의 “차가운 수직의 본능과” 이념과 직분을 떠난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의 시인에 대한 꿈과 라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시인의 금지된 사랑”을 “다시 흰 빛으로 태어”나게 생성시킨 셈이다.




한 바구니 가득한 잘 익은 석류 받아 들고
붉은 틈에 정박한 하얀 시절 만나고 있네요
마당가 허물어 깊은 협곡 스스로 만들어 놓고
당연히, 손 놓은 쪽이 아버지라고
꽃다운 젊은 여자 만났으니 끌어주는 이 없다고
홀로 길 잃은 바람이 되었겠지요



오래도록 내 안에 존재하지 않은 아버지
서로를 밀어내는 게 운명인체
그 만큼 더 멀어진 남겨진 사람들
가슴 후벼 파는 말 서로 직접 한 적 없지만
생각의 말이란 입 밖에 내뱉지 않아도 상처에 덧을 내고
지독한 긴 겨울이 되어 서로의 등만을 보게 했지요
미련한 시간아, 어서 빨리 지나가라고
기도한 몇몇 밤 설마 없었겠습니까?
그냥 살짝 벌렸을 뿐인데
아이고, 눈물 별 쏟아지네요
서둘러 허우적허우적 쓸어 담는데
마른 손 마디마디 손톱 끝까지 선홍빛 눈물 고였어요
당신 어쩌면 저 나무를 쭉 사랑하고 있었나요?



놓쳤던 시간도 내 몫, 한 알 한 알 죄다 씹어 먹는데
듣지 못했던 생각의 말이 눈물로 주렁주렁 핍니다



                                                                                          ―「생각의 말」 전문





   화자에게 있어 실존적 결핍이란 “오래도록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그 아버지와 “꽃다운 젊은 여자”와의 관계가 내 안에 아버지의 존재를 거부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그 결핍으로 인해 “가슴 후벼 파는 말 서로 직접 한 적 없”을만큼 격렬한 갈등을 겪지는 않았다. 다만 “지독한 긴 겨울이 되어 서로의 등만을 보”는 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최향란의 시들 중 유일하게 내적 갈등이 도드라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생각의 말’이다. 그럼에도 그 결핍을 푸념하듯, 하소연하듯 술술 풀어놓고는 자신의 감정을 서둘러 추스르고 있다.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주절주절 울음 섞인 생각들을 풀어놓을 뿐이다. “미련한 시간아, 어서 빨리 지나가라고/기도한 몇몇 밤 설마 없었겠습니까?”라고 하는가 하면 “아이고 눈물별 쏟아지네요”라고 너스레 떨 듯 ‘기도’한 수많은 시간에 대하여 스스로를 위로한다. 생각이란 언어로 기표나 기의 화 되면 구체적인 형상이 된다. 하여, 그것으로서 소멸되고 말거나 전혀 다른 형상으로 생성하게 된다. 최향란은 전자의 의도로써 생각의 말을 형상화했다. 즉 원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라는 형상은 기억 저편에서조차 사라진 상태다. 다만, ‘미련한 시간’이 의미하듯 부재한 대상에 대한 그리움만 남았을 뿐이다. 앞의 시 「돌나비 화석 앞에서」에 나오는 “너를 그늘에 묻고 입맛은 햇빛에 묻었던 것일까”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인간이란 존재는 결핍 그 자체이다. 유한성과 한계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로 각기 사회적 여건에 의해 또 개인적 상황에 의해 실존적 결핍이 덧씌워지게 된다. 따라서 누구는 결핍의 욕망을 타나토스로 끌어가는가 하면 누구는 리비도 생에의 충동으로 견인해 가기도 한다. 언급하자면 최향란은 결핍성 욕망의 리비도를 생에의 충동으로 치환할 줄 아는 힘을 지니고 있다. “놓쳤던 시간도 내 몫, 한 알 한 알 죄다 씹어 먹는” 것으로 내재화 시킬 줄 안다는 것이다.
 



누가, 보일 듯 들릴 듯 마음으로 가는 바다를 풀어 놓았다



낯선 그 길 소리도 등대에 멈췄을 때
꽃 지던 깜깜한 밤 껴안고 울던 붉은 사랑
어찌 풀어 보냈는지 어디로 놓아준 건지 지난 봄을 묻는다



바람이 구석구석 떨어지는 깊은 그 그늘 지날 때도



목매인 햇살의 소리 듣는다
허공에서 뿌린 사방 구절초며
한 없이 바다 보는 해국



이 모든 게 스스로 그리움 부르는 



한 마디 달콤함의 끝 슬픔 이래도
아 누가 내 몸과 마음 꽉 붙잡는지
역포 노을이 저녁 식탁 위로 탁, 터졌다



그리하여 그리움을 빙자한 식탐이래도 지워지지 않는 싱싱한 섬으로 앉았다



                                                                                                       ─「소리도 동백」 전문




   최향란의 시를 읽다보면, 어느 지점에서 금기된 것들과의 갈등이나 불화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듯도 보인다. “한 마디 달콤함의 끝 슬픔 이래도”와 같이 기꺼이 어느 한순간의 리비도라도 생의 충동으로 환치해 내겠다는 당당함이 엿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최향란의 시에 언술 되는 낱말을 통해서도 그녀 시의 특성을 볼 수 있다. ‘사랑’(「겨울산에 합장」, 「생각의 말」), ‘그리움’(「겨울과 봄 사이」, 「생각의 말」, 「소리도 동백」), ‘깊다’ (「겨울산에 합장」, 「소리도 동백」, 「생각의 말」), ‘식욕’(「돌나비 화석 앞에서」, 「소리도 동백」, 「겨울과 봄 사이」), ‘자유’(「돌나비 화석 앞에서」, 「겨울산에 합장」)라는 낱말들은 다섯 편의 시 전반에 내재되어 있거나 직접적으로 언술 되고 있다.
   그것들이 최향란의 시의 발아 지점이자 시의 골격이 되는 셈이다. 궁극적으로 시인이 지향하려 하는 세계, 의식의 최종 목적지는 ‘자유’에 있다 하겠다. 사회적 규범으로부터의 자유, 세상과의 불화로부터의 벗어남, 개인사적 결핍성 욕망으로부터의 탈주 의식이 궁극에는 ‘자유’에로 가닿고 싶다는 행위이자 열망이라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때로는 깊은 그리움으로 울고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식욕으로 욕망을 치환시켜가며 생에의 왕성한 에너지를 쏟아 낸다.
   그런 그녀 시가 생에의 충동으로 넘쳐난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자 또 하나의 특성으로는 시의 언술 방식을 들 수 있다. 그녀의 언술 방식은 활달하다. 앞서 말했듯이 주저앉아 푸념하듯 한바탕 울어대는 이미지를 그리는가 하면, 때로는 억척스러운 아낙의 이미지도 거뜬히 형상화 해낸다. 주절주절 수다스러운 문장을 통해 거칠 것 없는 욕망을 왕성한 식욕으로 치환시켜 한 밥상 거하게 차려내기도 한다. 모두가 생에의 충동이 왕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계속해서 이 긍정적 삶에의 충동을 경쾌하게 풀어나가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 화태도, 겨울과 봄 사이로 차려진 양지바른 밥상 보아요. 空달에

태어난 공순씨 손끝 지나가는 겨  울과 봄 것들 꽃으로 흔들어대고 있어

요. 겨울바다에서 속살 가득 찬 감성돔 구이와 이제부터 참맛 드는 저 빛

나는 참숭어 회가 겨울과 봄 사이에 있어요. 새벽 일찍 잡아온 고동 간장

양념에 고춧가루 약간 고소한 참기름 한 방울 아, 그토록 그리워했던 엄마

밥처럼 그냥 양볼 가득 침 꼴깍꼴깍 넘어가지요.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에

요. 보들보들하면서 쫀득한 해삼이랑 소라의 유혹 언 땅 뚫어 봄 향기 달

고 온 달달한 방풍나물. 시린 바람 끝 기나긴 겨울 있기나 했냐는 듯 혀 간

질간질, 겨울과 봄이 어긋나는 걸 가지런히 정리 해 놓은 화태상회 공순씨

밥상이에요.
                                          



                                                                                                          ―「겨울과 봄 사이-화태도」 전문






**약력:2002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도요새 요리』외. 현재 계간《디카시》 주간, 시전문지 《시와경계》 부주간. 두원공과대학 겸임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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