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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신작시/김이강/하오의 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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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21회 작성일 16-12-3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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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이강





하오의 문




당신은 잠에서 깨어난다 다른 누군가의 잠을 잔 것처럼 당신은 어깨가 없고 통증도 없다 열어 둔 커튼 사이로 아침 햇빛이 쏟아진다 당신은 맑은 기분이 든다
당신은 친구에게 전활 걸어 말한다 오늘은 어깨가 아프지 않아. 아주 좋아. 당신은 느리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침대를 빠져나온다 오늘은 직접 커피를 갈아 볼 수 있겠어 당신은 생각한다



이런 순간이라면 예전엔 음악을 틀어놓곤 했었지 깊숙한 곳으로부터 오래된 수동밀이 먼지를 뚫고 나타난다 위태로운 길을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살아남은 사람이 있대. 절벽으로 미끄러지더니 바다로 풍덩 들어갔다가 다시 떠올랐다지 뭐야. 당신은 이제 젊은 날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마치 어떤 소설책에서 읽은 것처럼 멀고 흐리다



수신자는 누구인가 단지 당신 자신이다 가까운 일들은 어제 읽은 소설이고 오래된 일들은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이다



생존자는 오로지 당신뿐이다 절벽과 바다 사이에 당신의 모든 것이 흩뿌려졌다 당신의 모든 것 죽은 몸들 얼굴들 당신의 위태로운 삶 주인공들은 모두 죽어버린 이 길고 느린 마지막 장 커피를 마신 당신의 몸이 따뜻해진다 없어진다 당신은 이제 음악을 트는 대신 텔레비전을 켠다 텔레비전이 너무 크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우리 집으로 좀 와. 삼십 년 전의 뉴스가 아직도 나오고 있어. 친구는 대답이 없다 당신은 얼굴을 파묻는다 이런 일은 너무 자주 반복되지 않았는가 당신은 내려놓은 수화기를 오래 바라본다



당신은 오늘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는 걸 모른다 햇빛이 바뀌어 가는 것을 모른다 당신이 품은 생각이 오래 전부터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은 외출을 준비한다 오후가 열릴 것이다





헤갤의 안개



안내방송에서는 아무래도 정자역을 말하지 않는다



아직 결정을 못하는 모양이야.
누군가 말하고
헤겔은 안 된 모양이야.
다시 누군가 말한다



창밖엔 죽은 아이들이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있을 것 같은 마을이 지나가고



청년 시절 헤겔은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했고 친구들을 만나 공부를 하고 술을 마셨다
많이 마셨다 헤겔이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가 정신도 몽땅 마셔버린다는 것이 그의 룸메이트가 내렸다는 결론이다



그러니까 우리 앞집 놈이 자꾸 자기 집 화단을 부수었다 만들었다 하는 것 말이야.
노신사가 다시 말한다
그런 것이 이제 언제 멈추냐면……
그가 중요한 대목을 앞두고 말을 멈춰버렸다



내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사람들이 꽉 끼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꽉 끼어 있기 때문에 내릴 수도 없다



아직 멀었나?
사람들 틈에서 노신사가 다시 말한다
비로소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일을 떠올리는 가운데
그렇지만 일어설 틈이 없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안내방송의 목소리가 드디어 정자, 정자역을 말했을 때
어디선가 누가 말한다



아니야. 아직 정자역은 남았어. 지금은 오리야.





**약력:2006년 겨울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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