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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특집2/제 6회 리토피아청소년온라인백일장/장원 수상작/차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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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수상작
리토피아 백일장 장원 수상작 산문부 소설
김도연(고양예술고)
파란 꿈
도심의 한 제약회사.
사람들이 밤이 깊도록 퇴근을 하지 않고 일을 한다. 사람들의 얼굴엔 피곤하다는 기색 하나 없다. 그 중에 눈에 띄게 피곤해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책상에는 피로회복제가 여러 병 뒹굴고 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온다. 그럼에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지 괴로운 표정이 역력하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여러 번 꼬집더니 담배를 꺼내 밖으로 나간다. 그는 불이 꺼지지 않는 사무실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간다. 조용하다.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무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 화장실을 가는 사람들만 자리에서 일어날 뿐. 그는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 순간 그는 굳어버린다. 그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비췬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 파란 달이다. 파란 달! 달이 파랗다. 달빛을 받은 나뭇잎들이 푸르게 보인다. 그의 속이 울렁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름답다. 세상 그 어떤 누구라도 파란 달을 있는 모습 그대로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그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다리가 엉켜 넘 어질 번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보여주고 싶다. 모두에게 파란 달을 보여줘야 한다! 그는 농담 한마디도 들려오지 않는 사무실 문을 활짝 열었다. 활짝 웃고 있는 그와는 달리 사원들의 표정에는 웃음기 하나 없다. 그가 쾅 소리 나게 문을 열었음에도 아무도 문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로 일에 열중할 뿐이다.
“파란 달이 떴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는 그의 모습은 흡사 영웅이다. 하지만 사원들, 영 웅의 말에 관심 없다. 몇 명만이 그를 힐끗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
일 뿐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외친다.
“지금 하늘에 파란 달이 떴다고요!”
조용한 사무실에 자판 치는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 사악사악 들린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얘기하기 시작한다.
“서현 씨 지금 밖에 파란 달이 떴어.”
“저 바빠요.”
“도원 대리, 파란 달 본 적 있어?”
“조용히 하세요. 시끄러워요.”
“오금 과장님 파란 달이 얼마나 큰지 아세요?”
“이것 좀 놓고 얘기하지.”
“부장님 제가 방금 밖에서 무얼 봤느냐면요…….”
“신금호 대리 나랑 얘기 좀 하시죠.”
그는 부모에게 혼나러 끌려가는 아이처럼 시무룩하게 부장의 뒤를 따른다. 어질러져 있는 인형들, 허공을 가리키며 유령이 했다고 이르는 아이. 엄마 아빠는 거짓말을 하는 아이를 혼낸다. 하지만 인형은 정말 유령이 어지르고 간 건데. 부모들은 커피를 마시며 자기들끼리 상상 친구라고 비웃을지라도 정말 있었다니까 그 유령은.
“신금호 대리, 사내 분위기 흐리지 마세요. 파란 달은 무슨 파란 달.”
“부장님 정말이에요. 지금 저 커튼만 걷으면…….”
“그만해. 신금호.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프로젝트 참가자 중에 너만 아직도 대리인 거 몰라? 윗선에서 너 자르라고 난리야. gm-akd 복용 거부는 건 퇴사 사유인 거 알지?”
그는 부장실에 있는 커튼을 생각했다.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검은 암막 커튼.
“정신 좀 차려. gm-akd도 복용하고, 종일근무 신청해.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저 커튼만 걷으면 되는데. 저 커튼만 걷으면 푸른빛이 꿈처럼 들어오는데.
몇 년 전 신금호는 어떤 프로젝트에 참가한 적이 있다. 나라에서 진행하는 극비 프로젝트. 일반인은 프로젝트의 유무도 알지도 못했고, 연구원들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맡은 부분만 하고 넘길 뿐이었다. 이것의 결과물은 gm-akd라는 이름의 하얀 알약.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알약 하나만 먹으면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시험 전날이나 마감 전날에 상상하던, 잠을 자지 않는 밤이 오는 것이다. 나라에선 이 약물을 싼값에 공급했고 사람들은 앞 다투어 gm-akd을 사다먹었다. gm-akd이 상용화된 지 몇 주 만에 약은 모두 팔렸고, 신금호의 회사는 돈방석에 앉았다. gm-akd은 사람들이 더 많은 시간을 누리기 위해 개발된 약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전에는 잠을 줄이면서 경쟁자를 제쳤지만, gm-akd을 복용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내놓아야했다. 쉬는 시간, 먹는 시간, 씻는 시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gm-akd을 복용하게 되면서 경쟁은 과열되어만 갔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오고 휴일에도 쉬지 않았다. 퇴근도 하
지 않았고, 쉬는 시간도 아껴서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신금호 빼고. 그는 꼬박꼬박 퇴근을 했고 약을 복용하지도 않았다. 가끔 커피를 마시러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왜 다른 사람들 같이 살지 않느냐고 물었다.
“꿈을 꾸고 싶어요.”
아무도 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를 설득하려고 했던 사람들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부장의 충고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장은 자신이 할 말만 하고 그를 부장실에서 내보냈다. 그는 책상 앞에 고개 숙인 부장을 보며 방을 나갔다. 내가 틀린 게 아니야. 그는 파란 달조차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다. 일의 능률을 위하여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게 창문을 가린 사무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파란 달도 보지 못 할 거면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 사표를 썼다. 부장은 그에게 몇 마디 말을 하더니 사표를 수리했다. 사원들은 짐을 챙겨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도 쳐다보지 않았다. 집에 가는 내내 그는 하늘을 보며 걸었다. 죽을 때까지 파란 달만 보며 살고 싶다. 그는 머리맡에 있는 창문으로 달을 보며 침대에 누웠다. 내일이면 파란 달이 뜨지 않을 까봐 겁이 났다. 그는 집 안의 커튼을 모두 걷은 채로 잠을 잤다. 푸른빛이 밤을 채웠다. 그는 파란 꿈을 꾸었다.
“엄마, 파란 달 봤어요?”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창밖은 해가 쨍쨍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전화할 시간이 어디 있어서 전활 한 거니? 빨리 끊고 일해라. 너 아직까지 잠 안 자게 하는 약 안
먹는 건 아니지?”
“나 회사 그만 뒀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회사 가서 싹싹 빌고 다시 일해라.”
“이제 일 안 할 거예요.”
“일을 안 하면 뭘 할 거냐?
뭐 먹고 살려고 돈이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든?”
“다른 일 찾아볼게요.”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둔 이유가 뭐니?”
“꿈을 꾸고 싶어요.”
“아직도 꿈 타령이니 정신 좀 차려라. 헛소리도 그만하고. 나도 일해야 돼. 전화 끊는다.”
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자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꿈을 꾸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사람들이 왜 이걸 포기하
는 지 알 수 없다. 햇빛은 따사로웠다. 잠이 온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가 잠에서 깼을 때는 푸른빛이 그의 머리맡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였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달빛을 받으면 힘이 솟는 것 같다. 이제 이 도시에는 꿈을 꾸는 사람이 없는 걸까. 그는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바빠지면서 들리지 않게 되었던 노랫 소리가 조용한 거리에 퍼졌다. 다음날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아 푸른빛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일어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그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직장을 새로 구하지 않을 거냐며 그를 쏘아댔다. 어머니가 바빠서 잔소리가 빨리 끝난 게 다행이었다.
전화통화를 끝낸 그는 또 노래를 불렀다. 어렸을 때 부르던 노래다. 아침에 유치원에 가면 모두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는 그의 출근길에 보던 유치원으로 갔다. 노랫소리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유치원도 조용했다. 아이들은 노래를 하지 않았다. 24시간 내내 일을 하는 부모를 기다리며 학습지를 풀고 있었다. 아무도 놀이터에 나가 놀고 싶다고 조르지 않았다. 놀이터는 비어 있고 먼지가 쌓여있었다. 그는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파란 달이 뜰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밤이 되자 그는 간단하게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죽은 듯이 조용한 도시는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꿈을 꾸는 곳으로 가고 싶어. 그는 기차를 탔다. 기차는 밤을 지나쳐 덜컹덜컹, 도시에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사람들은 기차 안에서도 바빴다. 서류나 신문,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몸을 뒤척였다. 밝은 형광등에 눈을 감아도 눈이 부셨다. 그는 잠을 자기를 포기하고 밖을 구경했다. 도시를 벗어난 지 한참 되었지만 불이 꺼진 곳은 보이지 않았다. 요즘에는 시골에서도 gm-akd를 복용 한다는 말을 들었다. 식물을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해 24시간 동안 불을 켜놓는 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꿈을 꾸는 곳으로 가고 싶어. 밝은 기차가 어둠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깜박 잠이 들 동안 기차는 불빛이 없는 곳에 다다랐다. 그는 기차에서 내렸다. 그곳의 불빛이라고는 가로등과 달빛뿐이었다. 그는 마을로 내려갔다. 길목마다 푸른빛이 내렸다. 그는 걸어가다가 마을 입구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길 위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 푸른빛이 감돌았다. 여자가 그를 보더니 이리와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는 여자의 옆에 가 앉았다. 여자가 손끝으로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달빛이 참 예쁘죠?”
“달을 볼 줄 아시네요?”
“당연하죠. 눈이 있는데.”
“아, 아뇨 그 뜻이 아니라…….”
달을 보는 사람을 찾았다. 그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노트북과 서류를 들여다보느라고 바로 위에 떠있는 달을 보지 못한 사 람이 한 둘이었나. 그런데 지금은 밤늦은 시간이다. 여자는 왜 알약을 먹으면서 일을 하지 않고 있을까. 그가 본 gm-akd 복용자들은 모 두 일을 하느라 바빴는데.
“이름이 뭐예요?”
여자가 물었다.
“저요?”
“그럼 당신 말고 누구한테 하는 소리란 말이에요 지금?”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신금호요…….”
“성이 신? 이름은 금호?”
“아뇨. 그냥 이름이 신금호.”
“아, 전 나명에요. 저도 그냥 이름이 나명.”
“뭘 하려고 gm-akd를 복용하시는 건가요?”
“gm-akd요? 그 잠 안 자도 되는 알약? 전 그 약을 먹지 않아요.”
“늦은 밤까지 깨어 있잖아요.”
“졸려도 참는 거죠. 오늘은 파란 달이 뜨는 날이잖아요.”
다행이다. 그는 안도했다. 그리고 마음이 설레었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gm-akd를 복용하지 않나요?”
“네. 저를 포함한 모두가 그래요. 사람이 밤이 되면 자고, 꿈을 꾸
고 그러는 거죠 뭐. 다른 곳은 식물도 쉬지 못하게 하지만 저희는 안
그래요. 식물도 쉬어야 더 건강해진다고 저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
셨어요.”
그녀는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눈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는 기분이 한껏 들떴다. 둘은 달을 보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그가 더 이상 피곤함을 참지 못 하고 하품을 하자, 나명은 그를 마을로 데려가서 방을 하나 내주었다. 그는 그 마을에서 별다른 걸 하지 않고 지냈다. 낮이면 농사일을 도왔고, 밤이면 나명과 마을 입구에 앉아 달을 바라보았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행복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것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행복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명이 한 말이 그가 방법을 찾도록 해주었다.
“우리 동네에 기자가 한 명 와있어. 명일이라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범죄도 일어나지 않잖아. 그래서 뭐 할 일도 없고 기
삿거리도 없고 해서 요양 겸 와있대.”
그 말을 듣자마자 그는 굉장한 걸 깨달은 사람처럼 몹시 기뻐하고 흥분했다. 그날로 그는 도시와 마을을 왔다 갔다 하며 무언가를 준비했다. 나명이 뭐냐고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며칠간 바쁘게 지냈지만 밤이 되면 나명과 꼬박꼬박 산책을 했다. 며칠 뒤 그는 골방에서 나와 나명을 불렀다.
“명일을 불러줘.”
그는 방안에서 명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방을 나온 명일은 흥분해서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 나온 기사는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gm-akd, 심각한 부작용 밝혀져
일 년 전, 약 한 알만 복용하면 아무런 부작용 없이 24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고 광고했던 gm-akd에 심각한 부작용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 … (중략) gm-ak d의 개발처인 지하제약은 장기간에 걸쳐 임상시험을 통해 효과를 입증했다고 발표했으나 핵심 연구원의 폭로로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는 게 밝혀졌고 …(중략) 지하제약 측은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gm-akd의 부작용은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만큼 수명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현재 gm-akd를 복용한 사람들의 연이은 사망 소식에…(중략) gm-akd의 복용을 중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명일기자
“gm-akd를 복용하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고, 파란 달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아!”
도시에 갔다 온 명일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사람들에게 그걸 주고 싶었어.”
그가 웃었다. 그때까지 매일 밤 달은 파란 달이었다. 기사가 나고 며칠 후, 마을 입구에 경찰차가 여러 대 왔다. 경찰은 몰려드는 주민들을 막고 신금호를 찾았다. 그들은 그를 찾자마자 차에 태웠다. 그는 아무런 반항도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명과 명일만 양복 입은 남자들을 말릴 뿐이었다. 나명이 남자의 양복 끝을 잡고 떨어지지 않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신금호씨는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나명의 손이 양복 끄트머리에서 떨어졌다.
“왜…….”
나명은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환했다.
“오늘도 파란 달이 떴어.”
그의 웃음 위로 파란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가 마을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날 뜬 파란 달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차상 수상작
리토피아 백일장 차상 수상작 운문부 시
권예림(혜원여고)
태풍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젖지 않는 일기장
구겨진 가정통신문처럼 잿빛으로 흐릿한 하늘에
까만 지우개 가루 같은 새떼들이 날아가고 있어
창밖에서 원망을 동반한 호우가 쏟아지면
잠잠하던 지난날을 헤집어 태풍의 이름을 짓지
일부러 순한 이름으로 지었다던 출생의 비밀
이왕이면 사나운 맹수의 이름이면 좋았을걸 그랬어
튤립처럼 뒤집어진 우산을 쓰고 학교로 가는 길
커피우유 같은 흙탕물에 작아진 욕조를 띄우고
비눗방울 속 무지개가 뜨는 곳을 찾아 흘러가고 싶은데
학교는 왜 오르막에 있을까 발목에만 물이 차서 슬픈 아침
눈부시게 하얀 체육복 가슴팍에 새겨진 돌고래가
뙤약볕에 말라 죽어가고 있어 비릿한 흰 우유를 먹어서일까
키가 큰 짝꿍의 보라색 리코더에서 흘러나오는 침처럼
항상 찝찝하고 흥건한 물빛이 고이는 교실에 앉아
빠르게 쏟아지는 빗발의 획순을 따라 받아쓰기를 하지
창문 너머로 동동 떠다니는 주름들은 너무도 낯설어
사라진 계절을 찾아 창밖을 두리번대는 동안
무거워진 처마를 타고 소리 없이 다가오는 장마
우기를 지나온 유년이 복도를 따라 북상하고 있어
별빛이 익어가는 장독
메주 같은 토담을 타고 자라나는 넝쿨을 따라
향긋하게 익어가는 내 유년의 키가 자라나던 시절
할머니는 뭉뚝한 손가락으로 반짝이는 별을 따다가
불린 콩처럼 반드러운 얼굴에 지장을 찍듯 붙여두셨다
이른 이별에 손짓하는 아궁이 불빛이 사라지면
어둠을 배웅하는 뭇별들이 시린 한기를 메우던 창문
할머니가 항아리 속에 넣어둔 별빛들을 모두 건져내자
깊은 밤이 간장처럼 우러난 하늘에 옅은 파문이 일고
주름진 얼굴 한켠에 단단한 세월의 끈기가 묻어난다
오래전 비옥한 살갗에 묻어둔 항아리를 열면
생의 갈피마다 차곡하게 눌러 담은 추억들이 살아 숨쉬고
마당을 가득 메우는 사연에 은은하게 번져가는 미소
찬바람에 점성이 사라진 꽃잎이 야윈 두 볼에서 떨어지고
이마에 겹겹이 두른 금줄들이 절망의 파편들을 쫓는데
철없는 유년을 감싸던 울타리에 담긴 무수한 표정들이
흙냄새를 머금은 연잎을 타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밤
내 안에서 숙성된 계절의 향기가 환하게 피어날 때 쯤
나날이 발효되어가는 청춘에 코를 틀어막던 나도
주름에 음각한 시간의 순리를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별빛이 익어가는 장독
강
눈 뜨는 자리마다 사라지지 않는 웃풍이 분다
붉어진 눈시울에 자라나는 수풀들 사이로
차가운 물살이 흐르는 할머니의 강을 들여다보면
초우가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가
얼음장 같은 눈가에 주저앉아 긴 낚시를 하고
빛바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
채 얼지 못한 상처들이 녹아 파문을 만들고 있다
깊은 기억 속에서 자꾸만 찌를 흔드는 바람은
해가 지나도 소식이 없는 재회가 보낸 안부일까
할아버지가 애써 잡히지 않는 꿈들을 낚는 동안
부레를 떼고 뭍으로 나온 유년은 물빛 나룻배에 올라
얽혀있는 주름의 지류를 따라 바다로 내려간다
검버섯 같은 연잎들이 물 고인 살갗에 뿌리를 내리고
낚싯대처럼 굽은 허리를 쥐고 가슴을 두드리는 할머니
퇴적된 시간을 지고 있던 눈꺼풀이 무너져 강을 메우고
턱밑까지 도달한 생애가 짠 빗방울을 떨구는데
낙화한 꽃잎을 태운 상여가 머나먼 강을 건너는 밤
메마른 얼굴마다 범람하는 강물이 향내 짙은 물길을 내고
자욱한 안개 섞인 위로가 연꽃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차상 수상작
리토피아 백일장 차상 산문부 수필
이소희(안양예고)
풍경
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집 처마에는 작은 풍경이 하나 달려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딸랑 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면 바람이 왔다간 흔적만 있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죽음도 풍경 소리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 인연이 다해서 먼저 가버린 걸 어떻하겄어. 붙잡지 말어야지. 사람이 죽으면 바람이 되는 거란다. 그날 밤 할머니는 내게 팔베게를 해주면서 그런 말을 했다. 할머니는 청소를 하다가도 처마에 걸린 풍경을 가끔 바라보았다. 풍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되어 버린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할머니는 풍경이 되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할머니, 오세암 이야기 알고 있지? 할머니가 내가 잠 안온다고 투정 부릴 때마다 해 준 이야기 있잖아. 아이는 관세음보살님을 불렀는데 진짜 관세음 보살님이 나타나 아이랑 놀아주었잖아. 그런데 왜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 걸까. 할아버지를 돌려보내는게 아이랑 놀아주는 것 보다 더 쉬운 거잖아. 할머니는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람은 머무르지 않지? 할아버지는 여행을 떠난거야. 아주 긴 여행을.
가끔 할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풍경을 한 번 울리는 거란다. 임아, 나왔다 가오. 그렇게 말하면서. 풍경이 자꾸 울리면 우리가 잠 못잘 까봐 할아버지가 아주 가끔 오는 건가보다. 자주 오지 않는 할아버지가 야속하다.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할머니와 산에 올랐다. 산에 오르는 동안 할 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산 꼭대기에 바람이 머무는 것 같지? 사실은 바람은 산꼭대기에 머무는게 아니란다. 할머니가 말했지, 바람은 머물지 않는다고. 할아버지가 키우던 잉어들은 할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머리를 빠꼼히 내민다던데 할머니는 기가막히게 바람이 머물렀던 자리를 찾아낸다. 할머니는 먼저 간 할아버지가 밉지 않아? 나라면 정말 미울 것 같은데. 인연이 다해서 떠난 사람을 어떻게 붙잡겠니. 사람 가는데 순서가 없는 거야. 우리 머리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할머니는 바람이 지나간 자리로 손을 뻗었다. 할머니의 손에 주름이 그렇게 많이 있었나. 할아버지, 바람이 돼서 어떤 곳을 가보셨나요? 혹시 할머니의 마음속 엔 가보셨나요? 할머니는 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금방 찾아내요. 인연이 다해 할아버지가 떠났다고 할머니는 말하지만 아직 인연이 다 한 것 같지는 않아요. 할아버지는 계속 할머니 곁을 맴돌고 있나봐요. 풍경소리가 들려요. 산에 내려다보는 할머니 집은 제 손바닥만해요. 할아버지는 얼마나 작은 것들을 보고 있나요. 할머니 꿈속에도 좀 나와주세요. 할머니가 할아버지 얼굴을 잊어버릴까봐 늘 사진을 보는데 사진도 이젠 바래져서 얼굴이 보이지 않네요. 풍경소리가 들릴 때마다 할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 본다. 하늘은 노란빛을 띄고 있다. 할아버지가 즐겨마시던 국화차를 닮은 하늘을 할머니는 오랫동안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딸랑 딸랑. 할아버지가 왔다. 임아 나왔소. 풍경은 그렇게 말했다.
다시 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4월 15일. 나는 광화문 광장에 갔다. 온통 노란색.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란 천은 흔들리며 물결을 만들었다. 벌써 1년이다. 사람들의 가슴엔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 속에 굉장히 어색 하게 서 있었다. 큰 사건이었는데도 세상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세월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런 내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깝게 고개를 숙인 사람들 속에 있기에는 너무 미안하고 그 자리에 내가 있어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노란종이와 펜을 내게 주면서 한 줄 소원문을 써 달라는 어떤 언니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도망가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펜을 들었는데 머릿속이 노랗게 변하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함께 갔던 친구는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진실 규명을 바란다고 썼다. 나는 그 친구와 똑같이 써서 언니에게 주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 모습을 촬영하는 카메라들도 보이고. 광화문 광장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사람이 모여 있으니 호기심에 들렸다 가는 모양이었다. 1부는 세월호 참사 미공개 영상으로 시작했다.
배가 이만큼 기울어 졌어요. 살고 싶어요. 내 새끼 살려 내란 말이야.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아저씨는 투박한 손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옆에 있던 아줌마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살고 싶어요. 라는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상상되지 않았다. 배가 가라앉고,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가슴이 답답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죄책감인가. 눈물이 마르면 그 위에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엄마 딸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난,
다음 생엔 내가 엄마가 돼서 꼭 더 사랑해 줄거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라는 고 정지아 학생의 편지와 사랑해. 딸내미. 보고 싶은 내 딸 지아야. 유난히도 엄마를 챙기고 생각해주던 속 깊은 내 딸 지아야. 엄마 꿈속에 친구와 손잡고 분홍색 가방을 메고 가던 너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
구나. 사랑해 딸내미, 꿈속에서 만나자. 엄마의 답글을 들을 때에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가족을 잃고 세상을 잃은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차라리 사는 것 보다 죽는 게 더 낫겠다. 고 생각을 했던 것을 후회했다.
자식 잃은 게 계산이 돼? 정신이 없이 쫓아다니며 건강 잃으면서 하는 우리들 이 일을 어떻게 계산 할 수 있겠냐고. 우리가 지금 만들려고 하는 안전법과 그것 위해 하는 우리들의 모든 행동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라는 유가족의 말, 진실 규명에 애쓰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비난을 하기도 하고. 나 살기도 버거워죽겠는데 무슨. 이라며 무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그런 걸 볼 시간에 연예인 스캔들 기사나 한 번 더 클릭해서 보기도 한다. 그들을 비난하기 전에 내가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는 것. 뿐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서 그저 울었다. 1년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전 국민이 슬퍼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1년 후 지금 빨리 이 일
이 마무리되길 바라는 사람들부터 . 1년이란 시간이 이렇게 만들어 버린 건지 다수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 일은 잊혀져 갔다. 유가족들은 잊혀지는게 가장 무섭고 두렵다고 했다. 기억의 문을 지나면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의 사진이 붙여 있다. 그 아래엔 흰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나와 같이 교복을 입고 꿈을 꾸던 아직 젊은 영혼들이 사진이 되어 벽에 걸려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국화를 놓았다.
노란 리본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다시 봄.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겨있다. 이곳은 봄이 찾아 왔는데도 춥고 외롭고 슬프고 그립다. 매일 밤 사진을 붙잡고 집에 돌아오라고 눈물을 흘리는 유가족들. 진실을 규명해 달라 외치지만 들어주지 않는 매정한 세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란 리본을 달고 엄마 손 잡고 돌아가는 5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를 보았다. 몇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해 주는 한 그들은 살아있다고 믿고 싶다. 세월호 침몰에 억울한 죽음이 어떤 진실이 있는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 실종자의 목숨과 유가족들의 슬픔을 더 이상 무시하지 말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다시 봄. 그들이 돌아왔을 때 억울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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