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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책 크리틱/한명섭/채식주의자와 체셔 고양이는 초현실주의 속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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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582회 작성일 16-12-29 18:03

본문

책 크리틱

한명섭






채식주의자와 체셔 고양이는 초현실주의 속에 산다.

함기석 시집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이기성 시집 채식주의자의 식탁





1.

재킷 한쪽 소매 끝에 달려있던 4개의 단추 중 두 번째 단추가 어디론지 사라졌다. 단추가 옷에서 떨어져 나가기 전에 느슨해져 있었을 실의 상태를 미리 발견했더라면 이가 빠진 듯한 소매를 한 재킷을 입으며 찜찜하지 않을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 그렇다고 해도 단추는 이미 떨어지고 난 후다. 미리 알았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는 벌써 결과가 나온 다음이니 미리 잘 대처하지라는 말이야말로 쓸모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기성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채식주의자의 식탁속 단추에 주목해 보았다.




   물론 낡은 오토바이는 단번에 날아갔어. 너는 쭉 미끄러졌지. 길바닥에

단추처럼 흩어졌지. 단추가 동그란 입을 벌리고 안녕 - 노인은 폐지 묶음



을 끌고 골목을 기어가고 있었어. 택시 운전사는 노란 기침을 하며 눈물을

흘렸지. 그의 아내는 아침에 죽었어. 비가 계속 내리고 붉은 국밥을 사흘

동안 먹여야 했지. 신문에는 시인들의 근황이, 시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지. 검은 충치처럼 어떤 선언이 나부끼고, 죽은 자들이 사진 속에서

활짝 피어났지. 너는 물론 뜨거운 밥을 꿀꺽 삼켰겠지 - 이 모든 게 눈동자

앞에서 잠깐 흔들린 걸까. 버스 안에서 늙은 여자가 눈을 떴다가 다시 감

고 깊은 잠에 빠졌어. 단추는 화를 내지 않아. 잠깐 하품을 하고 나는 단추

의 하루를 생각하기 시작했지. 단추. 그 동그랗고 까만 영혼이 내게 달려

오고 있었던 거야.



                                                                                              ─ 「단추의 시전문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생활에 시달렸을 너 혹은 단추가 오토바이와 날아가는 장면에 이어서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들여다보자. 노인과 택시운전사, 그리고 운전사의 죽은 아내, 시인이 그들단추의 이형태 異形態이다. 택시 운전사 아내의 상이 치러지는 사흘 동안 내리는 비의 배경은 단추의 오토바이가 날아가는 장면과 잘 어울린다. 사고가 나는 순간에도 단추는 동그란 입을 벌리고 안이라고 말한다. 스마일 모양의 단추를 굳이 떠올려보지 않아도 동그란 구멍이 뚫린 단추가 겉모양만으로는 비극적이지 않다. 하지만 옷에서 떨어져 나가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방치된 단추를 생각해보면 마음속으로는 울고 있어도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는 피에로의 얼굴이 겹쳐진다. ‘단추는 화를 내지 않아라는 시인의 언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단추의 시는 시집에서 같은 제목으로 시 2편이 실려 있다. 또 다른 한 편을 읽어보자.




겉옷의 단추가 달랑거렸다,로 시작되는 하루가 있다

그녀는 청소부가 되었다,라고 쓰는 하루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서로를 지나간다

 

그녀와 내가 빈 복도에서 마주치는 것은 어떤 이야기의 시작일까

 

말하자면 우리가 여고동창이라는 사실, 이십 년 전 조개탄 난로에 데운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는 사실, 훔친 지우개를 나눠 가졌다는 비밀 혹은 그

것이 하필 파란색의 톰보지우개였다는 사실

 

복도에서 그녀가 속삭였다 밥 먹으로 올래? 파란 입술이 조개처럼 벌어

지면 그것은 어떤 비밀의 탄생, 흔들리는 단추처럼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구정물이 든 물통을 들고 계단으로 사라졌다

 

오래전 먹구름 장미나무 혁명이라는 단어를 볼펜으로 공책에 적어두었

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어두운 계단 아래서 먹는 밥과 같은 것일까 지하실

에 검은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문을 열자 그녀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석

고처럼 굳은 얼굴 흰 곰팡이 냄새가 피어올랐다

 

차가운 계단과 계단 아래의 식사를 이해한다고, 그녀와 내가 마주치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커다란 대걸레를 들고 그녀가 직업적으로

웃을 때 나는 분필을 뚝 부러뜨렸다 새하얀 분필로 녹색 칠판에 시를 쓸

수도 있었는데, 물론 내 목이 단추처럼 달랑거렸다,로 시작되는 시를 쓸

수도 있었지만

 

                                                               

                                                                                           ─ 「단추의 시전문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화자가 여고 동창인 그녀를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인 시편이다. ‘그녀에게 밥 먹으러 오라는 말을 힘겹게 건네고 는 그 제안에 따라 계단 아래 그녀가 식사하는 지하실로 간다.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개탄 난로에 데운 도시락을 나눠 먹었던 기억과 같이 밥을 같이 나눠 먹기가 쉽지는 않은 현재의 자리에서 그녀에게 웃음을 보인다. 그러 는 그 웃음이 왠지 직업적인 웃음처럼 느낀다. 겉옷의 단추가 달랑거렸다는 시의 첫 구절은 내 목이 단추처럼 달랑거렸다. ’ 의 구절과 맞물리면서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녀가 청소부가 되었다는 시행 역시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어찌할 수 없음으로 읽힌다. 세속적으로 교사의 직업을 가진 이가 청소부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보다는 편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단추처럼 달랑거리는 삶일 뿐이다. 직업이 무엇이건 재산이 얼마건 우리의 운명은 한 치 앞으로 내다볼 수가 없다. 상의 기준이 얼마나 열약한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가 보여주는 언술과 행동 속에서도 그런 세상의 기준과 타협하지 않고 있는 태도가 드러난다.


   오세요,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어요. 시를 쓰는 여자여, 우리는 식

탁에 앉아서 정치와 취향과 여름에 대해 이야기해요. 예의 바르고 말쑥한

손님의 자세로 당신은 물고기와 파란 정향의 냄새를 좋아하고 꼬리가 긴

바람도 좋아하지요.

   나의 손님이여, 나는 당신의 존재를 덥석 베어 물고 싶군요. 뜨거운 혀

로 당신의 표면을 어루만지고, 날카로운 이빨로 차가운 뼈와 뼛속에 감춘

권태의 쓴맛을 찢어버리고, 금박 씌운 둔중한 어금니를 동원하여 당신의

경악을 꼼꼼히 저작할 것입니다.

   나는 생각해요. 흰 침을 뚝뚝 흘리는 입술, 검은 목구멍 속으로 당신의

잔해를 꿀꺽 삼킨 혀가 자신의 유일한 임무를 마치고 어떤 흐느낌 속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그곳의 어둡고 창백한 고요를, 언젠가 목구멍으로 툭 튀

어나올 딱딱한 손가락을

   그러니 시를 쓰는 여자여, 영원한 손님이여.당신의 검은 심장은 곧 찢

어지겠군요. 물고기와 정향을 좋아하는 당신, 새하얀 육체와 충만한 영혼

을 가진 당신, 언제까지나 다정하고 따뜻하고 겸손한 당신, 어쩌면 아름다

운 당신 그러나 곧 나에게 먹힐 당신,


                                                 

                                                                                 ─ 「채식주의자의 식탁전문




   시집 제목과 같은 시 채식주의자의 식탁이다. 채식주의자가 동물성의 무엇인가를 먹을 수는 없는 법인데 이 시 속의 화자 자신의 손님인 시를 쓰는 여자를 먹어치울 기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집의 서시인 서정시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기성 시인의 시편들 역시 서정시가 주는 울림과는 다른 울림을 주며, ‘는 시인의 페르소나와 다름없다. 세상의 기준을 이겨내려는 적극적인 태도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단추처럼 슬픔에서도 웃기만 하는 많은 존재에게는 이런 움직임은 크나큰 응원이 될 것이다.



2.

   함기석 시인의 신작시집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를 손에 들고 힐 베르트와 슈뢰딩거 , 괴델 , 푸리에까지 네 명의 수학자의 이름을 새 롭게 알았다. 수학과 출신인 함기석 시인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들어보지도 못 할 뻔한 이름들이었다 . 무슨 무슨 방정식이라는 단어도 어찌나 낯설었는지 모른다. 이런 낯섦의 첫 기억은 사생대회 날이었. 같은 반 친구는 물감이며 붓이며 이젤까지 모두 제대로 갖춘 미술반이었다. 그림에 관심이 없던 나도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풍경을 하나 완성하기 위해 친구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눈에 보이는 대로 나무며 계단이며 돌이며를 꽤나 열심히 도화지에 그려 넣던 나 는 옆자리 친구의 그림으로 자꾸 눈이 갔다. 이 친구의 도화지 속 그림은 내가 보는 풍경과는 달랐다.

   나무의 위치가 달랐고 돌의 위치도 달랐다. 자기 마음대로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럴 거였으면 뭐하러 밖에 나와서 그리는 거냐는 생각을 잠깐 했다. 보이는 대로 그려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함기석 시인이 신작 시집을 펼쳐 들고 읽은 첫 번째 시 오르간은 시어와 시행이 주는 이미지가 선명하여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글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바다 한복판에 오르간이 환하게 떠 있다/누구의 익사체일까//새들이 건반에 내려앉을 때마다/밀물과 썰물이 반음 차로 울리고//파도가 모래 해변으로 나와/하얀 혓바닥으로/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게들이 하늘을 본다/북극성 조등 弔燈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원을 그리며 도는 별들 음표들 시간들//누가 주검을 연주하는 걸까/건반 사이에서 새들이 날아올/캄캄한 허공으로 흰 쌀알처럼 흩어지고 있다

 

                                                                                                                                                                                              ─ 「오르간전문



 

   밀물과 썰물이 들락날락하며 소리를 내는 바다와 등을 켠 듯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라는 낭만적 풍경 속에서 화자는 죽음을 읽어 낸다. 고봉준 평론가가 시집해설에서 적고 있듯이 이번 시집에는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파격적인 해체나 실험이 사실상 등장하지 않.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모습을 글로 옮겨 놓는 동시에 낯선 이름이나 수학적 관념을 집어넣음으로써 일상을 낯설게 하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낯설게 하기의 효용이야 이미 널리 밝혀진 바 와 다름없다.

 


 눈길에서/눈을 잃고/길을 잃고/호른 속으로 미끄러진 사람/호른 속 깊고 어두운 방에 쓰러져/흰 피를 흘리다/흰 잠에 빠져든 사이/잠이 녹고/

이 녹고/기억이 녹고 이름이 녹고/살마저 녹아 얇게 퍼져 흐르다/호른이 된 사람/호른 속에서 영원히/어른 속으로 돌아오지 못하는/사람이었던 사/새도 나무도 잠든 추운 겨울밤/호른 속에서 잠을 뒤척이며/찬 달빛 분사하다/찬 숨결 분사하다/영원히 소리가 되어 버린 사람/영원히 악기가 되어 버린 사람/오래전 나를 떠난/오래전 나를 버린/찬 금속의 피를 가진 그 사람/가끔 삶이 시리고/시가 시릴 때 내가 불면/하얀 물뱀 머리 달린/하얀 안개가 되어/검은 농담처럼 천천히 대기를 흐르다/내 몸을 부드럽게 휘감는/하얀 가슴 달린/하얀 입술 달린

                                             

                                                                                                                                                                            ─ 「호른 속에 사는 사람전문



   호른이 내는 소리가 관 속에 있는 사람의 숨결이라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음률을 관능적으로 형상화한 시편이다. 호른의 소리는 찬 달빛 같기도 하고 찬 숨결 같기도 하고 나를 버리고 떠난 차가운 사람 같기도 하고 삶이 시릴 때는 나를 감싸서 위로를 주기도 한다. 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호른의 소리가 사실은 그 속의 사람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성격의 표현이라는 상상으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시집을 펼치면 제일 먼저 나오는 문장이 있다. ‘나는 ( ).’가 바로 그것이다. ( )괄호라 부르자. ‘괄호가 여러 번 등장하는 시가 있어 눈길을 끈다.

 




고양이 체셔가 웃으며 건반 위를 걷는다

연주가 시작되고

오르간 양쪽에 불이 켜진다

양초 대신 손에 꽂혀 타는 두 개의 촛대


 

오르간 앞엔 팔 없는 소년



( )가 앉아 있다

괄호의 눈에서

푸른 쇠구슬이 반음 차로 떨어질 때마다

체셔는 체셔체로 걸음을 옮긴다



원 스텝 투 스텝, 반음 쉬고

흰 건반 검은 건반, 다시 반음 쉬고

점프해 발을 바꾸는데

음에 맞춰 혀를 날름거리는 사색가가 나타난다

붉은 줄무늬가 또렷한 뱀



고양이가 앞발로 톡톡 건드리자 뱀은

머리를 빳빳이 세우고

체셔의 웃음과 ( )의 사라진 팔을 번갈아 쳐다보다

발 달린 음표들을 따라 없는 발로

침묵 속으로 간다



체셔는 웃으며 다시 채셔체로 걷는다

건반 사이에서

날개 가득 ( )색 피를 묻힌 새들이 날아올라

밤의 동공 속으로 날아간다



                                                      ─ 「밤의 실내악전문




  체셔고양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미소 짓고 있는 고양이이다.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다른 장소에 나타나는 일 종의 순간이동을 할 수 있으며, 몸 전체가 왔다 갔다 하는 것뿐 아니라 한 장소에 몸 일부만 나타나게 하는 것도 가능한 초현실적인 고양이이다. ‘괄호는 팔 없는 소년이다.

  새들의 날개에 묻은 괄호은 무슨 색일까? ‘괄호를 표현할 색채가 너무나 다양해서 그 색을 특정하지 못하고 비워둔 것은 아닐까? 체셔고양이는 괄호 의 생각대로 오르간을 대신 연주한다 . 팔이 없지만 자신이 내고 싶은 소리를 연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체셔고양이의 존재만큼이나 초현실적이다. 그러나 초현실적이어서 아름다울 수 있는 경우는 많다. 팔이 없는 괄호가 내고 싶은 소리는 뱀이 되기도 하고 새들이 되기도 할 만큼 역동적이고 싱싱하다. ‘괄호인 시 인이 표현하고 싶은 무엇 역시 뱀처럼 관능적이면서도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처럼 힘찰 것이다.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의 시편들은 각 각 하나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어 시편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세계를 만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언어적 실험꾼함기석 시인의 꺼내놓은, 일상적인 장면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천의무봉의 솜씨와 거기에 곁들여진 낯설게 만든 일상을 지켜보는 일은 내내 즐겁다.







**약력:소설가, 2009서시로 등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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