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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신인상/이산/못 읽은 편지 외 4편/소감/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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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397회 작성일 16-12-28 19:42

본문

신인상

이산




못 읽은 편지



모퉁이길 돌아가면

어느새 초겨울의 짧은 해가 저물고

달빛 부스러기 환한 강둑길의 흔들림이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 잊었을 때도

너는 어김없이 와서 성큼 다가선다

바람은 급한 사연 품고 어딘가로 달려가고

부시시 눈 비비며 늑장 부리는 너

불어갈 바람의 흔적이라도 알고 있는 걸까

어김없이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

뭔가 쏟아질듯 냉한 하늘 바라보다가

궁금하게 밀봉된 편지 한 통 앞에 나는 머뭇거린다

문득 내 앞에 놓여 있던 길이 사라지고

여기저기 사람들도 사라진다

기다리던 눈은 내리지 않는다

우리들의 생명에 불을 지필 수 있다면

밟고 밟아 단단히 길이 된 땅에서도 다시 꽃 한 송이 피울 것이다

들판 위에 서 있는 이름 모를 나무도

한 계절 쌓인 낙엽 무더기 크기만큼의 사색을 가졌다

 

이 계절에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은

새로 태어나기 전 아득함만큼의 고요이다

지난 계절을 담은 밀봉한 편지 앞에서 나는 머뭇거린다





부게로*의 그림 앞에서



흐릿한 부게로의 그림 앞에서 그대를 찾는다

횡단보도 신호대기중의 익숙한 침묵 같은 고요 앞,

내 속마음 탄로난 듯

그리움 담은 상상의 지도에 표시를 남기고

늦겨울 바람이 떠나가고 있다

비밀스럽게 꼼꼼히 적어둔 주소록은

내려놓고 싶지 않은 추억만큼 은근하다

그대 체온 간직했던 손끝이 무디어 가고

잠시 망설이던 그 바람을 깨닫는다

누군가 잠을 설치며 두런거리던 밤이 깊어간다

눈 녹은 먼 산, 허전한 모습 같았던

겨울의 주문진 바다 여행을 꿈꾸어 보았다

허공은 방향감각을 잃었다



*부게로 :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인상주의를 반대한 엄격한 기법으로 완벽에

가까운 표현을 하였다. 대표작으로 바느질하는 여인이 있다.





포구의 기억·1


 

고요 속, 밤은 조각조각 별빛 부스러기로 내려앉는다

어둠이 반짝이는 해안선

기억 따라 침묵이 앞서 가는 늦은 계절

불안한 발걸음에는 선착장 어수선한 사연이 담겨 있다

 

새벽 바다로 떠났던 허기진

어부의 주린 배 채우기 위한 명목으로

몇 마리 오징어는 난도질당했고

먹물 검정색으로 스스로 조상하며 죽음을 기념하였다

 

만선의 느긋함, 어둑한 선착장 내려서

그 사내 허름한 술집 작부와 그만의 찬란한 밤을 보냈다

돌아온 배들이 단단히 묶여 숨죽인 선착장

사연들, 묵직한 어둠 속 침묵하는 밤

 

그 시간 어루만지듯 별빛 시퍼런 해안가

묵혀둔 그리움에 떠밀려 나는 길 위로 시선을 빼앗겼다





포구의 기억. 2



시선이 끝나는 그곳,

가도가도 만나지지 않는 신기루 같은 점

내 숨결이 지나쳐온 회상 속의 수많은 기억들

그렇게 이어지고 이어진 흔적들,

어디였는지 모를 순간의 기억들이 헝클어 진 채

그 점들 하나하나 밟히는 길이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뒤섞인 혼돈의 걸음

곤한 잠은 민박집 차디찬

방바닥에 무기력하게 내려놓고

아우성으로 창문 틈 비집고 드는

심란한 바람 소리에 깨어버린 시간

나는 시어들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만들고

두런두런 삶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꿰맞추어

뭉클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거칠기만 한 주문진 바다의 바람과

긴 저음의 파도소리가 동행해 주는


사연 많은 시커먼 밤의 골똘한 시간 속의 점들,

그것은 결국 나였다




적영赤影


 

빛 그리고 내가 투과된 그림자

긴 그림자가 붉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이후의 공허한 색채

그건 고갈된 그리움 내려놓은 기다림이다

붉은 빛으로 응집된 나는

이제 누더기를 벗으려 한다

그들이 나를 버리고 얻은 착각이 있다면

나 또한 버리고 자유로우리라

모든 것은 마음

밝고 가득한 이 따사로움의 빛

얼마나 긴 세월 내게 돌아오라 손짓 보내고 있었을까

빛 속으로 걸어갈수록

빛이 벅찰수록 그림자 작아지고

붉고 긴 나의 그림자 모래바람으로 사라진다.




<소감>


  시는 위로의 존재이고 치유의 과정


   W.H. 허드슨의 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우리들의 삶은 그러한 상상과 감정의 물결 속에서 나름대로 타고

난 성향과 경험에 의한 체계로써 살아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를 쓰는 나의 모습은 익숙하게 본질의 나를 찾아가

는 수행의 한 방편으로 서서히 생활 속에서 굳어져간 것 같다.

   중년을 지나는 이 나이에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어설프고

부끄러운 것들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그래서 종종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시

를 쓰며 위로를 받고 마음을 다스리며 맑은 새벽을 맞이할 수 있었

던 것이다.

   이렇듯 시는 나에게 있어서 위로의 존재이고 치유의 과정이고 하

나의 수행법인 것이다.


   부족한 사람에게 시인으로써 거듭나게 기회를 준 리토피아

마음에 깊이 새겨봅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자아 성찰을 위한 참신한 기획 엿보여

 

   우리는 왜 시를 쓰는가? 미적 기획이란 아무리 십분 양보한다 해도 실용성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는 자아에 대

한 반성적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실용적 목적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시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지극히 당연한 명제

를 가끔은 간과하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안타깝다. 이산 시인은 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으로서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이 계절에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은/새로 태어나기 전 아득함만큼의 고요이다/지난

계절을 담은 밀봉한 편지 앞에서 나는 머뭇거린다” ( )못 잃은 편지표현했다. 또한 빛 속으로 걸어갈수록/빛이 벅찰수록 그림자 작아

지고/붉고 긴 나의 그림자 모래바람으로 사라진다.”(적영 赤影)는 부분은 반성적 인식이 시작되는 지점을 적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이산 시인의 미래를 위해 첨언하자면, 아직 군데군데 육화 肉化지 못한 관념의 편린 片鱗들이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점은 꼭 시정해

야 할 것이다. 현대인의 일상은 자동성, 단순성, 반복성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도 심각한 과제이며, 당연

히 시적 테마로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산 시인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피상적 인식을 개선하는 방법은 관찰 통찰 (insight)’로 사물

과 사태를 끊임없이 탐색해 보는 것이다. 시인의 충분한 역량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백인덕, 장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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