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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책 크리틱/김영덕/현란한 마술적 사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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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
김영덕
현란한 마술적 사실주의
─ 권섬 시집『꽃의 또 다른 출구』
권섬 시인의 첫 시집 『꽃의 또 다른 출구』는 제1부 〈말의 잔치〉 , 제2부 〈묵언수행〉, 제3부 〈섬강〉, 그리고 제4부 〈고향 아리랑〉이렇게 4부, 총 여든여섯 편의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시인의 구분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크게 3개의 부문 혹은 지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지평은 이른바 마술적 사실주의 Magical Realism 계열의 시들이다. 여기에는 표제시를 포함하여 시집의 앞부분에 주로 배치된 시들이다. 구체적으로 「꽃의 또 다른 출구」와 연작시 「차용된 존재의 혼돈」,「황사」 같은 시들이 여기 해당된다. 두 번째 지평은 삶의 진실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바람 불고 고달픈’ 세파를 헤치며 살아온 시인이 경험하고 느낀 삶의 잔잔한 서사이자
때로는 변주곡이다. 서른 일곱편의 『섬강』시리즈가 여기 해당된다. 그리고 세 번째 지평은 시인 자신이 경험한 삶을 시로 전환한 것이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만학도로서의 어려움 같은 시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문학사조로써 매지컬 리얼리즘 또는 환상적 사실주의가 있다. 마술Magic+사실주의Realism로써 두 개의 독립된 서사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얼핏 이 용어들이 함께 가기는, 그러니까 사이좋게 병치되기에는 다소 어색한 조합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 서로 모순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한 조합이 바로 마술적 또는 환상적 리얼리스트들이 다루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들은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일들을 즐겨 묘사하면서도 일부 판타지를 주입한다. 사람이나 사물에 날개가 돋아나서 날고, 때로는 곤충으로 변하거나, 산 자들의 세계와 죽은 자들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수 억 년 전 단세포 생명체에 불과했던 인간이 오늘의 모습으로 진화한 것 자체가 불가사의이며 매직이고 환상이며 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많은 모르는 것이 존재한다. 광대무변의 우주공간을 말할 것도 없고 지구 면적의 70퍼센트를 덮고 있는 바다의 평균 깊이가 3,790미터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이 잠수해서 들어갈 수 있는 깊이는 기껏해야 30미터 내외이며 스쿠버다이빙 세계 기록 조차 317미터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전 세계 바다 면적의 5퍼센트만 사람의 손길에 닿았다고 한 다.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이,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초라하고 때로는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말해 준다.
1.
지금 꽃을 보고 있어. 그 꽃 역시 날 보고 있어. 바람이 어깨에서 그네
를 내리면 꽃은 팔랑팔랑 그네를 타고 언덕에 올라. 언덕에서 굴렁쇠를 타
고 놀다가 달을 따러 가기도 해. 아이들이 남겨놓은 웃음소리로 허기를 채
우고는 그네에 올라 앉아 낮잠을 자. 잠에서 깨어나면 빨간 태양이 입혀준
원피스를 입고 달팽이관 피리를 불어. 그 피리소리에 애벌레의 등에선 달
콤한 깃털에 자라나곤 해. 지금도 그 꽃을 보고 있어. 길고 부드러운 부리
를 가진 새들은 그 꽃물을 길어와 투명한 둥지를 그리고 있어. 뚝뚝 꽃의
진통이 지는 어슴푸레한 저녁, 둥지 안에서 초롱초롱한 달이 깨어났어. 그
달은 그 꽃이 왔다가 간 흔적을 쫓아 구름사다리를 하늘의 뜰에 비스듬히
세워 놓았어.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그 꽃을 들여다보고 있어. 그 꽃은, 먼
하늘 그 너머에서 꽃잎 출렁이는 바다를 상상하며 다시 꿈을 꾸고 있어.
─ 「꽃의 또 다른 출구」전문
이 시는 권섬 시인의 유장한 시적 상상력의 날개 wings of poetic imagination를 잘 보여준다. 화자 speaker는 자유로운 영혼인 꽃과 나
비, 바람과 빨간 태양, 초롱초롱한 달, 하늘의 뜰, 꽃잎 출렁이는 바 다에 감정이입이 되어 마침내 물아일체가 된다. 그 세계에는 중력도 없다. 요즘 다시 위작 시비가 일고 있는 고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는 이 시에 대한 독자들의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 꿈꾸는 듯,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미인의 눈동자와 머리 위를 장식한 풍성한 꽃과 파도치는 이파리들, 어깨 위에 앉은 호랑나비는 구름사다리를 통하여 ‘먼 하늘 그 너머에서 꽃잎 출렁이는 바다’처럼 그리운 ‘시원’의 세계로 가는 출구일 수 있다. 에덴동산의 이정표일 수도 있다. ‘바람이 어깨에서 그네를 내리면’ 꽃이 된 나비는 ‘팔랑팔랑 그네를 타고 언덕에 오’른다. 그 언덕은 시인이 꿈꾸는 빨간 태양이 지배하는 구름 위의 세상이며 달콤한 몽환의 세계일 것이다.
홑겹 수은등이 뿌옇게 밤을 핥는다. 버터를 깎아 만든 등이 깜박이자 전
자벽화 속에서 오색 언어들이 까만 천공 위로 깔깔깔 날아오른다.
새벽, 새벽 같은, 새벽, 새벽 같은, 수탉은 밤새 천공 위로 언어를 토해
낸다. 새벽의 경계가 삭제된 양계장에선 어질어질 무정란이 복제 중이다.
계란 반숙이 아침상에 올려지고 반쯤 죽은 언어들이 돌돌 말려 매끄럽게
목구멍으로 빨려들다가 쿡쿡 웃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수은등은 혓바닥으로 축축한 언어들을 유리곽 속
에 집어넣는다.
─ 「차용된 존재의 혼돈·1-괜찮아」 전문
도시문명의 황폐함과 정신적 공허를 주술적으로 그린 시다. 수탉은 ‘새벽, 새벽 같은, 새벽, 새벽 같은’ 수상한 환경에서 다만 ‘밤새 천공 위로 언어를 토해낼’ 뿐이다. ‘새벽의 경계가 삭제된 양계장에선 어질어질 무정란이 복제 중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만든 도시문명은 닭들에게 약소한 입방의 자연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반쯤 죽은 언어들이 돌돌 말려 매끄럽게 목구멍으로 빨려들다가 쿡쿡 웃는다.’
매뉴얼대로 돈을 벌어 매뉴얼대로 동화 같은 집을 짓는다. 어느 날 문밖에서 마귀할멈이 불쑥 사과 한 개를 내밀고는 매뉴얼에 없는 가족이 된다. 마귀할멈은 입으로 자꾸 사과를 낳는다. 그 사과로 요리를 하고 그 요리를 시장에 내다 판다. 그 사과는 점점 유통망을 타고 각지에 퍼지고 사람들은 그 사과만 찾는다. 그 사과는 일류 요리를 낳고 고급 승용차를 낳고 최상의 빌딩을 낳는다. 마귀할멈은 그 사과로 그 도시의 주인이 된다.
빌딩 숲에 높이 솟은 전광판엔 마귀할멈표 사과 광고가 현란하다. 도시는 자꾸만 침이 고인다. 밤낮 은밀한 눈길로 전광판은 자꾸 사과를 낳는다.
맛 한 번 봐!
─ 「차용된 존재의 혼돈·3 - 사과 맛을 알아버렸어」전문
미국 뉴욕의 맨해튼 5번가 센트럴파크 인근에 ‘투명한 사과집’ 애플스토어가 있다. 매킨토시 PC와 소프트웨어,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 워치 등 최신 전자제품과 스마트폰을 파는 곳이다. 최신 기기들을 남보다 먼저 사용하려는 매니어급 얼리 어댑터 early adopter 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침을 고이게 만드는 곳이다. ‘어느 날 문밖에서 마귀할멈이 불쑥 사과 한 개를 내밀고는 매뉴얼에 없는 가족이 된’ 마귀할멈은 ‘그 사과로 그 도시의 주인이 된다/빌딩 숲에 높이 솟은 전광판엔 마귀할멈표 사과 광고가 현란하다. 도시는 자꾸만 침이 고인다. 밤낮 은밀한 눈길로 전광판은 자꾸 사과를 낳는다.’ 시인은 미국의 ‘ 애플사 ’ 를 ‘ 마귀할멈 ’ 으로 빗대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무섭고 어두운 단면을 고발한다.
2.
그것을 잃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거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라도 선택할 것이라면
그 하나로 완전한 우주인 거다.
내 안에도 그 우주가 있다.
─ 「섬강·23 -사랑」전문
지적 생명체로서 인간이 수많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제 새끼를 보호하는 것 같은 동물적 본능을 제외하고 ‘가슴을 가진 사람, 그리고 영성을 갖춘 사람이 서로 유대 또는 사귐을 갖고, 그것을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으로서의 사랑을 시인은 ‘그것을 잃으면/살아있어도 죽은 거다’라고 했다. 사랑이 빠져나간 빈 육신은 폐허와 다를 게 없으며 이미 박제된 몸뚱이다. 애틋하고, 사무치고, 살갑고, 애절하고 절절한 정으로써의 사랑을 시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보다도 크고 벅찬, 인간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인 ‘완전한 우주’라고 했다. 사랑에 대한 최고의 헌사다.
나무란 나무는 죄다 머리를 풀고
창이 울부짖는 소리에 잠이 깼다.
TV를 켠다.
특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북한 핵실험 단행, 남태평양 방향 미사일 발사,
주식은 1,100선으로 추락,
바람이 소리를 내며 벽과 벽 사이를 휘젓고 다닌다.
탁자 위는 금세 바람이 몰고 온 먼지가 점령한다.
반쯤 열어 둔 창을 닫는다.
덜덜덜 덜컹, 덜커덩 덜커덩,
늙은 창은 연신 둔탁한 비명소리를 낸다.
덧창까지 굳게 닫는다.
감금이다. 누가 봐도 합법적인.
─ 「섬강·5 - 바람 많은 날」전문
요즘 가수 조영남이 즐겨 부르는 노래 중에 「모란, 동백」이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화가인 이제하가 지은 노래 다. 가사 중에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는 대목이 있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안온하고 아름다울 때보다 바람 불고 힘겨울 때가 더 많은 게 사실이다. 불편한 진실이다. ‘나무란 나무는 죄다 머리를 풀고/창이 울부짖는 소리에 잠이 깬‘ 시인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세상으로 열린 창인 TV를 켠다. 그러자 전직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고, 북한이 핵실험을 하여 위협하고, 주식이 폭락했다는 어두운 소식을 접한다. 시인은 그것을 ‘바람이 소리를 내며 벽과 벽 사이를 휘젓고 다니’고 ‘탁자 위는 금세 바람이 몰고 온 먼지가 점령하’는 것과 같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세상을 향한 창인 TV를 끄고 또 다른 창인 ‘덧창까지 굳게 닫’고 스스로를 ‘합법적으로/감금’한다.
3.
빛바랜 중절모에 잿빛 두루마기 차림 중년의 그 분, 홀홀단신 객지에서
몇 번의 겨울을 넘기던 딸의 기숙사를 불쑥 찾아 왔다. 예기치 않은 방문
에 멀뚱한 딸을 보고는 그냥 잘 지내는지 와 봤다. 건강하니 되었다. 들어
오지도 않고 곧장 나가신다. 나가시다 말고 그 날은, 안주머니에서 꼬깃꼬
깃 지폐 한 장을 딸의 손에 쥐어 주고는 휑하니 떠나신다. 그 분만의 소통
방식이다.
기억을 더듬는다. 예전에도 그 분 눈은 그리 움푹했었던가. 눈시울이 붉
어져서 서둘러 나가신, 자식과도 일정 거리가 필요하신 그 분만의 사랑법.
그 땐 알 리가 없었다.
그 딸은 어미가 되었고, 객지로 보낸 딸을 보려고 버스를 기다린다. 희
끗희끗한 기억 한 끝, 그 분 뒷모습이 북적이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 「어떤 풍경」전문
객지에서 공부하는 딸을 보려고 버스를 기다리는 중년의 엄마가 문득 기억의 심연에 잠겨있던 기억의 한 조각을, 빛바랜 흑백사진 속 풍경을 두레박으로 끌어 올린 시이다 .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뭉클하게 전해진다. 엄마와 딸의 소통방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지만, 아버지와 딸의 경우는 다르다. 중절모에 두루마기 차림인 것으로 미루어 아버지는 과거의 관습이나 메커니즘에 익숙한 분이다. 그 시대는 딸을 지나치게 예뻐하고 유난히 다정다감한 아버지는 오히려 흉이 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딸을 보호하고 염려하는 것이 바람직한 부정父情의 모습이자 ‘사랑법’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휴대전화는 물론 일반전화도 흔치 않은 시절이었지만, 가족, 친지를 방문하거나 이웃집에 갈 때 헛기침만 하고 그냥 불쑥 집안으로 들어가는 게 상례였다. 지금처럼 미리 연락을 하거나 만나자는 약속까지 하고 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 지나치게 경우가 바르면 오히려 다소 경박하다는 평판을 듣기 일쑤였다. 그만큼 커뮤니티 안에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크지 않았고 은근한 배려심까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근래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 바뀌게 된 것이다.
연일 신문, TV에선 학벌 위조한 연예인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재대로 대우 받고 인정받고 싶었기에.
여자가 공부해서 뭐 하냐시던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어린 나이에 독립했
다. 낮엔 일하고 밤에 공부해서 대학과정까지 마쳤고 취직도 했다.
승진도 급여도 터부니 없다. 여자라는 조건 땜에, 또 공부를 했다. 남자
동료들의 학력 경력을 취득하기 위해 낮애 일하고 밤엔 학교로 가사일 직
장일 공부하는 일, 일, 일, 또 일,
그래도 공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결혼을 했다. 멋지게 살기 위해, 그러나 오산이었다.
결혼한 여자는 돈도 잘 벌어야 하고 집안 살림도 잘 해야 하고 아이도
잘 키워야 한다고 결혼한 그 남자는 늘 그랬다.
그래서 그 남자로부터 또 독립을 했다.
그래도 공부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남자동료들이 취득한 자격증과 학위 그걸 취득하기 위해 전쟁처럼 살았
다. 약간의 승진이 있었다. 그래도 급여는 별 차이가 없었다. 오십대 상관
이 늘 그러신다. 여자가 출세해서 뭐 하냐고 여자들 나무 설쳐서 나라 망
한다고.
조만간 여기 상관에게 보여줄 참이다. 여자가 설쳐서 안 되는 일이 없다
는 걸,
그래서 또 공부를 한다.
─ 「섬강·37 - 어느 만학도의 일기」 전문
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것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시다. 요즘 가정 내에서는 어느 정도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사회생활에서는 아직도 무지막지한 편견과 보이지 않는 벽과 유리 천장이 상존하는 게 사실이다. 온갖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어린 나이에 독립하여 주경야독으로 대학과정까지 마치고 직장에서 승진까지 하고, 또 다시 도전에 나서는 시적 화자에게 성원을 보낸다.
**약력:문학평론가.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아라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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