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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특집/김구용론/백인덕/전후 김구용 시의 난해성과 환상성의 관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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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00회 작성일 16-12-30 17:52

본문

김구용론

백인덕





전후 김구용 시의 난해성과 환상성의 관계 문제





1.
   한 시인의 죽음은 물리적으로 비가역적인 사건이라는 자연적인 의미 이외에도 그의 시세계가 더 이상의 변형 가능성을 잃었다는 의미에서 자못 중요한 기점이 된다. 비록 사후에 미발표 원고가 발견되거나, 의도적으로 필명을 사용한 경우가 밝혀지기도 하지만 앞의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 ‘시세계의 변형 불가능성’이 바로 해석의 다양성을 여는 첫 충격이 되고, 시인의 시사적 위상位相을 재정립하게 하는 가장 중요하고 바람직한 요인이 된다. 모든 가치가 대중매체의 폭압적인 영향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현대적 환경 아래서는 더욱 그렇다. 문학 외적 영향과 평가에서 일정부분 멀어졌을 때, 다시 말해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필연적으로 현재의 시사적 상황과 거리가 형성되었을 때 시인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탐색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연보에 따르면(민명자 제공) 김구용은 1949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新天地』 10월호에 김수경金水慶이라는 필명으로 「산중야山中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 하나의 사실 기록은 그 자체로 몇 개의 의문을 불러온다. 1949년 10월이라는 시간적 좌표는 시인의 시세계에 오직 전후(1950년 6월 한국전쟁)만 있을 뿐, 전전戰前은 부재하거나 혹은 영향, 흔적으로 기입된 것이 아닌가? 또 하나는 「산중야山中夜」라는 표제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한글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 했던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시대 상황을 고려했을 때, 미군정 아래서 극단으로 치달은 좌우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이후 시세계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김구용의 시세계를 이수명(「50년대 초현실주의의 운명-김구용의 시와 그 위상」)은 명쾌한 분석은 통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김구용의 작업은 1949년 10월에 산문시 「산중야」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해서 2000년에 전집이 출간되기까지 50년에 달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기나긴 시력은 주제나 기법면에서, 내용과 형식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동반하는 역동적인 것이었는데, 50년대에 씌어진 자유시와 산문시, 그리고 60년대에 들어서부터 계속해서 작업한 연작 장시의 세계로 크게 양분된다. 산문시에서 연작 장시로의 전환은 김구용 시의 큰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산문시에서 보여주는 형태 파괴적, 해체적, 초현실주의의 경향과 연작 장시의 형태 복원적, 질서의 세계의 대립이기 때문이며, 또한 내용면에서도 전자의 실험적, 초현실적 세계와 후자의 찬미적, 서정적 세계의 대립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형식적으로는 산문시/연작 장시, 내용에 있어서는 초현실적/서정적 대립이 김구용의 시세계를 양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현실과 서정의 대립은 좀 과격한 것이지만, 이 분석은 근거 있고 유효하게 보인다. 하지만 필자가 앞에서 제기한 세 가지 의문은 이와는 좀 다른 궤적을 따라가고자 한다. 먼저, 1940년대 말에서 1950년 초반에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은 시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체계화 되고, 세련된 한국어(한글)를 학습하거나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 커다란 영향 요소로 적용되어야 한다.

  


열매들 고운 살이 흐물어질 때 달빛 푸른 산 가슴에 스며, 골짜기마다

조개처럼 흩어진 희끄무레한 뼈다귀도 굶주린 짐승들의 검붉은 주둥이도

꿈이 殘照로운데, 소슬한 빗발 흐느끼면 썩은 씨 움트는 기약 어둡기도 하

더니, 십오야 밝은 빛 올올이 받아 사모칠 듯 향기로운 샘 곁에, 외로운 국

화야 다시 꽃 폈건만, 숲 사이 아롱지는 바람도 없고, 짙은 밤 온 산은 잠

이 깊고녀.



                                                                                                                                                                   ―「山中夜」 전문



   일반적이 예상과는 달리 등단작인 이 작품은 ‘선경후사先景後情’,(첫째 복문이 선경이라면 그 다음 문장을 후정이라 할 수 있다.)라는 전통적인 표현 수법을 견지하면서 어휘의 부정확한 적용이나 통사적 혼란이 없는 한국시의 서정적 맥락을 튼실하게 구현하고 있다. 다만, 돌발적인 것은 “골짜기마다 조개처럼 흩어진 희끄무레한 뼈다귀도 굶주린 짐승들의 검붉은 주둥이도 殘照잔조”와 같은 시행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유추적 연상으로 충분히 해명될 수 있다. ‘조개(석질)→뼈다귀(발전된 석질)→ 잔조(슬픔의 경화)’로 읽을 수 있다. ‘살(肉)-고운 것, 부드러운 것’에서 시작해서 단 한 행 만에 ‘뼈骨 -슬픈 것, 딱딱한 것’으로 전이轉移하는 시적 사유의 경로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생리적 불안과 독서의 체험이 시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결정 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동시대의 대부분의 시인들이 자기 말(한글)에 곤란을 겪고(사유가 아니라 외화의 표층으로서 한글, 김수영을 생각해 보라) 있을 때, 김구용 시인은 그 상황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언어의 함축적 사용이라는 부담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범주의 고민으로 시인을 몰아넣을 수 있는데, 무의식적 불안이 실제적 위협으로 현재화할 때 발생한다.



2.
   김구용 시인의 시세계 전반을 통시적으로 보자면, 모든 시는 전후의 시다. 한국전쟁은 그만큼 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시세계의 질적 자기 결정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시인이 몇몇 종군시인처럼, 아니면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시작詩作했다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현대문학 통권 338호(1983년 2월호)의 「나의 문학 나의 시작법」이라는 기획 특집에서 김종철과의 대담을 통해 그간 시력詩歷의 몇 가지 의문에 대해, 육성 일부를 들려준다. 그 내용은 하현식(「선적 인식과 초현실의식)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편의상 내용을 인용형식에 따르지 않고 전재한다)
   이 기획에서 대담자 김종철은 김구용 시의 원리를 첫째, 논리의 해체와 직관의 환상적 인식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과 둘째, 이질적 낱말의 소위 폭력적인 결합의 시도로 이미지와 이미지, 의식과 의식의 충돌로서 새로운 시적 전달력을 획득하였다는 점과 셋째 주제에 대한 상반된 대립관계를 통해서 부조화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과 넷째 초현실과 선적인 세계가 상당히 조화되고 있다는 점을 특성으로 들었다.
   이러한 논의가 1980년대 초반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아도, 김종철의 정리는 김구용의 시세계에 대한 기존 일반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일종의 보편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리가 후대에 이르러 반드시 수정, 보완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에 갖지 못했던 여러 도구들(물리학적으로는 관점, 미학에서는 기준 등)이 발견,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해는 늘 새로운 것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일제 말(요행이 징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서 해방 공간을 거쳐 한국전쟁, 직접적으로는 부산 피난 시절도 이어지는 집약 묀 몇몇 체험을 통해 김구용의 시세계는 이 경험들을 문제적으로 요약할 수 있는 방식, 혹은 통로를 찾게 되는데, 넓은 의미에서 초현실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이를 직접적으로 토로한 바 있는데, 앞에 인용한 김종철과의 대담에서 “그 무렵 난리와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선배들의 글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코앞에 있는데, 앉아서 산천초목과 자연만 노래하고 있으니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요”라고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은 초현실주의라기보다는 반전통, 음풍농월吟風弄月식 자연 예찬을 거부하는 반서정에 가깝다. 이는 우리 시사가 주목해서 기입해야 할 하나의 문제를 수면 위로 밀어올린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서구의 초현실주의는 양차대전 사이와 아우슈비츠가 실재했고, 온인류에게 목도 된 이차대전 이후로 엄격하게 구분된다. 미하일 함부르거(『현대시의 변증법』, 한길사, 1993)에 의하면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 보들레르의 상징주의, 재현미학의 붕괴에 대한 철학적 입장 등에 영향 아래 반전통, 반서정의 기치를 높이 들고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귄터 아이히나, 파울 첼란 등이 주축이 된 후기 초현실주의는 인간성과 현실성에 대한 지독한 회의를 기반으로 실존주의와 해체미학에 근거한 것이라는 차이를 갖는다. 사족이지만, 브르통, 짜라, 엘뤼아르 등 프랑스 문인들이 주축이었던 전기에 비해 후기는 브레히트를 포함하여 전술한 독일 시인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차이에서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슈르-’ 혹은 ‘누보-’라는 수식어가 붙는 초현실주의는 실제로는 ‘의식과 현실의 과잉’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우리가 건설한 문명이라는 가면 아래 약육강식의 자연 원리가 적나라하게 적용되고 있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려는 기획 아래 진행되었다.
   김구용은 전반기, 즉 프로이트나 상징주의, 재현미학의 붕괴와 같은 특성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필자의 판단으로는 그의 한문학 소양이 전반기를 말 그대로 초월하는데 일조했다고 보인다), 서구적 의미에서 후반기의 특성을 드러낸다.



   현실의 그림자는 내 외로운 시각 안에서 결정한다. 눈은 헛된 꿈의 각도

를 통하여 내다본다. 바람에 흩어지는 매연이 내 칠색七色의 애정을 지워

버린 지 오래되었다. 저기에는 비애도 없이 독사가 똬리를 튼다. 아니, 방

심한 톱니바퀴가 돌아간다. 얼마나 매혹적으로 흘러내리는 피가 꽃처럼

만발하느뇨. 몸은 비를 노박 맞는다. 더러운 절벽切壁에 침투한 내 골육의

그림자는 관념의 환광幻光으로 나타났을까 나의 안계眼界는 짜디짠 눈물

에서 암흑으로 용해한다. 거기에는 하나의 태양과 수면睡眠도 없다.



                                                                                                                                  ─「시각視覺의 결정結晶」 전문



   앞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해방공간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그 시대를 담당했던 한국의 젊은 현대시인들, 김수영, 박인환, 박봉우, 조행, 전봉건, 물론 김구용을 포함해서 이들은 일어와 영어, 한문적 소양이 있는 이들은 한자까지 체계화되지 못한(정보가 아니라 정서의 교환가능성으로서 구문법(통사론)으로 정리되지 않은) 언어(파롤, parole)의 세계에 살았다. 이는 시대적 모순이므로 시인 각자에게는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각’, ‘각도’, ‘톱니바퀴’, ‘안계’와 같은 어휘들이 환기하는 것처럼 이 무렵, 김구용 시인은 “짜디짠 눈물에서 암흑으로 용해”하는 현실을 부러진 통사로 응수한다. 그 끝에서 이 현실의 과잉, 아니 야수野獸의 법칙이 백주대낮에도 통용되는 이 현실을 너머서기 위해 시인은 약간의 ‘환상’에 자의식을 밀어 넣는다. 뒤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김구용의 초현실주의적 경향이 한국 현대 시사에서 유의미하게 결정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박용래, 박재삼, 김종삼과는 확연하게 다른 방향이고 박인환, 김수영, 전봉건과도 다른 김구용 시인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민명자 교수가 정리한 약력 속에서 한 가지 즐거운 발견이 있었다. 김구용 시인이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나 굴원의 「어부가漁夫歌」,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등을 강의하셨다는데, 생전에 들을 수 있는 광영은 없었지만, 모두 필자가 외우고 있는 글들이다. 고교시절 한문 선생님은 삼년 내내 이 세 개만 쓰고 외우게 하셨다. 국문과에 진학해 한문시가 수업 때, 한양대 윤석산 교수님께 수업을 받았는데, 굴원의 「어부가」를 다 암송해, 약간 비정상적인 대학생 취급 받은 기억이 새롭다.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난해성’이라는 문제로 귀결하는데, 극단적으로 다다이즘이 표방하는 것처럼 현실적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필연을 제거하고, 자동기술법이라는 시적 수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 운명을 무의식의 손에 내맡겨버리는 것이라는 오해가 늘 뒤따른다. 하지만 수차례 강조했듯이 김구용 시인은 이런 일반적 이해의 경로에서 늘 한 발짝 떨어지거나 비켜서 있다.



3.
   우리가 ‘난해하다’고 말할 때는 통사적으로 규칙 파괴가 심해 일반적 언술의 수준에서 의사교환이 불가능할 때와 비유, 즉 개인적 상징이 강해 참조 목록이 없으면 본 뜻을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만을 지칭한다. 술이나 약에 취해 떠들어 대는 ‘나’는 난해한 것이 아니라 ‘난삽’한 것이다. 우리는 그 지껄임을 모두 이해할 필요도 없고, 노력할 가치도 없다. 시적으로 유의미한 것은 최소한의 방향과 자기 지시성, 혹은 목적성을 갖추어야만 한다.
   김구용 시인의 ‘난해성’은 1960년대 이후, 이수명 교수는 ‘후반기’ 동인들의 실패를 잘 지적했지만, 뒤이어 등장한 ‘현대시’ 동인들의 성과와 연결해 보면, 시적 ‘환상성’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하는 시사적 의미를 갖는다.
   필자는 이미 다른 글(「불안과 매혹-시에 있어서 환상성의 문제」, 『사이버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보고사, 2006)에서 ‘환상성’의 문제를 다룬 바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환상성fantastic’은 언제나 ‘현실성realistic’과의 관련 아래서 논의 되어야 한다. 츠베탕 토도로프와 로즈마리 잭슨, 캐서린 흄의 환상이론을 개괄했지만, 김구용의 시와 관련해서는 단연 로즈마리 잭슨의 ‘환상-전복의 문학’론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보인다. 그는 우리 시대, 세계 즉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강고하게 안착한 현실에서 문학의 존재 이유를 환상을 통한 체제(필자는 개인적으로 체계system를 더 선호하지만)의 전복 가능성에 둔다. 김구용 시인의 견인주의는 이를 선취先取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그러한 징후가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이는 시인의 육성을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김종철과의 대담에서 한국전쟁 이후 시를 산문체에서 바꾸게 된 정황을 밝히는 대목에서 등장한다, “그래서 그 후 나는 나의 시가 너무 걸레(?)가 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한 10년간 계획해서 쓴 씨가 「九曲」이었는데 이 시도 양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되도록 짧게 쓴다고 노력하여 말을 압축한 것이 「頌白八」 편입니다.” 이 언급으로 인해 그의 시가 선적 경지와 심취하는 영감에 의지한 것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촉발됐다고 볼 수 있다. ‘송백팔’의 경우 바로 ‘백팔번뇌’가 연상되지만, ‘구곡’은 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 연상되는데, 이 약간의 부조화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곡曲’을 ‘곡谷’으로 전치하면, 결국 김구용 시의 환상성의 일말이 드러난다. 그것은 1950년대 「消印」으로 대표되는 난해성에서 한 걸음 빠져나와 시인만의 이상향, 에덴, 무릉도원, 샹그릴라, 불국정토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그 세계의 건설에 나섰음을 세계에 공표한 것이다.



밤에 쓰는 시
아무도 못 듣는 말을
돌石은 용하게 알아낸다
돌은 날이 새기 전에
물水에 구절句節을 기록하고
너의 음성을
나의 목소리에 상감象嵌한다



                                     ─「육곡六曲」 전문




  혼자 수행하는 실존적 행위, “밤에 쓰는 시”를 ‘돌’이 용케 알아내고, “날이 새기 전에”, 밝음은 아폴로가 지배하는 시간이다. 그 동안 우리는 분별하고 계산하고 관계를 정의하며 현실이란 이름의 눈먼 노예가 된다. 교환가치로 표상되고, 우리는 서로의 가슴을 못 본 척 지나친다. 그러나 날이 새기 전에는 ‘돌’은 ‘물’의 소리를 기록하고 ‘너의 음성’과 ‘나의 목소리’가 ‘상감象嵌’된다. 상감! 지나치게 패이지도 도드라지지도 않는 이 중용中庸이 김구용 시의 환상성의 요체다.
  지인 몇 분은 아시겠지만, 필자는 김종삼 시인을 연구했다. 2015년, 입춘지나 ‘김구용문학상’ 시상식을 갔다 솔출판사가 제공한 김구용 선생님의 시집 『풍미』를 받았다. 적당히 마신 술과 인천에서 안산까지 한 시간 반, 지하철에서 이 시를 읽고 다시 읽으며 생전에 김구용 선생님을 뵙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는 시적 명제는 ‘사유’에서 멀어진 것이 대단한 자기 자랑인양 과시하는 이 훤소喧騷에서 데카르트와 칸트와 헤겔을 한꺼번에 소환하신다. 이 울림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필력을 한탄하며 글을 맺는다. 감사드려야 할 저녁이 기운다.

이제 조용히 ‘풍미’를 ‘풍미’하시라.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
이리하여 돌石은 노래한다.



생기기 이전에서 시작하는 잎사귀는
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
대답은 반문하고
물음은 공간이니
말씀은 썩지 않는다.



낮과 밤의 대면은
거울로 들어간다.
너는 내게로 들어온다.



희생자인 향불.



분명치 못한 정확과
정확한 막연을 아는가.



녹綠빛 도피는 아름답다.
그대여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풍미風味」 전문






**약력: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단단함에 대하여』 외. 《아라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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