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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신작시/박신규/염주 한 알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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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박신규
염주 한 알
― 등반가 안치영에게
추운 길가에 맹인 노파가 졸고 있다
순한 산바람에도 기우는 몸피,
백년의 바람결이 씌어 있는 얼굴 주름과
염주에 쌓인 손때가 로체의 밤하늘처럼 빛났다
‘내 마음속 신이 당신의 신께 경의를 표합니다’
합장하니 하얗게 퇴화한 눈동자로 웃는다
더듬더듬 염주 한 알을 빼어 쥐여주면서
손목시계와 바꾸자고 한다
기압과 고도를 읽어주는 시계는
히말라야 대양에서 등대불빛 같은 것
염주를 다 준다고 해도 아니될 말씀인데
고작 한 알에 미아 신세가 되라니
소리내 웃으면서 염주알을 돌려주었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가장 먼저 퇴화하는 건 시력,
그다음으로 손발의 감각이 멈춘다
로체 남벽 8,200m쯤에선 숨도 멎어
거벽巨壁에 박힌 하켄보다 더 외롭다고 느꼈는데
캄캄한 시야를 뚫고 염주알 하나가 반짝이며 내리꽂힌다
하산하라는 명령,
딱딱하게 얼어붙은 손으로 낙석의 흔적을 더듬어보니
백년은 묵었을 단단한 뜨거움이 상처를 밝힌다
하행카라반에 다시 찾은 그 길가엔
생전 처음 보는 검은 야생화 한 송이,
이후 숱한 등반길에도 보지 못한 칠흑 같은 꽃,
신이 졸다 가신 흔적
정상을 친다는 것, 정복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미친 말, 지옥 같은 말
도전하거나 오르는 것도 산은 아니다
풀꽃같이 작은 신 앞에 더 낮게 엎드리듯
생의 끝에서 감각 없이 떨리는 손을 내밀듯
그렇게 모시는 것이 산이다
온몸 떨리는 첫 사랑 고백처럼
내 마음의 산 또한 당신의 산을 모시는 것이다
허,
― 취한 말들을 개서 그리는 자화상
어디까지가 어깨이고
어디부터가 팔인가
허수아비 그늘이 소란하다
촌스럽다고 떠들면서도 모여드는 작설들
바람 불면 나부끼는 소매로
하늘을 가리기도 하는 참새들
세차게 몰아치는 벌판에 나설 땐
허수아비 기치를 올려야 하네
허허실실 허허 진격이네
바람 잦아 심심하면 안대를 씌워 애꾸를 만들기도 하네
어디까지가 모가지고
어디부터가 몸통인가
치자니 애매할 것 같네
어깨 넓은 사람들이 좋았네
그 어깨 뒤에서 깊은 숨을 쉬고 싶었으나
넓고 좁은 것들 모두 다
이 가늘고 빈 어깨 뒤로 숨었네
바람에 맞서는 허허벌판의 허, 혀,
폭풍이 지나간 폭풍처럼 다 떠나간 자리
홀로 남겨진 허, 하나
목소리 떨어진 피켓의 뼈대 같은
발가벗겨진 십자가 같은
어디까지가 벌 받는 어깨이고
어디부터가 피 흘리는 손인가
애매해서 부러지진 않았네
**약력:2008년 문화예술위창작기금을 받고 《문학동네》로 작품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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