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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집중조명/안희연/현실주의자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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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39회 작성일 16-12-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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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안희연





현실주의자의 윤리





   내가 이현승 시인의 열렬한 팬이 된 건 그의 「따뜻한 비」라는 시 때문이었다. 두 번째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문학동네, 2012)에 수록된 이 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괴한 공포로 가득 차 있다. 이 시는 “도축업자”인 삼촌이 조카의 입에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을” 넣어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입속으로 밀려들어온 살점의 느낌이 얼마나 기이했던지 조카는 마치 “더운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고, “바지 입고 오줌을 싼 것 같다”고 말한다. 화자는 계속해서 그때의 느낌을 묘사한다. 자신이 “차 속에 빠진 각설탕처럼” “심해 화산의 용암처럼” 녹아내리고 흘러내리는 것 같다고. 그렇게 흘러내린 “눈물은 금세 돌멩이가 될 것 같다”고.
   지하철에서 이 시를 읽다 말고 나도 오줌을 쌀 뻔했다. 언어의 즉물적 느낌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입속에도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이 물려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가 나를 완전히 빨아들인 것이 얼마 만이던가.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였던 시가 눈앞의 생생한 현실이자 현재가 되는 경험. 아마도 어린 소년으로 추정되는 시의 화자가 느꼈을 공포는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이되었다. 그날 내 입에 물려있던 살점은 생생한 죽음이자 타자였으며, 그것을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태는 오래도록 계속됐다. 이물감이자 부끄러움이고 슬픔이자 난처함이기도 한, 단순히 정의하기 힘든 그 마음의 상태는 무엇이었을까.
   그날의 경험은 나의 뇌리에 이현승이라는 시인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시는 다정한 말투와 표정을 지녔지만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다정도 병인 양」, 『친애하는 사물들』)처럼 서늘한 속내를 품고 있다. 그의 언어의 유연한 물살을 따라 헤엄쳐가다 보면 꼼짝없이 구석으로 내몰린다. 읽으면 읽을수록 결코 만만하지 않은 시들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시엔 미문美文을 쓰려는 욕망이 없어 보였다. 문체는 물기 없이 건조했고, 어떤 상황을 직면하든 동요하거나 과장하는 법이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다만 정확하게 말하는 것만이 자신의 책무라고 여기는 듯했다. 게다가 시인이 정확하게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삶’이었다. ‘삶’과의 싸움이라니, 이건 누가 봐도 백전백패의 싸움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 잡아먹히거나(공포심이나 패배감에 젖어 내면의 방으로 숨어들거나) ‘삶’을 넘어서는(종교의 힘으로 초월하는) 포즈를 취하곤 한다. 그러나 그는 삶과의 정면 대결을 펼치는 사람이다. 작년 겨울 그의 세 번째 시집을 받아 안았을 때, 이쯤 되면 그를 투사鬪士라고 불러야한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이전 시집에도 그런 기미가 없지 않았으나 근작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2015, 창비)은 더 지독하고 무시무시해졌다. 그가 이번 시집에서 천착하는 재료는 여전한 ‘삶’이자 또한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시집이 나온 인연으로 작은 행사를 함께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이번 시집을 “피 칠갑을 한 시집”이라 소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생활’이란 “참으로 모자란 것”이고 ‘생활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이기지 못할 것”인 까닭이다(「생활이라는 생각」, 이하 모든 시는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에서 인용). 그의 신작 시집에서 자주 출몰하는 생활인은 ‘봉급생활자’(「봉급생활자」)이자 권고사직을 제안 받은 ‘그’(「심문」,「평균적인 삶」), 네 아이의 아버지(「기념일들」)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그러한 생활인으로서 하루하루 연명해가야 하는 우리가 매일같이 겪어야 하는 수치심과 패배감은 시집 곳곳에 산재해 있다. 삶이, 생활이 이토록 만만치 않은 것이라면 자족을 강권하거나 바늘구멍 같은 희망을 일깨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주의자인 그가 그런 거짓에 속을 리 없다.




반성도 지겹다.
형편없는 연기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는 커튼콜의 관객처럼
무의미한 반성이 반성 자체를 지운다.



                                                    ― 시 「뜨거운 사람들 2」 부분



실패란 얼마나 안온한 집인가.
결과의 자리에서 보면 모든 일이 자명하다.



                                                   ― 시 「다단계」 부분



우리를 쓰러뜨린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었는가.
누구든 다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자.



                                                  ― 시 「에고이스트」 부분


우리는 변화를 갈망했지만
결국 갈망 자체에 안주해버린 것이다.



                                                  ― 시 「고도를 기다리며」 부분



   인용한 구절들은 세상을 향한 그의 엄정한 태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비단 인용한 구절뿐만이 아니다. 시집의 어떤 장을 펼치든 촌철살인, 옳은 말들로만 가득하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는 게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쯤 되면 그를 냉철하다거나 냉정하다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그는 남에게 그 어떤 책임도 전가할 수 없도록, 실패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종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에게는 투정이나 엄살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삶의 불가해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삶은 노골적으로 상스럽”고 “빤하고 짠하기만 하는” “답이 안 나오는” 것인데(「코뿔소」) 어찌 이 모든 책임을 개인의 몫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그는 사회구조적인 모순이나 시대의 불행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우리는 “정치적 무능과 부패를 덮는 대형참사처럼/하나를 보느라 다른 하나를 보지 못하는” “죽음조차 놀랍지 않은 세상”(「도그마」)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내가 아는 “그는 조심성이 너무 많은 나머지/대부분의 순간들을 깨지기 직전으로 감각”(「투항」)하는 사람이다. 남들보다 곱절은 약하고, 유난스러울 정도로 예민한 촉수를 지녔기 때문에 더 넓고 깊게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현승 시의 특장은 이 같은 ‘정확성’의 소산이다. 그는 섣부른 희망이나 거짓 위로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이 싸움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무자비한 삶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밤의 도시를 바라볼 때처럼 명확해질 때는 없다.
어두운 천지에 저마다 연등을 달아놓듯
빛나는 자리마다 욕정이, 질투가, 허기가 있다.
이것보다 명확한 것이 있는가.



십자가가 저렇게 많은데,
우리에게 없는 것은 기도가 아닌가.
입술을 적시는 메마름과
통점에서 아프게 피어나는 탄식들.
일테면 심연에 가라앉아 느끼는 목마름.



구할 수 없는 것만을 기도하듯
간절함의 세목 또한 매번 불가능의 물목이다.
오늘은 내가 울고
내일은 네가 웃을 테지만



내일은 내가 웃고 네가 기도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울다 잠든 아이가 웃으며 잠꼬대를 할 때,
배 속은 텅 빈 냉장고 불빛처럼 허기지고
우리는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아프게 구부러지는 기도처럼, 빛이 휜다.



                                                         ―시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전문



   위에 인용한 시에서도 삶의 지리멸렬함은 어김없이 드러난다. 삶이라는 “심연”에 빠진 인간에게 “메마름”과 “탄식”과 “목마름”은 불가피하다. 간절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고, 오늘 내가 웃고 네가 울든, 오늘 내가 울고 네가 웃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도도 답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우리에겐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우리는 모두 ‘통점’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통해 ‘통각’을 느끼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생활의 희박함에 맞서 분명해지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아플 때”인 것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삶이 부여한 상처와 고통은 우리를 억압하는 부정적 기제機制인 동시에 우리를 분명히 존재하게 만드는 힘으로 탈바꿈된다. 물론 이러한 통각의 인지, 통각의 회복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지만, 거짓 위안이나 무의미한 반성보다는 윤리적일 수 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칠 때, 온몸을 깨뜨리면서 터져 나오는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 그때의 고통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생생하고 정직하고 유일무이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게 뭔가.
젊은 시절 남편을 떠나보내고
하나 있는 아들은 감옥으로 보내고
할머니는 독방을 차고앉아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삼인 가족인 할머니네는 인생의 대부분을 따로 있고
게다가 모두 만학도에 독방 차지다.
하지만 깨칠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삶이다.
아들과 남편에게 편지를 쓸 계획이다.



나이 육십에 그런 건 배워 뭐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묻자
꿈조차 없다면 너무 가난한 것 같다고
지그시 웃는다. 할머니의 그 말을
절망조차 없다면 삶이 너무 초라한 것 같다로 듣는다.



                                                       ― 시 「이것도 없으면 너무 가난하다는 말」 전문



   위 시에 등장하는 할머니 역시 삶의 횡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많지도 않은 식구인데 한 명은 젊어서 죽었고 다른 한 명은 감옥이라는 독방에 갇혔다. 할머니 역시 독방에 산다. 이때의 독방이 단순히 비좁은 공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가족이 있었음에도 영영 홀로일 수밖에 없던 할머니처럼, 인간은 누구나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할머니의 인생이 쉬웠을 리 없다. 그러나 할머니는 뒤늦게 한글을 배워 남편과 아들에게 편지를 쓰려고 한다. ‘꿈’으로 ‘가난’에 맞서기 위함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 구절이다. 할머니의 말을 들은 시인은 “그 말을/절망조차 없다면 삶이 너무 초라한 것 같다”는 말로 바꾸어 읽는다. 이것은 다시 말해 시인이 ‘삶’이라는 창에 맞설 힘을 ‘절망’이라는 방패에서 찾고 있다는 뜻이다. 얼핏 생각하기엔 의아하기도 하다. ‘가난’이 ‘삶’과 대등한 자리에 놓이는 것은 쉽게 수긍이 가지만 ‘꿈’과 ‘절망’의 연동은 조금 생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연상도 아니다. 절망은 우리의 통점을 건드리고, 바로 그때 우리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그의 시집이 피 칠갑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절망의 도굴꾼이고, 그의 윤리는 절망을 통해서 발명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초라해지지 않으려면 더 많은 절망이 필요하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절망은 얼마든 삶의 대항마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글은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도축업자인 삼촌이 입에 물려준 짐승의 살점이 어린 소년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에 대해서. 그날 소년의 입속에 밀려들어온 죽음은, 타자는, 오줌을 지릴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아마도 그때 그 살점의 다른 이름은 ‘삶’이었으리라. 그 소년이 자라서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봉급생활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때 그 살점을 입에 물고 느꼈던 감정의 정체가 바로 수치이고 지리멸렬이고 슬픔이고 외로움이고 속절없음이고 비참임을 서서히 깨달아갔을 것이다. 나이자 당신인 그 소년은 내내 뜨거운 비를 맞는 심정으로 지금도 아프게 살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살점을 섣불리 뱉거나 삼키지 않아야 한다고, 순간순간의 고통과 절망을 통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 현실주의자의 윤리일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러니 그 비가 어찌 슬프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언제까지나 그와 함께 뜨거운 비를 맞고 싶다.






**약력:201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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